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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6. 2022

당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썩소를 드러내는 이들에게,

子曰: “君子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小人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섬기기는 쉽고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道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고,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그릇에 맞게 한다. 小人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비록 道로써 하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림에 있어서는 완비하기를 요구한다.”

이 장에서는 군자와 그릇(器)에 대한 비유가 ‘위정(爲政) 편’ 12장(君子不器)에 이어 다시 한번 등장한다. 공부한 지 꽤 지나버려 가물가물하다고 여기는 학도들도 없지는 않겠으나 워낙 유명한 내용이었으니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한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이 장의 확장된 논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겠다. 핵심적인 개념만을 살펴보면, ‘군자는 두루두루 모두 통해야 하는 법이니, 그릇처럼 한 가지 용도에만 맞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계한 가르침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 위정(爲政) 편‘에서 언급했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내용에 등장하는 ‘그릇’과 본장에서 언급된 ‘그릇’의 의미는 같으면서도 같은 각도에서 활용된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릇의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릇이 가진 의미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 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군자불기(君子不器)’에서 의미하는 그릇은, 한 가지 용도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릇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용도로 규정된 특징을 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그릇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자의 해설을 통해 접근해보기로 하자.


‘器之(기지)’는 그의 재주와 그릇에 따라 부림을 이른다. 군자의 마음은 공정하고 恕(서)하며, 소인의 마음은 사사롭고 각박하니, 천리와 인욕의 사이에 매양 서로 반대될 뿐이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장에서 그릇이란, 한정된 의미가 아닌 그 용도에 맞는 그릇으로서의 소용에 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군자불기(君子不器)’에서 말하는 그릇이나 이 장에서 말하는 그릇의 개념은 당시에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그릇은 하나의 용도로만 정해져 있어 그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는 특성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회적 의미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앞에서 공부했던 ‘공야장(公冶長) 편’ 3장에서도 그릇의 비유는 등장한다. 공자가 자공(子貢)을 그릇에 비유하자 자공이 자신이 어떤 그릇에 해당하느냐고 묻고, 이에 공자가 자공을 ‘호련(瑚璉)’이라고 비유적 설명을 해주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 정의와 공감을 증명해준다.


중요한 것은 앞서 ‘위정(爲政) 편’에서는, 군자라면 그렇게 하나의 용도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본장에서는 그러한 일반 사람들에 대한 자질을 그릇이라고 비유했을 때 그 그릇을 적재적소에 맞춰 사람들을 재능과 상황에 맞게 쓸 수 있는 안목과 자질을 갖춰야만 한다는 가르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른바 사람을 등용하여 임명하고 일을 맡기는 것, 용인(用人), 인사(人事)라는 말로 언제나 위정자들의 반드시 수양해야 할 덕목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 사실 대단한 덕목인 것처럼 기본 중의 기본으로 강조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실상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을 그저 능력으로 발탁하고 그에 맞게 등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 사람을 쓰는 것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지 눈치챈 학도가 있길 바란다. 본장의 원문은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되, 군자의 용인(用人) 능력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군자가 섬기기는 쉽지만 기쁘게 하기가 어렵다는 설명으로 시작하였다. 소인은 반대로 섬기기는 어렵지만 기쁘게 하기는 쉽다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기쁘게 한다는 것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수 있겠으나 섬기는 것이 쉽고 어렵다는 것은 어떻게 해설하고 이해할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한 해답 역시 공자는 원문에 제시하고 있다. 바로 군자를 기쁘게 하기 어려운 이유로 군자가 도(道)가 아니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실마리를 전면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인사권을 가진 상사를 기쁘게 만들 생각에 비위를 맞춘다. 그것이 앞에서 공부했던 부화뇌동(附和雷同)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자신의 능력을 갖추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등용해준 상사의 안목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군자를 섬기는 방식이다. 이 장에서 말하는 ‘섬긴다’는 말의 의미를 비유된 그릇을 활용하여 설명하자면, ‘그릇의 용도에 맞게 최상의 용도를 발휘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섬긴다는 개념과 기쁘게 한다는 개념이 함께 나왔는가?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릇의 용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섬긴다는 본연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부족한 능력과 상관없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기 위해 벌이는 부차적인 행위들을 의미한다. 아부하고, 뇌물을 바치고, 쓸데없는 부분까지 간과 쓸개를 모두 내놓고 과잉충성을 한다고 해서 그가 능력이 없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것을 벌충할 수 없어야 상식에 맞는 것이다. 상사가 군자일 때는 그 상식이 들어맞는다.


하지만, 소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일을 잘한다’는 개념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탁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이가 일을 잘하는 자이다. 자신을 위해 뇌물이라는 의미의 선물을 가지고 오고, 밥을 사고, 술을 사고 금품과 향응을 제공하며 굽신거리며 자신이 잘못한 부분까지도 훌륭하다며 입에 발린 아부를 하는 이가 일을 잘하는 것이라 스스럼없이 외친다. 


