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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8. 2022

狂者는 고사하고 狷者조차 보이지 않는구나.

품은 뜻도 없고 실천조차 없는 가식이 가득한 이들에게.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中行(中道)의 선비를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狂者와 狷者를 취할 것이다. 狂者는 진취적이고 狷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     

이 장에서는 공자가 인재를 구분하는 방식에서 최상의 인재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中道의 선비를 언급한다. 하지만 그런 밸런스를 갖춘 인재를 얻기 어려우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이들 중에서도 어떤 인재를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狂者(광자)와 狷者(견자)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이 狂者와 狷者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논의된 바 있는데, 그 모든 의미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일단 이 장에서의 어떤 의미로 언급되었는지를 주자의 설명을 통해 접근해보기로 하자.     


‘行(행)’은 道(도)이다. ‘狂(광)’은 뜻이 지극히 높으나 행실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요, ‘狷(견)’은 지식이 미치지 못하나 지킴(지조와 행실)이 有餘(유여)한 것이다. 聖人(성인)은 본래 中道(중도)의 사람을 얻어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얻을 수 없었고, 한갓 謹厚(근후)한 사람을 얻는다면 반드시 스스로 분발하여 훌륭한 일을 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 광자와 견자를 얻어 가르치는 것만 못하니, 오히려 그 뜻과 절개를 인하여 격려하고 억제해서 도에 나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요, 끝내 여기에서 마칠 뿐임을 허여한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 공자가 狂者와 狷者에 대해 대표적인 특징으로 설명한 것은 바로 진취적인 점과 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 대조 방식의 설명이다. 주자의 해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狂者는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뜻은 지극히 높지만 행실이 걸러지지 못하여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성향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생각에 맞다고 생각하면 격식이나 다른 사람의 눈치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취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편, 狷者는 그 뜻이나 지식이 월등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행실을 삼가고 함부로 나서 일을 벌이지 않기 때문에 고지식하다고 일컬어지는 성향의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이 장에서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나서지 않고 ‘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공자가 완곡하게 표현을 한 것이다.      

주자가 주석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 등용되어야 할 사람이자 배우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바는 중도(中道)를 이룬 선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의 방점은 狂者와 狷者에 가 있다. 실제로 ‘중도(中道)를 이룬 선비’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것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의 미묘한 설명에서와 같이 狂者와 狷者가 더 노력하고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여 나아가게 된다면 더 높은 경지의 중도(中道)를 이룬 선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狂者와 狷者, 그 자체에 대해서 그 정도도 쓸만하다고 허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狂者와 狷者의 특성에 대해서 그 성향을 비교해놓은 한마디 말만 있을 뿐이지, 그들에 대해 허여(인정)하고 그들이 쓸 만하다고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나중에 <맹자(孟子)>를 공부하게 되면 狂者와 狷者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하고 상세하게 설명되는 부분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더 깊이 공부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장에 대해 맹자(孟子)가 주석을 덧붙여 부연 설명한 내용을 살펴보자.     


“공자께서 어찌 中道(중도)의 사람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셨겠는가마는 반드시 얻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다음의 인물을 생각하신 것이니, 琴張(금장, 琴牢(금뢰)) · 曾晳(증석) · 牧皮(목피)와 같은 자가 공자께서 말씀하신 狂者(광자)이다. 이들은 뜻이 커서 말하기를 ‘옛날 분들이여, 옛날 분들이여!’하고 말하지만 평소에 그 행실을 살펴보면 행실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자들이다. 광자를 또 얻을 수 없으면 不潔(불결)함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비를 얻어 가르치려고 하셨으니, 이것이 狷者(견자)이니 이는 또 그 다음이다.”     


