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Sep 23. 2022

백성이 없는 군주는 존재할 수 없다.

국격이란 그 나라의 위정자의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

子曰: “以不敎民戰, 是謂棄之.”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써서 싸우게 하면 이를 일러 백성을 버린다고 한다.”     

이 장은 어제 배운 이전 장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 부연 설명하듯이 이어지면서 길고 길었던 ‘자로(子路) 편’의 마지막을 마무리한다. 앞에서 설명했던 백성들을 왜 가르쳐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고 다각적인 설명을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극단적인 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강조했는가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차분히 생각해보면서 되새겨볼 의미가 있는 장이다.     


적지 않은 <논어> 현대 해설서들에서는 이 자로 편의 마지막 장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전 장과 연관이 된다고는 언급하면서 정작 글만 배워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병술(兵術)을 강조했다는 식으로 되나 가나 가져다 붙이는 해설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자신이 논어 공부를 했다고 자기 이름을 달고 책을 버젓이 출간하는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다. 그들의 해설대로인지 정말로 공자가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라 생각이 드는지 이 글을 다 읽고 당신이 직접 판단해보기 바란다.      


주자는 아주 짧게 이 장에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의미를 풀이한다.     


‘以(이)’는 씀이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써서 싸우게 하면 반드시 패망의 화가 있게 되니, 이는 그 백성을 버리는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이 간단명료한 이유는 주자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에게 이 장의 의미는 앞 장에 이어 그 뜻이 너무도 선명하고 특별히 배우는 이들을 위해 해설한만한 내용이 있다기보다는 왜 이렇게까지 공자가 극단적인 반대 사례를 들어 강조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주석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저 따라 읽으며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 놓치기 쉬운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원문에서 공자가 ‘가르치다’의 목적어를 두지 않은 것을 다시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 공부하면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백성들을 7년이나 가르쳐 싸움터에 나가 싸울만한 경지에 만든다는 의미의 가장 큰 방점은 육체적인 단련이나 군사훈련이 아님을 표제어에서부터 강조한 바 있다. 그렇게 때문에 그 장에 대한 부연설명과 동시에 강조점을 두면서 새삼스럽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음을 다시 한번 의미하는 것으로 주석에까지 원문과 똑같이 그 부분은 생략했음은 새로운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아닌 앞 장에서 의미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해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극단적으로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서 싸움터에 군사로 사용하는 것은 백성들을 버린다’라고 표현한 것은 역시 두 가지 의미로 활용된다. 어제 잠깐 비유했던 바와 같이 백성들을 일회용으로 보거나 소모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한 번의 전쟁에 죽을 수 있는 백성들을 소진해버리는 어리석을 저지르는 위정자는 결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공자의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의 내용을 위정자들에 대한 권계로도 해석할 수 있음은 이 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정작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다’라는 표현의 주체는 위정자라는 문법적인 구조로 보더라도 당연히 이 말을 들어야 할 대상은 위정자가 1차적 대상임에 분명하다.     

앞서 ‘가르치다’의 목적어는 단순한 군사훈련에 한정된 것이 아닌, 효제충신(孝弟忠信)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그 깨달음과 공부를 통해 왜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가족과 나라를 지키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자발적인 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까지 가르친다는 의미임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의미를 설명한 이 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백성을 버리는 행위’라고 매섭게 질타한다. 실제로 그런 일은 당시에 아주 비일비재했기 때문이기도 했기에 이것을 극단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확할지 모르겠다 공자는 여겼을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보면 기원전 633년에 진(晉) 나라 문공(文公)이 교화에 힘쓴 지 두 해 만에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하자 대부 자범(子犯)은, 백성들이 義를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백성들을 동원한 전쟁이 너무 이르다면서 말렸다.      


이후,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고서 문공이 그들을 동원하려 하자 자범은 백성들이 信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다시 백성들을 동원하여 전쟁하는 것은 이르다고 만류하였다. 이에, 문공은 원(原)을 치고 30리를 물러나 신의(信義)를 보이고 나서 이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 신의를 알게 하였다면서 백성들을 동원하려고 했다.      


그러자 자범은 이번에는 백성들이 禮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동원령을 반대했다. 문공이 예의(禮儀)의 기준을 밝히고 관직의 위계를 바로잡자 비로소 백성이 군주의 명령에 의혹을 품지 않게 됐다. 문공은 백성을 동원해서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기고 覇者(패자)가 되었다.     


백성들에게 표면적인 군사훈련은 고사하고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조차 명분을 깨닫지 못하게 한 채 소모품으로 머릿수를 채워 군사로 활용한다고 한들 그들이 군사로서의 힘을 발휘했을 리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인해전술(人海戰術)식으로 머릿수를 소년과 노인으로 가득채워 설사 전쟁에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전쟁이 끝나 자신의 땅을 지키거나 남의 땅을 차지했다고 한들 그 땅을 누가 개간하고 그 땅에 누가 살 것이며, 그렇게 아비와 자식을 잃은 백성들이 그 군주를 어찌 존경하고 섬길 수 있겠는가?     

