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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9. 2022

군자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태연하게 지낼 뿐이다.

태연한 것과 겸손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子曰: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태연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小人은 교만하고 태연하지 못하다.”     

이 장에서는 다시 군자와 소인을 등장시켜 비교설명을 하되 그 차이를 태연(泰然)과 교만(驕慢)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설명하고 있다. 태연과 교만이 상대적인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두 개념을 하나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주의해서 새겨야 하는 부분은 두 가지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먼저 주자는 이 장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군자는 천리(天理)를 따르므로 편안하고 펴지면서도 자랑하거나 放肆(방사) 하지 않고, 소인은 人欲(인욕)을 부리므로 이와 반대인 것이다.     


주자는 원문에서 빠져 있는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서 풀이하는 것으로 이 장의 해설을 대신하였다. 무엇을 근거로 군자는 태연할 수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는지, 반대로 소인은 왜 교만하면서 태연하지는 못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전부터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가 나올 때마다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던 부분이 있다. 대부분 <논어>를 공부하면서 군자와 소인이 나오게 되면 초심자들이 범하는 실수가 있다. 군자를 위정자로 보고 소인을 백성이나 그 아랫사람으로 구별하여 지레 단정하는 것인데, 그런 방식의 획일화된 이해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위정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즉, 위정자의 입장에서 군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자와 위정자이면서도 소인배로밖에 평가받지 못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을 모두 지칭한 것이다. 특히 군자는 이미 군자다움을 이룬 사람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소인처럼 구는 것에 대해 지적하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로 군자로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권계에 다음 아닌 내용으로 활용하고 있기에 결코 신분의 차이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왜 내가 태연(泰然)과 교만(驕慢)의 개념 설명을 바로 들어가지 않고 군자와 소인에 대한 공자의 범위 설정을 다시 한번 환기했는지 눈치챈 학도들이 있기를 바란다. 군자와 소인을 비교할 때 소인에 대한 부분은 보면, 단순히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극대화했다고 보기보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 중에서도 경계해야 할 부분을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본능적인 부족한 점이 소인의 면모로 설명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교만은 인간적인 본능을 부족한 면이라고 지적하며 등장한 부분이라면 태연(泰然)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위에서 주자의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자면 태연(泰然)은 ‘편안하고 펴져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교만(驕慢)과 함께 사용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태연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 교만은 ‘의도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하고 뽐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태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우위를 인식할 필요도 없이 그저 편안하게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래 이 장에서의 두 개념에 대한 언급은 <논어>의 가장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요왈(堯曰) 편’의 마지막 장에서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정치를 하는 군자가 갖춰야 할 덕성으로 ‘五美(다섯 가지 美德)’를 설명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五美(다섯 가지 美德’)란, ‘혜택을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 일하게 하되 원망을 사지 않으며, 바라되 욕심부리지 않고, 여유 있되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스럽되 사납지 않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네 번째 언급된 내용이 바로 본장에서의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삽입한 것이다. 본장에서는 정치를 담당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군자로서의 태도와 덕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지만, 결국 위정자에 대한 범주가 유효하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할 수 있겠다.     


태연(泰然)에서 泰는 편안하면서 느긋한 태도를 말한다. 주자의 해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천리(天理)에 따르기 때문에 편안하며, 바깥의 명예나 이익을 좇지 않고 內實(내실)을 다져 느긋한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결국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표현방식이나 비유에 따라 다양해졌을 뿐 기본은 천리(天理)와 도(道)에 따라 사는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기준으로 요약정리된다.      


驕慢(교만)으로 해석된, 驕가 가진 본연의 고문에서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사로운 욕심을 지닌 자가 어쩌다 사정이 좋아졌다고 해서 멋대로 구는 것을 말한다. 실제 자신이 갖추고 있는 내실이랄 것이 터무니없이 비어있기에 바깥으로 그저 허세를 부림을 말한다.      


그래서 이 의미를 모두 이해하고 있던 다산(茶山;정약용)이 본장에 대해 해설하면서, 泰는 切磋琢磨(절차탁마)의 공부가 있지만 驕는 그런 공부가 없는 것이라고 가장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 부연하였다. 小人은 謙遜(겸손)과 順從(순종)의 덕이 없어 輕薄(경박)하고 暴慢(포만) 하기 쉽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가 자주 나온 김에 조금 더 부연하자면, 군자와 소인을 규정하는 것이 누구인가를 가지고서도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군자는 결코 자신이 자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소인이라고 자신을 자인하는 자가 있지는 않겠지만 스스럼없이 자신을 군자라고 참칭하는 정치꾼들이나 사이비 학자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보게 된다.      

