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Sep 26. 2022

세금으로 먹고사는 자들이 과연 수치가 무엇인지 아는가?

세금이 눈먼 돈이라며 월급 주는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것들에게,

憲問恥,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原憲이 치욕(수치)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나라가 道가 있을 때에 祿만 먹으며, 나라가 道가 없을 때에 祿을 먹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이다.”     

‘헌문(憲問) 편’의 첫 장이다. 다른 편도 그렇긴 하지만 헌문(憲問)은 정작 이 편에서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첫 장의 시작 글자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편명으로 사용된다.     


헌문(憲問)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연한 듯 보이지만 당연해 보이지 않는 공자의 묘한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憲(헌)은 原思(원사)의 이름이다. ‘穀(곡)’은 祿(녹)이다. 나라가 道(도)가 있을 적에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고 나라가 도가 없을 적에 홀로 선하게 하지 못하고서, 다만 녹만 먹을 줄 아는 것은 모두 치욕스러울 만한 일이다. 原憲(원헌)의 狷介(견개)로 나라가 도가 없을 적에 녹을 먹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진실로 알고 있었으나, 나라가 도가 있을 적에 녹만 먹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반드시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그의 질문을 인하여 이것까지 아울러 말씀해 주시어, 그의 뜻을 넓혀서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음에 나아가게 하신 것이다.     


헌문은 원헌(原憲)이라는 인물로, 성이 원(原)이고, 이름이 헌(憲)이며, 자가 자사(子思)로 옹야(雍也) 편 3장에 원사(原思)라는 지칭으로 등장한 바 있다.      


이 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공자의 설명이다.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다른 <논어>의 현대 해설서를 읽으면 그저 ‘나라에 도가 바르게 서지 않았음에도 관리랍시고 월급을 챙겨 먹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라는 설명으로 대강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인 듯 보인다. 그런데, 위화감이 들지 않았나? 공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원문을 다시 상세히, 그리고 찬찬히 읽어보라. 


나라가 道가 없을 때에 祿을 먹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설명 앞에 분명히 ‘나라가 道가 있을 때에 祿만 먹는 행위’도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먼저 설명하고 있다. 나라가 道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祿을 먹는 일이 어째서 치욕스러운 일인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여전히 지식의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과정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이 적어놓은 내용을 설렁거리며 따라 읽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고서 공부했다고 말하는 자라 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은 <논어>를 연구했던 수많은 학자들 간의 이견이 오간 부분이다. 당나라 孔穎達(공영달)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녹봉을 받는다’로 일단 끊고 ‘나라에 도가 없거늘 녹봉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로 완전히 분리한 해석으로 보았다. 공자가 ‘태백(泰伯) 편’에서 “나라에 도가 있거늘 가난하면서도 미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한 말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한편 다산(茶山;정약용)은 “나라에 도가 있거나 없거나 어찌 됐든 녹봉 받아먹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로 풀이했다. 節義(절의)를 지키는 군자는 治世(치세)와는 부합하지만 亂世(난세)와는 어긋나기 마련인데, 치세든 난세든 벼슬을 산다면 군자라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본 것이다.      


주자는 이 부분에 대해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봉급만 꼬박꼬박 받아먹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봉급만 받아먹으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먹으며 나라 재정을 축내는 자야말로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자이다.”라는 해석을 하였다.     


세 가지 해석 방식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는 해석이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현대 해설서에서는 복잡한 해석을 피하고자 한 것인지 행간의 의미를 풀이하는 것이 머리 아파서였는지 대개 옛 해석에 의거하여 첫 번째 해석으로 얼버무리며 넘어간 이들이 대부분이다.     

자아, 그렇다면 이 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까지 공부한 <논어> 독법을 가지고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공자의 눈높이 교육에서 시작해보자. 질문을 던진 원헌(原憲)의 눈높이에 맞춘 질문이었을 것이니, 그에게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원헌(原憲)이 <논어>에 등장했던 ‘옹야(雍也) 편’ 3장의 내용을 다시 되새겨보아야겠다. 그 내용을 다시 회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원헌(原憲)이 어느 고을의 읍재(邑宰)가 되었는데 공자가 곡식 900 섬을 주려 하니 원사가 사양한다. 공자는 사양하지 말고 네 이웃과 향당(鄕黨)에 나눠주라고 충고한다. 원사는 아주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섬기고 있던 문제의(?) 계손씨가 주는 것도 아니고 스승인 공자가 내리는 곡식이었음에도 굳이 받지 않겠다고 사양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자가 사공(司空)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맡고 있을 때였으니 공자를 등용했던 당시 노나라의 상황을 보건대, 나라에 도가 있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 치욕이 어떤 것인지를 물은 원헌에게 공자가 대답한 것이 공자의 스타일상 원론적인 대답이 아닌 그의 상황에 맞는 직접적인 비유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이 장의 대화는 옹야편 3장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이루어진 대화였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나라에 도가 있을 시기에 원헌은 자신의 상사가 아닌 스승인 공자가 주는 곡식조차도 받지 않으며 이 장에서 스승이 알려준 가르침을 지키겠다는 고지식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장이 시기적으로 뒤에 언급된 것이라면 앞에 공자가 주는 곡식을 사양한 그의 의연한 태도를 보고 나서도 공자가 이런 가르침을 재차 강조했다는 것은 논리적인 선후 흐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마천이 집필한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참고하면, 원헌과 관련된 기사에서 사마천이 이 장에 대해 풀이한 내용이 더욱 명확한 증거로 이해에 도움이 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벼슬하여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만 녹이나 먹고 있는 것과,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물러가서 몸을 깨끗하게 가지지 못하고 녹이나 먹고 있는 것,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다.’     