본래 이 장의 원문에서는 狂者가 狷者보다 낫다는 설명이 없다. 그런데 맹자의 주석을 보면, 단계를 나누어 공자가 중도(中道)의 선비 다음으로 狂者를,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狷者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에서 맹자가 狂者에 대해 설명하며 정의 내린 ‘행실이 말을 가리지 못하는 자’라는 정의가 앞서 설명한 부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狂者나 狷者, 모두 중도(中道)를 이루지 못한 이들인데 왜 공자는 狷者보다 狂者를 우선시했을까? 내가 의문이라고 여긴 부분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장에서 두 개념을 비교한 것에 의거하면 狂者나 狷者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적인 차이는 고지식한 이는 과실이 적고, 진취적인 사람은 실수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狷者의 잘못은 편협한 데에 불과한 것이지만, 狂者의 과오는 반드시 방탕한 것에 이르러 세교(世敎)에 해가 될 여지가 더 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뒤에 공부할 ‘양화(陽貨) 편’에서 ‘요즘의 광자가 속이기만 한다(今之狂者 詐而已矣)’라고 개탄한 바까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의구심에 대한 의견은 내 의견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저서를 쓴 성대중의 의견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성대중역시 공자가 본래 이 장에서 지칭한 ‘광자(狂者)’라는 개념이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변질되었음을 공자의 발언을 통해 넌지시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맹자의 주석에서 구체적인 인물을 예시로 들었던 것처럼 본래 ‘광자(狂者)’라는 개념은 표현방식의 정제되지 못함이 있을 뿐 지식적인 면은 물론이고 지조에 있어서 자신의 뜻을 강하게 관철시키려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부족을 언급함에 있어 ‘인(仁) 한 것에는 이르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점을 의미한 것이기에 공자가 견자(狷者) 보다 우선으로 삼은 것이다.     

‘견(狷)’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정의 중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어 견자(狷者)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스로 지키는 바가 굳어 쉽사리 뜻을 굽히지 않으나,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것’


사실 따로 설명을 하면 인(仁)에 완성을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부족함이나 왜 중도(中道)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지만, 둘을 함께 놓고 보면, 그 둘의 부족함을 융화시키는 것이 곧 중도(中道)를 완성하는 것임을 쉽게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장의 행간에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다른 극단의 부분에서 어떻게 취하여 보완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도 함께 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어>를 인용하여 해설하며 언급하는 어떤 글에서 이 장에 언급된 ‘견자(狷者)’를 풀이하며 ‘의리와 도덕적 감정의 호불호가 뚜렷하며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견자(狷者)가 불의한 것, 싫은 것, 더러운 것, 도리에 어긋나거나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성향을 갖췄다며 뜬금없이 대의보다는 일신(一身)의 수신 보양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한 후, 도덕적인 면에서 광자(狂者) 보다 앞서다면서 도덕적 성향이 뚜렷하고 사람됨의 도리를 잘 알고 지키는 보수라 논리 비약을 완성시켰다.      

전에도 말했지만, 많은 인문학 고전을 인용하며 글이나 연설을 하는 자들이 줄기차게 인용하는 <논어>의 공자의 말씀 중에서 그들이 정말로 적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 한심스럽기 그지없을 때가 많다.      


오늘 설명한 바와 같이 狂者나 狷者는 상대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어떤 점으로 인해 공자가 狂者를 狷者보다 우선시했는지를 오늘 설명한 바와 같이 우열 개념 또한 아니다. 그런데 위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오독(誤讀)과 오역(誤譯)으로 알량한 자신의 지식선에서 이해를 단정 지으며  狂者보다 狷者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더 나은 듯 보인다는 참람한 해석까지 내놓았다.


그렇게 되면 공자는 도덕적인 면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상관없다고 狂者를 狷者보다 더 우선시하겠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그 의견을 그대로 받아 재차 삼차 강조했다는 말이 된다. 하물며 그렇기 때문에 견자(狷者)가 보수에 가깝다는 헛소리는 궤변의 차원을 넘어선다.     


