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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0. 2022

부족한 성향과 자질도 수양을 통해 바꿀 수 있다.

정말로 그렇게 반성하고 바꿔나갈 의미만 있다면 말이다.

子曰: “剛毅木訥, 近仁.”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함이 仁에 가깝다.”     

이 장에서는 인(仁)에 근접한 개념을 설명하면서 무려 4개의 생소한 개념어를 가지고 왔다. 그 네 가지 자질을 갖춘 이가 인(仁)에 가까운 사람이라 설명한 것이 전부이다.


네 가지 생소한 개념에 대해 이해하기 전에 공자식의 대조 설명으로 이 장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반대의 대척 개념을 먼저 상기하기로 한다.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학이(學而) 편’ 3장과 뒤에 공부할 ‘양화(陽貨) 편’ 17장에 모두 언급되는 저 유명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바로 이 장의 네 가지 개념의 대척 개념이다.      


정자(伊川(이천))는 네 가지 개념 중에서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부연하여 공부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木(목)’은 질박함이요 ‘訥(눌)’은 더디고 둔함이니, 네 가지는 자질이 仁(인)에 가까운 것이다.”     

이 장의 네 가지 개념이나 그 자질이 네 가지이지만 앞의 두 가지가 비슷하고 뒤의 두 가지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앞서 대척 개념으로 언급했던 교언영색(巧言令色)의 구조와 대조해서 살펴보면 더욱 문법적으로는 그 설명이 설득력이 강하겠다.    

 

무엇보다 번역한 것이 강하다는 것과 굳세다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고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굳이 한자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주자면, 剛은 ‘의지가 강해 물욕에 휘둘리지 않는 것’, 毅는 ‘기(氣)가 강하고 과단성이 있는 모습’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두 성향의 공통점이자 같은 지향점은 자신이 수양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위배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위 주석은 뒤의 두 개념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의미가 아닌 해설하고 있는 ‘질박하고 어눌한’ 성향과 기질을 의미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줌으로써 앞의 두 글자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카테고리에 엮을 수 있음을 완곡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 행간의 의미를 이미 파악한 양씨(楊時(양시))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 성향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의 기질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공자의 의도를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강하고 굳세면 物慾(물욕)에 굽히지 않고, 질박하고 어눌하면 外物(외물)에 치닫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이 주석을 통해 두 가지 생각할 거리를 마주치게 된다. 

첫 번째는 원문의 의미에서 명확하게 언급했다시피, 네 가지 성향이 인(仁)에 ‘가깝다(近)’는 것이지 인(仁)의 자질이라고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주 큰 차이를 보이는 설명이니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는 네 가지 개념 중에서 뒤의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이다.

강하고 굳센 것이 무엇에 대해 그러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힌 것이 물욕(物慾), 즉, 소인이 삶의 지향점이나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이다. 앞의 설명은 금방 확 와닿는데, 뒤의 ‘질박하고 어눌한 것’이 외물에 치닫지 않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조금만 주변으로 눈을 돌려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면 그 의구심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사리사욕까지 간파하고 파악하기 이전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희망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혹은 세상에 알리지 못해서 계속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의 성향을 생각해보라. 그가 어눌하거나 질박한 사람이던가? 물론 시대가 바뀌어서 자신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파는 마케팅 기술이 부족하면 그저 사장되기 마련이라고 항변하는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런 일에 익숙한 사람은 진중하게 개발이나 발명이나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은 아닌 경우가 많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혐오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번에 걸쳐 <논어>에 등장하면서까지 언급했던 공자의 성향을 분석하며 이 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공자가 얼마나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는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굳이 같은 표현이 아닐지라도 말만 잘하는 이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인 인식과 언급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 아닌 비밀이다.     

공자가 경험했던 그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을 살펴본다면 그가 보인 그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감정과 그것이 바로 그가 그렇게 강조했던 인(仁)의 자질에 반대 지점에 있는 자들의 성향이라는 설명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대개 자신이 묵묵히 수양하고 공부하고 자신의 경지를 고양시키고자 하는 이는 함부로 자신이 무엇을 갖추고 있다고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 내용에 대해서 공부한 바 있다.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어 겸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천외천(天外天)의 경지를 이미 파악하고 있기에 함부로 자신이 이른 경지가 충분히 높다거나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성인이라고까지 세상에 존숭을 받았던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만났던 위정자나 그 곁에서 그들을 보필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능력을 자부하였고, 자신들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라 여겼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이가 있을 수 없다고 교만했으며, 그 곁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서는 그 위정자의 눈에 들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워나가기 위해 교언영색(巧言令色)하며 자신의 기준이나 생각은 아무 상관없이 비위를 맞추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였다. 그들이 하나같이 수준 낮은 반복되는 뻔한 말과 깊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껍데기만 더듬는 말로 정치를 논하고 근엄한 척하는 것을 보면서 공자는 염증 이상의 염세(厭世)와 환멸(幻滅)에 해당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들과 종자들은, 공자의 시대도 그러하지만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현재에도 그런 일은 더욱 명확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실제로 특정 기술을 개발하거나 발명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고 소위 매스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스타성을 발휘하는 자들은 속 빈 강정이거나 최소한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아님은 분명한 경우를 아주 쉽게 확인하곤 한다.     

