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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1. 2022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의 시작은 당신에게서부터이다.

사람과의 사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子路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     
子路가 “어떠하여야 선비라 이를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간절하고 자상하게 勸勉하며 和樂하면 선비라 이를 수 있으니, 朋友간에는 간절하고자 상하게 권면하며 兄弟간에는 和樂하여야 한다.”     

이 장의 질문은 앞서 공부했던 본편의 20장에서 자공(子貢)이 했던 선비의 자질을 묻는 질문과 내용이 같다. 물론 원문에 나와 있다시피 질문자가 자로(子路)로 바뀌었고 상황이 다르기에 당연히 공자의 답변은 자로의 눈높이에 맞춰 달라졌다. 고문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사리 해독(?) 하기 쉽지 않은 형용사나 부사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단어들이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의미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이 미묘한 묘사들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배우는 이들을 위해 호씨(胡寅(호인))가 그 뜻을 해설함과 동시에 왜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그런 설명을 덧붙였는지에 대해서까지 다음과 같은 상세한 해설을 부연한다.     


“‘切切(절절)’은 간곡하고 지극함이요 ‘偲偲(시시)’는 자상하게 권면함이요 ‘怡怡(이이)’는 和悅(화열)함이니, 모두 자로에게 부족한 바이다. 그러므로 말씀해 주셨고, 또 이를 실행함에 혼동하면 형제간에는 은혜를 해치는 화가 있고 붕우 간에는 유순하기를 잘하는 손해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그러므로 또 구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위 주석에서는 切切과 偲偲를 분리해서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붙여 ‘절절시시(切切偲偲)’에 대한 옛 주석에 의하면, ‘상절책지모(相切責之貌;서로 박하게 꾸짖는 모습)’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무런 사심 없이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비난이 아닌 말 그대로 잘못에 대해 스스럼없이 지적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 설명한다. 한편 옛 주석에 의하면 ‘이이(怡怡)’는 ‘화순지모(和順之貌;순순하게 和樂하는 모습)’라고 하여 위 주석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마치 친구에게는 좀 더 객관적인 비판을 격의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형제간에는 화목하게 하라는 식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공자의 어법을 아직도 익숙하게 읽어내는 훈련이 부족하거나 기본적인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범하는 실수이다.     


기본으로 돌아가 찬찬히 살펴보자. 위 호씨의 주석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의 대답이자 가르침은 제자 자로(子路)에 대한 눈높이 맞춤 방식으로 안배된 것이다. 공자가 선비가 갖춰야 할 자질에 대한 자연스러운 융화를 언급하면서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고 그것을 붕우와 형제간으로 나눈 것은, 자로(子路)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강조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기반으로 하자면, 붕우에게 함부로 조언하거나 너무 직언하여 서로 소원하게 된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질에 대한 것을 강조한 것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격의 없이 지적하여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붕우의 특성은 남이기에 서로 소원해지게 되면 안 보면 그만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불편해지거나 불편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봐야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형제는 다르다. 특히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한 경우는, 유학에서 지극히 강조하는 효도라는 덕목을 훼손하는 아주 큰 결격사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은 강조하기 위해 공자는 화목해야 한다는 덕목의 예로 형제간을 든 것이다. 참고로 고문에서 형제는 현대에서 의미가 축소된, 같은 부모를 둔 형제만이 아니라 부모의 상에 喪服(상복)을 입는 모든 同族을 가리킨다.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고루 화목하게 융화되어 지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춘 것이 선비의 덕목임은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군자의 덕목을 설명한 것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자로의 질문을 통해 선비의 자질이라고는 말했지만, 군자이든 선비이든 배우는 자가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임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바로 전 장에서 언급한 인(仁)을 완성하는 것이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이러한 의미를 파악하고 ‘절절시시(切切偲偲)’를, ‘상절책지모(相切責之貌;서로 질박하게 꾸짖는 모습)’라는 부분을 중시한 다산(茶山;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뼈에 침을 놓듯이 벗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경계하고 칼로 눈을 깎듯이 벗의 잘못과 죄를 경계해야 하거늘, 설령 벗에게 넉넉한 재주와 큰 덕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무엇 때문에 벗을 칭찬 하겠습니까? 더구나 시류의 습속에 빠진 사람을 과찬하면 이는 그를 남의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것은 사실 친구에게만 한정된 말은 아니지만 친구에 대한 개념이 형제와 비견될 정도로 배우는 자로서 그리고 수양하는 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무겁고 진중하게 여기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옛사람들이 사람을 사귐에 있어 어떤 마음가짐이었는가는 지금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과의 사귐은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친구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자, 자신이 노력해왔던 배움에 대한 실천이 가장 근접한 형태로 구현되는 인간관계에 다름 아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마치 본장의 가르침은 고리타분한 유학의 가르침이 그저 반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뒤에 실생활에서의 실천을 통한 이해를 돕기 위해 언급한 친구나 형제간으로 나누기 전에 대승적인 차원에서 언급했던 선비의 자질이라고 하는 부분만을 다시 곱씹어 읽어보라.       