자신이 품은 뜻만 광대하고 그 뜻을 행실이 따르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부족함이고 잘못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관철시키려고 행하고 일을 벌이고 노력하는 것은 그가 그저 기질이 다혈질이거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광자(狂者)의 노력이 부족하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견자(狷者)가 과감하게 실행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기준에 맞춰 빡빡하고 고지식하게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그 비판에 앞서 자기 자신이 일을 함부로 벌이거나 나서지 않는 것은 자신이 욕을 먹게 될까 봐 두려워서이거나 보신(保身)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정한 스스로의 기준이 엄격하고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보다 자신에게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에 고지식한 결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만 날을 세우는 것과는 한참 다른 것이니, 보수가 어쩌고 하는 위의 논리적 비약은 가져다 붙이더라도 한참을 잘못 가져다 붙인 셈이다.

공정과 상식이 자신만의 캐치프레이즈인 양 어퍼컷을 날리며 엉겁결에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나 그 곁에서 자신은 깡패와 마약쟁이들을 잡아 사회를 바로잡는 검사일뿐이라며 정의로운 척을 하며 연신 떠들어대는 법무부 장관이나 또 그 틈을 노리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이나 사과 없이 정치적인 탄압이네 압박이네 떠들며 정치적 분탕질로 온통 흙탕물을 만들어버리겠다는 파란당의 목소리만 큰 논리가 박약한 이들이나 어쩌면 하나같이 狂者는 고사하고 狷者의 기본마저도 갖추지 못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굳이 이 장에서도 이전 장에서와 같이 현재 정치하는 이들이 어떠한지에 대해 공자가 따로 코멘트를 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 장에서 놓치기 쉬운, 지극히 간단한 한자이지만 전체 문장에서 공자가 방점을 찍고 싶었던 그 글자는 ‘필(必;반드시)’이다. 굳이 중도(中道)를 이룬 최고 경지의 인재를 구할 수 없다면, 차선을 언급하면 될 뿐인데 왜 굳이 ‘반드시’라는 말을 넣었을까? 그 말을 듣고 다시 읽어보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많은 단계의 사람들이 있고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하는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狂者나 狷者라는 개념을 끌어와 언급하고자 했던 그 의도를 우리는 읽고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한다.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경우에도 신명이 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훌륭한 플레이를 보이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것이고, 지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심금을 울려 외국에서 열리는 큰 대회에서 여러 가지 열세의 조건을 극복하고 노력을 보이는 국가대표의 모습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응원은 본래 이기라고 하는 것이지만 무조건 상대편은 나쁜 놈이고 우리 편만 이기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에 불과하다. 최근 중국의 자국 중심주의적 중화주의가 팽배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느 순간 일본보다 더 싫은 국가로 중국이 등장하게 된 것은, 작은 스포츠 경기나 문화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것을 상식선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 않는 보편성을 상실한 일방주의에서 오는 무지함에서 오는 원인이 결코 작지 않다.      


결코 질 수 없다고 하는 한일전이 열리더라도 한국이 반칙을 하고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라고 일본에 일방적으로 페널티를 부과하는 중국적인 방식으로 이기려 든다면 ‘상식적인’ 한국인이라면 눈살을 찌푸리고 그렇게 이긴다한들 뒤가 개운치 않아 신명 나게 응원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가 그러할진대, 그보다 더 도덕성이 강조되어야 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정치가 지금 어떠한가?


공정과 상식이 자신의 캐치프레이즈인 양 떠들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전혀 함구하고 언급하지 않는다. 깡패와 마약쟁이들을 잡아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법무부 장관이, 자신의 딸이 기득권을 이용하여 옳지 못한 방법으로 스펙을 만들어 미국의 대학을 가려고 한 행위에 대해서 함구한다.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 후 없어졌던 금융수사팀을 부활시켜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며 한다면서 정작 검찰에서 공소장에 범죄사실에 대해 기재한 대통령의 아내가 저지른 크나큰 금융범죄에 대해 함구하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른 쪽의 변죽만을 울린다.     


응원하는 이가 없는 스포츠는 존속될 의미가 없다. 하물며 국민의 응원을 받지 못하는 정치는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리고 만다. 그들을 잘라내고 반사이익을 얻을 그 밥의 그 나물이 싫어서 그저 뭉개고 있을 뿐임을 당신을 포함한 그들은 과연 모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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