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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5. 2022

다수결은 결코 진실의 잣대가 아니다.

우매한 대중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은 못 속인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貢이 묻기를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可하지 않다.” 하셨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可하지 않다. 고을 사람 중에 善한 자가 〈그를〉 좋아하고 善하지 않은 자가 〈그를〉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 하셨다.   

이 장의 내용은 뒤에 공부하게 될 ‘위령공(衛靈公) 편’ 27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맞닿아있다. 또한 더 공자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근원적인 사상의 근거를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인(里仁) 편’ 3장에서 ‘오직 어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또 남을 미워할 수 있다’는 내용을 통해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완곡하게 한 마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결국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현대의 단어로 바꾸면 ‘여론’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은 전술했던 두 장에서의 내용을 바탕에 깔고 있되, 굉장히 다각적인 면에서 사회의 여론이라는 것이 갖는 이중적인 면에 대한 일갈과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여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간악한 정치꾼들에 대한 죽비와 무엇보다 사회를 바르게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부분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매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먼저 이 장에 대해 주자가 어떤 식으로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 고을 사람은 마땅히 공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또한 각기 부류에 따라 스스로 좋아하고 미워한다. 이 때문에 善(선)한 자가 좋아하고 惡(악)한 자가 미워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구차하게 迎合(영합)하는 행실이 있는 것이요, 악한 자가 미워하고 선한 자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좋아할 만한 실상이 없는 것이다.     


이 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다른 내용들을 배경지식으로 삼되, 굉장히 복합적인 내용과 다각적인 입장에서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어려운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무엇보다 원문에서 공자가 전제로 삼고 있는 선한 사람들과 선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내용은 선(善)과 불선(不善)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인정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누구를 선하다고 할 것이고 누구를 선하지 않다고 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부분을 차치하고 공자는 그 절대적인 개념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이는 그저 공자의 억지나 무리한 설정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공론(公論)이라고 위 주석에서 주자가 표현한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백성들의 이성에 대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라 할 지라도 누가 선(善)한 지 누가 선(善) 하지 않은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회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전제하에 이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이는 조금이라도 문해력을 갖추고 있는 눈치가 빠른 배우는 이에게 있어서는 다소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 장의 내용 자체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반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분별력이 없으면 무조건 사람들을 따르고 무조건 사람들을 비난하는 그 주관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한 권계 역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이가 좋아한다고 여기거나 모든 이가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같은 의미에서 모든 이들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가 반드시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정치꾼들이나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연예인들을 생각해보면 억지로 꾸며서 남의 비위를 맞춰 그들이 원하는 허상을 보여주고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처럼 연기하여 환심을 사고 인기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 그렇게 산 환심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설사 완벽한 연기와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대중에게 부합하는 짓을 통해 그 인기와 환심을 유지한다손치더라도 결국 그렇게 그런 싸구려 연기와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검증이나 분석을 통해 그의 가식을 벗겨내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니는 사람들이거나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서도 그가 주는 이익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심미적인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붙어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단 한순간의 실수를 통해 민낯이 드러나 대중에게 외면당하거나 공격당할 때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절'이라는 것을 한다.     


앞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이 장의 내용 역시 앞에 공부한 내용들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항(恒)’의 개념에서 시작해서 부화뇌동(附和雷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거쳐 이 장의 내용이 가리키는 바는 아주 명확하다.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애호를 받을 수 없다. 아무리 ‘和’한다고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 ‘同’해주지 않는 것 같으면서 그저 품는 듯한 태도는 언제든 그들의 비위와 빈정을 상하게 만들어 발끈하며 적대감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다.      


맞다. 이 장의 내용에, 자신만의 주관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회적인 기준에 조화롭게 맞춰야 한다는 말은 없지만, 결국 앞에서 공부한 내용들을 이어받아 확장된 이 장의 복합적이면서도 다각적인 내용의 핵심은 자신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군자답게 멋진 모습으로 ‘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구분하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제대로 된 ‘和’를 통해 군자로의 길을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소인들은 자신의 주관과 상관없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저 똑같다며 거짓 공감을 보이고 환심을 사기 위해 간도 쓸개도 내놓으며 자신의 목적하는 바에 맞다면 자신의 주관이나 생각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며 어른다운 행실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말하는 이들은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진실의 따가움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며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자위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이 부정이고 사회를 좀먹는 일이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이의 따끔한 일침은 그들을 거의 발작 수준으로 경악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그들을 제거해야 할 눈엣가시로 여기게 된다.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하고 있는, 숨겨진 또 하나의 거대한 가르침은 마을 사람들로 대변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과연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앞에서 나는 이 장의 가르침이 성립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에 대해 공자가 아직까지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선(善)한 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믿는 부분이 반영된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횡단보도가 없는 육교가 있는 4차선 도로에 육교를 오르락내리락하면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은 잘 안다. 차가 다니지 않을 때, 육교 밑으로 재빨리 무단횡단을 하면 편하고 빠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불법이고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될 행동이라는 것 역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손을 잡은 아이의 엄마가 그 길을 매번 다니면서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빨리 뛰자고 무단횡단을 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 엄마는 아이에게 ‘왜 육교로 안 다니고 무단횡단을 하는 거야?’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반성할 감사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엄마가 그런 행동을 했을지언정 아이는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 공자의 기대는 그저 막연한 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옳다는 것이 무엇인지 선(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결코 모르고 있지 않다. 아무리 무지하고 못 배운 마을 대다수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태생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무엇이 선(善)한 지 그리고 무엇이 선(善) 하지 않은 것인지 알고 있다. 백번 양보하여 그것을 잘 모르는 모호한 상황이나 그만큼 간악한 이들이 등장한다면 그 경우를 위해 이 장에서 공자는 말한다. 선(善)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것이니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들이 싫어하는 바를 경계하면 된다고.      