내가 반평생 목도하고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학계를 예로 들자면, ‘학자(學者)’라고 하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대학교수의 부류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 수많은 대학의 그 수많은 대학 교수 중에서도 정말로 다양한 부류가 있다. 자기 분야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탁월한 연구성과를 학계에 발표하는 것으로 학자로서의 두각을 드러내는 교수도 있고, 연구나 지식적인 부분은 분명히 허접하기 그지없음에도 탁월한 퍼포먼스와 말재주로 청중을 휘어잡는 연기로 강의를 잘한다고 인정받는 교수도 있다. 


조금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자신의 연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센스를 가지고 학계에 새로 나온 연구자료들이나 해외의 연구 성과들을 가장 먼저 정리하고 짜깁기하여 자신의 것처럼 포장해서 주목을 받아 매번 방송에 등장하여 자신의 교수 생명을 연명하는 자도 있고, 인맥이라는 이름의 네트워크를 통해 기업에 기웃거리며 연구비를 잘 땡겨오는(?) 것으로 주변의 인정을 받는 자도 있으며, 밤마다 저녁 약속과 술자리가 두 달간 꽉 차있는 로비와 아첨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해나가는 자들도 있다.     


공자가 <논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하는 이들에 대해 전체적인 혐오 어린 비판을 던지는 대신, 그런 자들치고 어진 경우는 ‘드물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장에서 네 가지 자질과 성향이 인(仁)을 향해 있지만 바로 그것에 닿아있는 것이 아닌 그저 ‘가깝다’라는 표현을 쓴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양 극단에 그런 유보적 표현으로 여지를 둔 것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보이지만 진정성을 가진 이를 모두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현실적인 배려와 아울러 이 장의 네 가지 자질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仁)으로 가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인(仁)에 대한 개념을 단정하는 정의를 <논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공자에게 있어 인(仁)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모든 면을 갖춰야만 하는 완성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이 장을 통해 교언영색(巧言令色)을 경계하며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가장 큰 것이 표현, 즉 언행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언행이 곧 그를 표현하는 유일한 가시적인 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모두 그를 평가할 수 없다는 것, 특히 의도적이고 가식적인 언행은 특히 그러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이 장의 ‘강의목눌(剛毅木訥)’을 ‘어떠한 어려움에도 강인하고 의연하게 정진하는 자세’로 원용하는 이들의 강연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이상의 기관장급의 인물들이 그런 동일한 의미로 인용한 것을 보면, 이 장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아마도 현대 해설서의 풀이를 적당히 읽고 외운 사이비(似而非)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미 앞에서 공부하고 풀이한 바와 같이, 이것은 어려움을 대처하는 삶의 의연한 자세와는 거리가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의 자세 따위가 아니라 평상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평상심에 해당하는 자질과 성향을 말하는 것으로, 위기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질이나 성향이 아니라는 말이다. 잘 아는 말도 내가 사용하는 상황과 의미가 부합하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자리에 강연이나 연설을 하면서 이런 어이없는 인용을 하고 뿌듯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 뭘 모르고 그저 상사의 강연이니까 박수를 치는 이들은 교언영색(巧言令色)하며 부합해줄지 몰라도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사람이 그에 대해서 갖는 첫인상이나 그의 수준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그는 이미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맞지 않게 떠들어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딱 그 수준의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고전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바로 앞에서 공부했던 태연(泰然)과 교만(驕慢)의 차이를 공부하면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이었지만,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강의목눌(剛毅木訥)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게 다르고 설명을 할 때나 들을 때는 누구나 알 것 같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에서는 그 접점의 회색지대가 아주 넓고 짙은 것인지 사람들이 그것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교만(驕慢)과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논어>를 공부하면서는 그 구별이 명확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사회에서는, 교만(驕慢)하고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이들이 득세하고 세상을 슬기롭게 산다는 말을 들으며 소위 훨씬 잘 나가기 때문이다.     


논문이나 저서를 보면 논리나 연구자료를 분석하는 논리가 탁월한 센스와 상당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정작 세미나나 포럼, 혹은 그가 특강 하는 자리가 있어 부러 찾아갔다가 허접하기 그지없는 강연 모습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간파할 정도의 안목을 가지지 않은 일반인들이나 학생들은 그저 그의 유명세에 휩쓸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그가 순서가 끝나고 나면 썰물 빠지듯 다음 순서의 강연자가 무안할 정도로 모두가 빠져나가버렸다. 실제로 학술적인 성취도가 그다음 강연자가 훨씬 더 훌륭한 내공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 세상은 그렇다는 것은 당신이 학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자가 한 지역구의 국회의원을 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볼썽사나운 짓을 보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놓고 뇌물을 먹고 자기 식구들 이름으로 땅을 사고 재산을 불리다가 그 사실이 너무 공공연한 사실이 될 즈음에 구속되어 감옥으로 들어가는 자들부터, 국정감사기간에 핸드폰으로 버젓이 게임을 하고 본회의장에서 핸드폰으로 난삽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기자의 카메라에 걸린 이들에 이르기까지 과연 그들이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의원님’ 소리를 들으며 여의도에 기생해도 될지 의문인 자들은 너무도 많다. 

국회뿐인가? 하위 공직자부터 이 나라의 통수권자라는 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리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들보다 부족한 자들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그 부족함을 반성하고 채워나가는 노력을 하려는 의지가 그들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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