공자가 백성을 ‘버린다’라고 사용한 용어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백성 자체를 버린다는 것은 백성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 버린다는 표현적인 의미에 더해 위정자가 무엇을 위해 정치하는가에 대한 목적의식이 도(道)에 의거한 것이 아닌 사욕(私慾)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매서운 질책을 담고 있다.      


‘버린다’는 표현 자체는 필요 없는 것이나 쓸모가 없는,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 소중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이지 나에게 소중하거나 가치 있는 것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버린다(棄)’는 이 장에서 너무도 당연한 눈깔자에 해당한다.      


당신이 군주이고 싶다면, 군주의 자리에서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줄 백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너무도 단순한 사실을 잊고 방만한 정치행위를 하는 당대 위정자들에 대한 죽비를 내리치는 가르침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지, 글만 공부하게 해서는 안되니 문무를 겸비하도록 군사적인 부분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되도 않는 내용이 아니란 말이다.     

어제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러시아의 독재자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예비군 동원령을 내렸다. 푸틴은 국영 TV를 통해 방영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부분적 동원령 시행을 알렸다. 국방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대학생을 제외한 18~27세 남성 중 1년간 의무 군 복무를 마친 예비역 30만 명이 징집 대상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전체 예비군 병력은 약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지난 1년간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국민들 중에서도 나름 생각이 있다고 하는 20대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보았던 그 불안과 공포와 그들이 연계된 가족들과 친지들의 죽음을 통한 절망과 슬픔은, 마치 뜬금없는 폭력에 가족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우크라이나의 국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당장 명분도 없는 전쟁에 군인으로 몰려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는 러시아 군인들의 사상이 늘어나면서 당장 군 복무를 하며 전쟁터로 끌려간 오빠와 동생을 걱정하는 학생들은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고 불안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군 복무를 앞두고 있던 남학생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을까를 전전긍긍해하며 제대로 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의 불안에 초조해했다.     


어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발동된 러시아의 동원령에, ‘우리가 왜 독재자 푸틴을 위해 사지로 끌려가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라며 시위를 벌이던 이들이 개처럼 끌려가는 사진이 인터넷을 달궜다. 러시아 인권 감시단체인 OVD-인포가의 집계에 따르면, 러시아 38개 도시에서 동원령 반대 시위가 벌어져 최소 1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됐다고 한다.     

대학생들을 제외한 것은 그들의 학업을 배려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그들이 나름 식자층이라는 이유로 정부에 반발할 수 있는 주축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열외함으로써 반발 시위나 국가에 대한 반발세를 최소화하기 위한 꼼수이다. 내가 대학에서 이야기를 나눠본 학생들 중에서 현 푸틴 정부의 의미 없는 전쟁에 옹호하는 의견을 표현하는 학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이번 전쟁을 ‘전쟁’이라 표현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분위기를 유지했다. 평화적 시위 따위란 그 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독재자의 정책이나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시위란 존재할 수 없었다. 무조건 끌려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총과 칼을 내세워 군바리에서 버젓이 대통령이라고 정치를 하려는 자들의 폭정과 잘못된 정치에 주로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은 젊고 혈기 방장한 시시비비가 무엇인지를 배워 아는 대학생들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었나?     


멀쩡하고 훌륭한 공자의 가르침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신분제를 더욱 옹고히 다지기 위한 정치수단으로 사용한 조선시대의 정치꾼들로부터 세상이 바뀌었나? 그 와중에 외세의 침략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국토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겠다는 의병들과 진정한 무장은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자신의 신념에 의해 전쟁터에 나섰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나섰던 독립투사들은 정부의 명령에 의해 차출되거나 사지로 내몰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조선시대 500여 년 썩은 붕당정치로 사욕을 위해 물고 뜯고 했던 자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정치판에 투신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곳곳에 있던 은자(隱者)들의 올바른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그들은 그렇게 배움을 몸소 실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독재자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계 각지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중에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들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 의미 없는 명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전쟁을 벌여놓고서 자신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도 정작 침략받은 나라 때문에, 혹은 주변의 나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프로파간다를 방송을 통해 버젓이 펼치는 푸틴을 보면서 참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나이 든 강사나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러시아 국민들이었다. 그들은 방송의 프로파간다를 사실로 인지하고 푸틴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이 있는 시설에 공격을 하거나 아이들을 살상한 일이 없다며 흥분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과연 국격이 그 나라의 지도자에 의해 전부 결정되지는 않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이것으로 '자로편' 30장이 모두 끝났습니다. 20편 논어중에 13편이 끝났으니 7편 남았군요. 최근의 글 연재 중단이나 논어 읽기의 행간의 흐름을 통해 짐작하시겠지만, 참으로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져 참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끽하며 내가 사는 시대가, 참 좋다,라고 느끼는 여유를 가져본 것이 언제인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매일 글을 쓰고 선현의 뜻을 곱씹으며 가슴에 자라는 절망을 자르고 갈아 뾰족하게 솟아올라 다른 이들을 찌르거나 베이지 않도록 가다듬으며 살아갑니다.


다음 주 월요일, 새로운 ‘헌문(憲問) 편’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매거진의 이전글 굳이 정예군을 위해 7년이나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