소인은 물론이거니와 군자라고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 공부한 바와 같이 사람들의 평가가 늘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 아니, 혹여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이슈를 만들거나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쾌감을 얻는 키보드 워리어들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정치꾼들의 협작이나 그와 비슷한 시기와 질시와 공작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자들에게 공격당하거나 모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참람되이 군자를 참칭하며 상대적으로 자신이 아닌 이들을 소인이라 규정하고 입을 놀리는 자가 군자인 경우는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감정상태 이외에는 없다. 예컨대, ‘행복’이라는 개념이 지극히 상대적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인 행복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가 행복한지를 결정한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군자’라는 경지는, 절대적인 수치가 정해질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인 덕목이 조건으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는 경지이기에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인정을 기본으로 한다. ‘기본으로 한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이 인기투표나 지금 민주주의의 투표방식이 가지고 있는 단점과 마찬가지로 연기를 잘하고 돈을 잘 뿌려서 사람들을 잘 속이는 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개념과는 차별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참람되이 군자를 참칭하는 것은 안된다고 했지만, 늘 강조했다시피 자신이 군자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장 먼저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는 바로 자신이다. 하늘이 알고 자신이 알고 그를 보고 관계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 그 사실에 근거하여 그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를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군자’라고 인정받은 이들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늘 부족하다 느끼고 자신을 가다듬는 수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것을 겸손이라고 해석하고 끌고 가는 어설픈 곡학아세(曲學阿世)식의 글이 현대 <논어> 해설서에 널린 것을 잘 안다. 그런데 그것은 겸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다. 겸손이라는 개념은 스스로가 이미 그 위치에 올라있다는 사실관계를 알고 있거나 인지한 상태에서 그것을 자임하는 것이 아닌 태도의 방식이다. 그런데 군자의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군자에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군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는 수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케이블 TV에 전문가랍시고 등장하는 각종 분야의 허접한 사이비 신종 딴따라들을 보게 된다. 전직 국회의원부터 판검사 출신 변호사부터 경찰 출신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발에 채일정도로 많은 변호사, 그리고 정말로 자랑스러워서 그런 타이틀을 쓴 것인지 청와대에 들어갔던 경력을 쓰는 백수들에 이르기까지 뭐 특정 전공의 전문가도 아닌 교수들은 이미 박스로 꽉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멘트를 듣고 그들의 언행을 보고, 특히나 방송에 더 나오지 못해서 안달인 것처럼 이 방송 저 방송에 기웃거리는 것이 심해진 이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과연 전문가일까 라는 의구심은 이제 갖는 사람들도 없는 듯하다.     

이미 그들은 그저 공개방송에서 방청객석에 앉아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는 하루 알바 아줌마들과 위치만 다른 곳에 앉아 있을 뿐, 자신이 간택되기를 바라는 당파(?)를 지지하거나 변호하는 준비된 원고를 읽거나 뻔한 약수터 할아버지들의 카더라 통신에 해당하는 얄팍한 의견을 늘어놓는 방송인일 뿐,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고는 도저히 봐주기 어렵기 때문임을 그 자신만 모르고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든 무예든 학문이든 모든 것은 하나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배우지 않고 하나도 할 줄 모르는 단계에서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되면 자신이 그렇게 우러러봤던 하나만 아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자만을 갖게 된다. 자신이 그것 하나를 몰랐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를 알게 된 것만으로 자만한다.      


그렇기에 실제로 자만은 품성의 문제이기 이전에 앎의 문제이다.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되고, 더 넓고 높은 세계가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일천한 것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자는 겸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존재를 모르는 강아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하고 당당히 짖어댈 것이다. 바둑 아마 5단이 프로 9단과 정선으로 바둑을 두면서 겸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일천한 것인지를 ‘아는 것’에서 그 기본은 시작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는 교만은 고사하고 감히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 수 있는 허세 따위를 부릴 만용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권 찌르기와 발차기를 시작한 자가 검은 띠의 높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운동을 좀 한다며 어디 가서 주먹자랑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앎이 얼마나 얕고 기초적인 수준인가를 아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늘 일관된 가르침을 통해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임과 동시에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해당되는가를 파악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상대적인 전체 세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조금이나마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 순간부터 교만(驕慢)은 고사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정상이라면, 그 배움의 경지가 차츰 위로 올라가고 지평이 확장될수록 배움과 앎의 세계가 얼마나 높고 거대한지, 그리고 나보다 더 배우고 익혀 높은 경지에 오른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인지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과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하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장에서 말하는 태연(泰然)과 교만(驕慢)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태연(泰然)이라는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사리사욕이 동력이 아닌, 도(道)만으로 기쁠 수 있는 원칙이 쌓여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허세를 부리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하는 교만(驕慢)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저 자신이 가장 편한 바대로 행하고 말하는 것이 이미 그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군자의 태연함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임을 눈치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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