그래서 뒤에 공부하게 될 ‘양화(陽貨) 편’ 13장에서 공자는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두루뭉술한 사람은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라고 다시 한번 이 장의 가르침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 그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 다른 이들의 공감이 필요하다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결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따위로 포장될 수 없는 행위이다. 자기 기준이 명확하고 자기 생각이 확고한 사람에게 이쪽에서는 답이 이랬다가 저쪽에서 답이 저랬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치 때문이다.     


정치를 한답시고 ‘정치꾼은 모든 이들의 의견을 담아내야 한다’는 그럴싸한 사이비(似而非) 성 행태를 보이는 협잡꾼들의 논리는 언뜻 진리와 비슷한 듯 하지만 종국에는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그 의견이 갈리는 것은 서로 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꾸려지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만 5세로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낮추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보았던 그 추악한 이들의 민낯을 접하고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꼴사납기 그지없어 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보고만 있기 어려웠다.     

교육부 장관이자 부총리라는 직을 얼렁뚱땅 수행하겠다고 자리에 냉큼 앉았던 음주운전 경력을 가진 그 아줌마가 자신에게 쌓여만가는 비난 뉴스들을 일소하기 위해 참신하게 내밀었던 전략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의 쪽지가 발견되며 우리는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불같이 일어난 사회적인 반발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인지, 그 명령을 당연히(?) 기획하고 지시했을 대통령은 얼른 그녀를 손절해버리고 자신만 그 구렁텅이에서 나갔다.


나라의 살림을 총괄하는 국무총리라는 자는 그것을 처음 접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면서 무섭게 일갈했다는 카더라 일화를 슬쩍 언론에 흘렸다. 교육부 장관이자 부총리인 그녀가 게다가 교육부 관련으로는 제대로 된 경력조차 한 줄 가지고 있지 않던 행정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던 그녀가 독자적인 깜짝 퍼포먼스를 벌인 것도 아닌데 마치 처음 접했다는 듯이 그녀만의 돌발행동으로 만들어 버리고 손절하는 모습은 확실히 여러 정권에서 발탁되어 회전문 인사를 넙죽넙죽 받아오며 재산을 불린 국무총리답다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눈살을 찌푸리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만든 것은 이미 포기하고 있던 그런 정치꾼들의 못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해당 정책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이른바 여론이라고 하는 각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이었다. 유치원 원장들을 필두로 한 이들은 취학연령이 만 5세로 하향하게 되면 지금 자신들의 주요 돈줄이 되고 있는 아이들이 대거 공교육으로 편입되기 때문에 당장 자신들의 주머니가 줄어들 것이라며 확성기를 움켜쥐고 시위를 하겠다고 나댔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실제로 시뮬레이션이 되거나 장기적인 교육에 대한 논의는 고사하고 당장 자신들이 맡게 될 늘어나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불같이 들고일어나 말도 안 되는 졸속행정이라며 언성을 높여댔다. 그들이 번지르르하게 입에 담았던 대의명분은 교육의 질이 저하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그들이 수행하는 교육의 질이 얼마나 높은 지는 내 잘 알지 못하겠다만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정당성이라는 것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방점은 만 5세 아이들 중에서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서 뒤를 처리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수두룩한데 그 케어를 어떻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그 와중에 맞벌이로 일을 한답시고 아이의 양육에 당장 직면하게 될 두려움을 걱정한 무지한 젊은 부부들은, 유치원은 종일반에 아이를 맡겨놓을 수 있지만 공교육은 그러기 어렵게 될 것이니 반대한다며 상세히 알아보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우르르 몰려 키보드와 핸드폰에 강성 댓글들을 쏟아냈다.

이것이 당신들이 결정적인 이익 앞에서 보이는 민낯이다. 정치꾼들이야 대놓고 그리 사니 그렇다 치자. 그들을 욕하는 당신들이 정말로 무엇이 옳은지 몰라 행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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