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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28. 2022

편안하고 만족하면서 발전하는 방법은 없다.

편안하고 만족한다면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로서 편안하기를 생각하면 선비라 할 수 없다.”     

이 장에서는 다시 선비(士)로서의 자질을 논한다. 내용도 아주 짧다. 편안하기를 생각하면 선비일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제까지 <논어>를 공부해오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짧을수록 그 내용에 담긴 행간의 깊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이 열 글자에 무슨 그리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겠는가 싶겠냐마는 실제로 이 열 글자 모두도 아닌, 눈깔자는 ‘懷居’ 두 글자이다. 이 두 글자가 선비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방해 요소이자 지양해야 할 바임을 강조한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먼저 주자의 주석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居’라는 글자에 뭔가 특별한 다른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居(거)’는 마음에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거처(居處)하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종종 ‘居(거)’라는 글자의 의미가 ‘마음에 편안하게 여긴다’라는 해석으로 활용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게, 그닥, 전혀 처음 보는 특별한 해석이 감춰져 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본래 ‘居(거)’라는 글자가 일반적으로 ‘거처(居處)하다’라는 의미를 그 근본적인 뜻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문(古文)에서의 의미를 상세히 살펴보게 되면 ‘공적이지 않은 사생활’을 의미함과 동시에 공적이지 않은 일반적인 일상생활을 지칭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늘 거처하던 곳 혹은 형태’를 의미하는 총칭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부러 차려입는 것도 아니고 가장 익숙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누구의 시선이나 격식에 거슬리지 않는 자연인 상태로서의 편안한 일상이 바로 ‘거(居)’가 갖는 본연의 의미이다. 여기에 본문에 붙어 있는 ‘회(懷)’가 동사로 갖는 의미는 ‘생각한다’ 혹은 ‘그리워한다’라는 본래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게 두 글자가 합쳐져 ‘회거(懷居)’라는 단어로 사용되면, 그 의미는 다소 묘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기게 된다. ‘삶의 안락함만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도전을 꺼리다’라는 의미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는 언제나 확정적인 긍정적 답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늘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긍정적인 것으로 확인된 것을 선호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懷居’라는 개념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懷居’는 현재 자신이 安住(안주)하고 있는 집안, 마을,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戀戀(연연)하는 모습을 총체적으로 지적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풍기고 만 것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송순(宋純)은 악습을 쌓는 적습(積習)과 미혹을 고집하는 집미(執迷)로 이 개념을 풀이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다. 예컨대 다산(茶山;정약용)은 가정생활과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그리워함을 가리킨다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풀이하기도 했으나 나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견으로 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겠다.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이라는 획일적인 논리구조로 단정 지을 수만은 없는 문제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냉정하게 살펴보자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상태나 지금의 상황에 만족한다고 느끼고 편안해하는 순간, 인간은 그 이외의 행동을 부러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맛있는 것을 충분히 먹어 배가 부른 상태에서 다시 더 맛있는 요리를 연구하거나 다음 요리한 방법을 연구하거나 재료를 수급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전에 충분히 만족하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자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확장하거나 더 많은 투자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것을 도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현재의 정치 상태에 만족한 이들이 지금 정치행위를 이끄는 자들을 견제하거나 그들이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독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한때 유행했던 이른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더 큰 이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오는 스트레스나 상대적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목표 설정을 통해 심리적으로 빠르게 안정하고 만족을 취하려는 일종의 플래시보 효과에서 파생된 것이지,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취하는 스텐스가 아닌 것은 뼈 때리는 현실인 셈이다.     


예컨대, 비즈니스석 비행기를 타고 해외 유명 관광지로 떠나 7성급 호텔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자동차에 빌려온 텐트를 꾸역꾸역 넣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캠핑장에 가서 한참을 기다리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휴가를 보낼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부러 소확행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자의 시대에는 달랐을까?


나중에 진(晉) 나라 文公이 된 重耳(중이)는 즉위하기 전, 아주 오랜 기간 불가피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부친 헌공이 여희(驪姬)의 참소에 속아 태자 申生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외국으로 달아나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아우가 왕위(혜공)에 올라 자신을 죽이려 하자 조국을 떠나 齊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제나라 桓公(환공)이 그를 사위로 삼자 중이(重耳)는 현실의 안락함에 도취해서는, 그의 아내가 “懷安(회안)은 결국 당신의 명성을 무너뜨리게 됩니다”라고 타일러도 도무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가 언급한 ‘懷安’이 이 장에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개념인 ‘懷居’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


결국 가신들은 그의 방만함을 억지로라도 깨닫게 하고자, 그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수레에 싣고 제나라를 떠났다. 그렇게 중이(重耳)는 방랑 끝에 자신의 방만함을 고치고 더 나은 개선을 위해 노력을 거듭하여 혜공의 아들 회공을 몰아내고 즉위해서 왕위에 올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공자가 조국을 떠나 천하를 周遊(주유)하며 수십 년간의 세월을 비아냥 속에서 목숨마저 위태로운 위기를 겪어가며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자가 만약 적당히 노(魯) 나라의 실권자들의 비위에 맞춰가며 벼슬자리를 유지하며 제자를 양성했더라면 공자의 인생은 조금은 더 안락하고 편안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슨 영화를 얻어 얼마나 대단한 자리에 오르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며 상갓집 개라는 비아냥을 견뎌내며 평생을 힘겹게 다른 나라를 전전했단 말인가?     