앞의 두 가지 주석 중에서 첫 번째 주석에 부합하는 해설이다. 그래서 원문을 번역함에 있어 내가 앞부분의 전제에 ‘祿만’이라고 해석하여 ‘~만’이라고 행간의 의미를 표면에 드러낸 것이다. 단 한 글자의 의미가 어떻게 전체 문장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앞으로 공부하게 될 본편들에서 유사한 논리와 가르침이 나오기 때문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을 거치긴 하겠으나 ‘헌문(憲問) 편’의 첫 장을 이와 같은 명제로 시작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사실 간과하고 놓쳐버리기 쉬운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 전부가 아니다. 질문에서 언급된 ‘수치(치욕)’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원헌(原憲)은 이 장에서 ‘부끄럽다’라는 한글로 번역되는 ‘수치(恥)’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고, 당연히 원헌이 어떤 의미에서 그 단어의 본래 갖는 뜻을 묻는지 눈치채고도 남은 스승 공자가 올바른 정치를 행함에 있어 부끄러운 일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이 장의 가르침이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어 정치를 도모해야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굳이 나서서 그릇된 군주를 위해 벼슬하기보다는 은거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벼슬을 하며 정사를 펼침에 있어서도 봉급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왜일까? 앞의 설명처럼 나라에 도가 바로 선 것과 별개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월급만 축내는 자라면 이와 같은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끄럽다’라는 표현은 상대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비난함으로써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오롯이 자신이, 자신의 처지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적인 인지를 가질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아기들이 여름에 아랫도리를 입지 않고 벌거벗고 다닐 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부끄러운 행동이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부끄러움’이란 그래서 굉장히 복잡다단한 감정으로 해석되곤 한다. 지금 그 형이상학적인 상세한 설명과 비교는 다른 기회를 빌어하더라도, 지금 이 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은 자신의 반성적 인지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각인된다는 점이다. 아랫도리를 입지 않은 아이들이 옷을 입지 않은 것이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주지 시킴으로 인해 교육되거나 각인되는 과정을 통해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자발적이라고만 해석하는 데에도 무리가 있다.     


조금 결이 다른 비유이긴 했지만, 옷을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성경의 해설을 통해 인류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중요한 부분을 가리기 시작한 것으로 확산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까지 종교적 해설을 하기 전에 원문에서 공자가 말한 정치행위에 있어서의 부끄러움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나라에 도가 있어 나라가 바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노력과 공으로 나라에 도가 바로 선 것이 아님을 다른 이들도 알겠으나 최소한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축구나 야구처럼 여러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시합을 함에 있어 공이 큰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승팀에 소속해 있는 만년 후보도 있다. 그 만년 후보는 메이저리그 우승을 하고 반지를 받긴 했을지라도 자신이 받는 연봉이 부끄러울 것이다. 그가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라에 도를 바로 세우지 못한 위정자를 위해 사욕을 채우겠다고 벼슬길에 오를 수도 있고, 그런 잘못된 위정자를 바로잡겠다고 벼슬길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나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녹봉(월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주군(主君)의 실정(失政)을 바로잡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욕을 위해 그 자리에서 녹봉만을 축내는 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으니만 못한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부끄러운 줄 알라는 일침의 핵심이다.     


대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과 정치적인 노선을 함께 하는 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관장들을 강제적으로(?) 물갈이를 하고는 한다. 표면상으로는 기관장의 임기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부의 정책적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알아서 나가라는 식으로 압박까지 취하는 일로 최근 방통위와 국민권익위에 날 선 공방이 오고 가고 있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겠으나, 이미 이전 정부에서 그와 같은 압박 행위를 한 것으로 전직 환경부 장관이 실형을 살기까지 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이미 굳어진 관행이라면 명백하게 잘못되었음은 확인이 수년에 걸쳐 되었다고 보인다.    

그렇게 구차하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피바람이 불고 서로 음해하고 억누르는 짓을 할 것이라면 차라리 정권의 임기에 기관장의 임기를 진작에 맞추어 이런 부작용을 해결했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는 그들은 더 큰 떡에 관심을 갖느라 미처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하다. 권력 정쟁을 다투는 양측의 것들이 다 똑같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왜 뜬금없는 진영 타령을 하며 양비론을 펼치는가 생뚱맞은가? 바로, 호광(胡廣)의 이야기를 하려고 해서이다. 호광(胡廣)은 後漢 때 여섯 황제를 섬긴 재상인데, 정치 현안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처세랍시고 해서 비난을 받은 인물이다. 그래서 정치가가 강직하지 못하고 어벌쩡하게 구는 것을 비유하여 ‘胡廣(호광)의 中庸(중용)’이라 이른다. 

복수의 정부에서 인정받았다며 대형 로펌에서 전관 고액 월급까지 챙긴 국무총리가 과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성이 없는 군주는 존재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