자신을 수양하고 배움을 지속하는 것과 별개로,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 간절하게 책선(責善)하여 권장하는 일을 하는 것이나, 친절하고 상세히 일러주어 격려하는 일을 하는 것을 굳이 왜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바로잡기에도 부족한 시간과 정력에 심지어 다른 사람(물론 그것이 친구이고 형제라 할지라도)을 올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은 나를 다듬고 발전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와 공력, 그리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행위는 그나마 무난한 관계를 깨뜨려 갈등을 야기시킬 수 있는 여지가 매우 크다.     


그래서 공자는 바로 뒤이어 ‘怡怡’를 덧붙여 화목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공부했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천하는 군자 다움을 전제로 하여 올바름을 시행하는 수고로움은 반드시 실천하되, 그 목적이 반드시 천리(天理)에 따라 도(道)에 의거한 것이어야 함을 행간에 차곡히 쌓아 넣어둔 것이다.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자기 자신만 잘 살면 될 뿐이지 뭐하러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여 불협화음을 일으킬 여지를 만드냐는 것이다.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 목적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들의 말처럼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귐의 방식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자는 이 장을 포함하여 작게는 가족과 친지, 조금 더 나아가서는 뜻을 같이하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 즐거운 친구를 예로 들어, 자신이 가깝다고 여기는, 친하다고 여기는 이들과의 사귐에서부터 배움과 수양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짜고짜 인생 조언을 던지거나 그의 단점에 대해 지적하는 싸움꾼은 없다. 그거야말로 시비를 걸고 싸우자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까운 이들에게 정말로 충심을 담은 조언을 하고 그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행실을 보였을 때 정말로 그를 위해 충심이 담긴 조언을 따끔하게 던져 그를 바로잡는 사람들은 많이 있던가? 자신이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부하는 이들대로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굳이 그런 일을 왜 하냐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소인들은 소인대로 그런 일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거나 바보 같은 이들이 하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박씨려묘'

맞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보 중에서도 아주 상 바보였다.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 날보다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최근에는 문득문득 내 고단했던 삶과 일상에 힘겨움의 무게가 다소 버겁다고 느껴지곤 했다. 어느 하루 쉬운 날이 없었다. 물론 바르지 않은 것이나 잘못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나라도 그런 잘못들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만 한다고 느끼는 그 고질적인 천성이 한몫을 한 것도 맞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 배우기 시작하고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단계로 넘어서서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오면서 나의 천성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나도 편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진짜 바보는 아니다. 다만 나의 천성과 내 배움과 내 수양이 그저 조용히 넘어가고 눈을 질끈 감고 나만, 내 가족만, 우리만 괜찮으면 아무 문제없다는 식으로 사는 것에 대해 편하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런데, 그 과정은 내 배움과 수양이 부족했던 탓인지 ‘怡怡’까지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이든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든 특히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매진하는 소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행위들이 자신들이 배운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에 위배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 때 더욱 그 반작용과 부작용이 크게 일어난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정도의 귀여운 표현으로 덮을 정도의 완곡하고 감내할만한 반작용이 아니라 그들의 반응은 너무도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게 잘못인 걸 누가 몰라?’에서부터 ‘당신만 똑똑해서 지적하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당신만 독야청청하겠다는 거야 뭐야?’이거나 ‘이제까지 이렇게 해 먹고살았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감히 니가 뭔데 지적질이야?’ 따위가 그들이 보이는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당당한 반작용이었다.         

부작용은 당연히 내가 목소리를 내거나 지적한 부분이 개선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다른 매거진에 올린 유사 해결 사례들을 보며 대부분들의 브런치 사람들이 말하듯 ‘교수님이니까 그렇게 사이다 해결이라도 되었지 일반인들이라면 언감생심 그런 해결을 기대할 수나 있을까요?’ 아니다. 사실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해결한 문제들보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훨씬 더 많다.    


세상을 좀 먹는 존재들은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빌런처럼 슬쩍 보기만 하더라도 흉측하고 괴팍하며 악으로 가득한 이들이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이웃이고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이며 어쩌면 당신의 부모이고 형제이며 자식일지도 모른다. 뉴스 화면을 차고 나오는 괴팍한 짓을 벌인 자들이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빌런이 아닌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친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     

주말에 호숫가를 산책하던 함께 침대를 쓰시는 분이 내게 말했더랬다.     


“이렇게까지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줄 알았더라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이 옳은 것이니 반드시 하라고 응원하거나 지지하지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 그 모든 일에 대한 지지는 철회예요. 당신의 아이디처럼 칼을 뽑아 정말 그 후안무치한 악당들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정의가 구현된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이고 게다가 그게 반드시 바로잡히지도 않으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득 되는 일도 없는 것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구요.”     


가슴이 아렸다. 그녀의 말처럼 차라리 그럴 시간에 훨씬 더 수월한 방식으로 돈을 벌어 어마어마한 금액의 기부를 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사회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 따위는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바뀌고 내가 보고 직면한 문제들을 바꿔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다. 당신에게 그것이 그리도 힘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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