소인을 섬기는 것이 어렵다고 한 것은 소인이라서가 아니라 앞서 설명한 ‘섬긴다’라는 본연의 의무를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소인이 상사일 경우에는 그를 기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고, 더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본장에서 나온 군자와 소인, 그리고 그릇에 대한 비유는 현대의 기준과 비교할 때 아주 큰 기본 전제에서의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사권자가 위정자라는 점이다. 물론 현대에도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인사권을 가지고 직접 사람을 임명하기도 하지만, 공자의 시대에는 인사권이 위정자의 정치 행위에서 아주 주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장에서는 인사권자인 위정자가 섬김을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그 사람을 제대로 쓰는 안목과 자질을 갖춰야만 하다는 순환론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인사권자에게 발탁되어 등용된 사람이 섬김을 제대로 하는가에 대한 부분마저도 인사권자의 책임에 해당한다는 순환구조로 이어져 있다. 다시 말해, 그 자리에 부합하지 않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가 등용되거나 그가 잘못을 하는 것마저도 그를 등용하여 그 자리에 놓은 위정자의 잘못일 수 있다는 설명이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순환되어 제대로 군자인 위정자에게 발탁된 인물은 이미 그 능력과 자질에 대해 검증받아 적재적소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섬김을 다하는 지극히 단순한(?)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때문에 능력과 자질을 갖춘 군자다운 인사권자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자신이 발탁하여 등용한 이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라 뽑았기에 그의 쓰임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과 대화를 나눈 모든 이들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그의 눈높이에 맞춘 대화를 구현했던 공자이기에 더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가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점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점을 보완해줘야 하는지, 혹은 어떤 점을 더 부각해줘야 하는지 분석이 끝난 군자로서의 인사권자는 그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맞는 자리에 그를 앉히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면 그만인 것이라는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소인은 어떠한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쓰임새는 분석을 해본 적조차 없고 그저 그와 술을 몇 번 마셔보았거나 그가 아부하며 자신에게 헤헤거리는 것만을 보고 그 자리에 앉혔기에 무조건 완벽하기를 요구한다. 그가 무엇을 잘하는지 원래부터 뭘 못하는지조차 분석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그것도 못하냐?’라는 잔소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선뜻 나서 솔선수범을 보이거나 일을 가르칠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 또한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런 소인을 섬기는 것이란 소인 자체도 엉망인데, 그가 뽑은 자역시 엉망인 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이 뽑지 않은 직원들이나 아랫사람을 대하는 큰 조직에 속하는 이들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군자는 고사하고 소인만 드글거리는 공무원을 비롯해 대기업 조직을 보라. 그들은 아주 쉽게 ‘어떻게 저런 사람을 뽑았지?’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이 인사권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사수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공무든 기업 업무든 상사를 통해 일을 배우는 것은 도제 방식의 그 옛날부터 있어왔던 방식이다. 처음부터 그 사람의 본질을 꿰뚫고 그의 그릇에 맞는 자리에 채용하고 배치하는 것이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도 아주 적확하게 적용되고 어느 한 마디 틀린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본장의 가르침이 단순히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고서 선발하고 등용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당신은 당신의 부하직원이 무엇을 하면 기쁜가?

공자는 바로 이 질문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던지고 있다. 이 장의 군자와 소인이 기뻐하는 바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군자는 도가 아니고서는 기뻐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그 근거를 제시하지만 소인을 설명하면서는 도가 아닌 것으로 기쁘게 하더라도 기뻐한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서술하며, 구체적인 원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을 사리사욕이라고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하지 않은 이유는 짐작컨대 크게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사리사욕이라고 말하면 그것 하나만을 국한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설명이 부족하다 여겼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바는 옳지 않은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이기에 도(道)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더 강하게 강조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 장에서 강조한 군자로서 덕목을 갖춘 지도자를 상사로 둔 이들을 섬기기 너무 쉽고 모시고 일하기 너무 쉽다고 말하는 이들은 군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순환론적 구조에 의하면 군자로서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소인을 잘못 보고 그 자리에 앉혔을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인이 우연히 군자의 자질을 갖춘 이를 출중한 능력을 보고서 선발할 수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섬기는 것보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에 치중한 지도자라면 오히려 군자로서의 그릇을 갖춘 이를 부릴 자질이 부족하여 언밸런스를 일으키고 말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시끄럽고 그의 민낯부터 영혼까지 탈탈 턴다는 인사청문회를 보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사람을 저 자리에 추천했으며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영혼이 탈탈 털리고 소위 ‘쪽이 팔릴 것’을 알면서까지 저 자리에 왜 나왔는가 싶을 정도로 의아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카메라에 담겨 전 국민에게 방송되고 회자되었다.

인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모두 그러하지만 내가 수십 년간 속해 있던 상아탑이라는 조직을 보게 되면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상아탑이 왜 대표적인 복마전으로 불리는지 그 인사과정을 보고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자조적 농담이 하나 있다. ‘어느 전공이고 그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자는 서울대에 있지 않다.’ 학계에 있는 이들이 씁쓸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이 말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찬찬히 곱씹어 보길 바란다.


대개 어떤 자리가 나고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힐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면 정작 그 자리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춘 최상의 후보자를 찾는 일은 언제나 후순위로 몰린다. 상아탑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그 학과의 교수들의 목소리가 강요된다. 경성제대에서는 심한 경우 정년퇴직을 하고 나가는 교수가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 영향력을 주기까지 하는 전횡이 당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실상 회사나 공무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목소리가 인사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직속상관이 되는 이의 가장 큰 요건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이다. 

이익이 돈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비리를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하며 함께 덮고 함께 공범이 되어줄 자,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토 달지 않고 그저 따라줄 자,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을 자 등이 그들이 가장 먼저 꼽는 조건이다. 당신은 그들과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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