천하를 선하게 되돌리고 싶다는 배우고 익힌 자로서의 사명감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배운 것과 다르게 돌아가는 천하의 부정과 부패를 그대로 목도하는 것이 힘겨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면 굳이 그렇게 어려운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공자를 질시하고 공자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거나 조금이나마 안목이 있는 위정자가 공자를 중용하려 들 때마다 방해했던 간신배들이나 권력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공자가 험난하기 그지없는 천하 주유를 선택하게 된 것은 타의에 밀려서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었다. 칠순이 넘어 본래 자신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욕을 제자 양성과 서적 집필에 맞췄던 것도 공자가 인간의 제한된 수명 하에 더 이상 자신이 하려던 현실정치의 참여에 한계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은 공자가 왜 굳이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삶을 그리도 힘겹고 어렵게 이어나갔을까? 여러 가지 형태의 답을 할 수 있겠으나,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결국 공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발을 신었는데, 신발 안에 돌이 하나 돌아다니며 발을 불편하게 한다면, 신발을 벗어서 그 돌을 끄집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신발에 비유해서 그렇지 실제로 신발을 벗고 다시 돌을 꺼내는 것조차 불편하다고 여기는 사람부터 지금 그렇게 불편한 것은 아니니 참고 걸을만하다며 참는 사람, 원래 신발이 발 안에 이런 돌 같은 것이 굴러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형태는 다양하다. 돌이 신발에 들어간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그런 신발 자체를 처음 신어서 돌이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 발에 걸리는 것이 돌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도 다양할 것이다.     

조금 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적인,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들어보자.


경찰이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으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는 형태가 조금씩 진화하고 달라졌을 뿐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아 정의구현과는 거리가 먼 행태를 하는 경찰들은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린다. 참 신기한 것은, 그들이 사건과 사고로 적발이 되는 사례 말고, 경찰청의 감사팀이나 감찰팀에 적발되어 형사 처벌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건 수사를 이상하게 꼬는 경찰들에게 누군가에게 뒷돈을 받아서 이러는 거냐고 공격적인 비난을 하게 되면 그들은 언제나 말한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경찰이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받고 사건을 봐주기 합니까?”


그런데 요즘 시대에도 그런 일은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그들 역시 그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일반인들조차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그런 비리 경찰들을 목도했을 때,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태도의 경찰을 접하거나 검찰 수사관, 검사를 접했을 때 일반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그런 걸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뭐 어떻게 할 수나 있나?”


그렇게 신포도 이론을 제시하며 일반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는 것은 큰 의미에서 이 장에서 언급하는 ‘懷居’와 같은 행위이다. 그 잘못을 지적하고 목소리를 내고 고소장을 내고 다시 검찰에 항소를 하고, 그런 행위들이 결국 막혀버리고 말 것이다, 라는 패배주의적 발상에서부터 ‘세상이 다 그렇지 뭐.’라던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등등의 발언 등이 모두 일상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고방식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당신이 그 부조리들에 모두 눈감고 귀 막고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유효기간이 밤 11시 30분이면 지나서 폐기할 편육 도시락을 저녁 7시 반으로 착각하고 먹은 아줌마를 편의점 사장이 고소를 했다. 경찰과 검찰에서 그녀를 약식 기소하여 벌금을 20만 원이나 내라며 기계적으로 처리했다. 그녀는 편의점 알바를 5일간 하면서 해당 편의점에서 15만 원이나 되는 식품들을 직접 자기 돈을 주고 사갔다. 당장 자신이 의도해서 횡령한 것도 아닌데 빨간 줄이 가는 것이 억울해서 정식 재판을 청구한 그녀에게 1심 무죄가 당연히 선고되었다.


그런데 검찰이 기계적으로 항소를 했다. 검찰의 기계적인 항소란, 자신들이 1심에서 무죄 선고가 나면 당연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결과적으로 인터넷에 이슈가 되자, 검찰총장이 지시하여 검찰시민위원회라는 곳에 회부하여 항소를 취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차를 운전하고 골목을 지나가려는데 나이 든 할아버지가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역주행하거나 갑자기 나타난 차에 부딪힐 수도 있을 듯하여, 클락숀을 빵 하고 울렸다. 그런데 그 경적 소리에 놀란 듯 할아버지가 자전거에서 넘어져 버렸다. 전치 몇 주의 상처에 자동차 보험으로 처리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더 많은 피해보상금을 내놓으라며 형사고소까지 감행했다.


경찰과 검찰을 또 그 사건을 버젓이 기소까지 해서 법원에 운전자를 피고인석에 세웠다.  1심에 당연히(?) 무죄가 나왔음에도 검찰에서는 다시 기계적인 항소를 통해 피고를 괴롭히는 것에 박차를 가했다.    

범죄행위가 버젓이 드러난 대단한 검사장 출신 인물의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면서 경찰의 송치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사건을 뭉개고 공소시효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던 검찰의 인물들은 여전히 부장, 차장을 달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산다. 검찰이 그런 행세를 본받아(?) 검찰에서 일일이 자신들이 불송치 한 사건에 전관 변호사가 나서서 전화를 넣지 않는다면, 뭉개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학습한 경찰의 덮어주기 수사가 만연해도 그들은 직무유기로 자신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외친다.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며 눈감아주는 순간 당신, 혹은 당신의 가족은 그 부메랑을 언젠가 맞게 되어있다. 그때 가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항변해봐야 또 다른 당신 닮은 이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시선조차 주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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