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Sep 29. 2022

당신은 일반인인가? 군자를 목표로 공부하는 자인가?

당신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子曰: “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가 道가 있을 때에는 말을 높게 하고 행실을 높게 하며, 나라가 道가 없을 때에는 행실은 높게 하되 말은 낮게(공손하게) 하여야 한다.”     

이 장에서는 이른바 治世(치세)와 亂世(난세)에 선비라고 하는 이들이 각각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다. 나라에 도가 행해질 경우인 治世(치세)의 처신과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경우인 亂世(난세)의 처신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행실을 높여서 한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 문제는 두 경우의 유일하지만 아주 큰 차이. 내가 ‘말을 높게 해야 한다’고 번역한 ‘危言’과 ‘말을 낮게(공손하게) 해야 한다’라고 번역한 ‘言孫’의 차이이다.     


먼저 이 두 핵심어의 개념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危(위)’는 높음이요, ‘孫(손)’은 낮추고 순한 것이다.     


간략하다. 부연설명 없이 높이고 낮추는 것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 설명한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무식하게, 나라에 도가 행해질 경우에는 자신의 뜻을 함부로 떠들어도 괜찮다는 의미이며,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개죽음을 당할 수 있으니 말을 삼가야 한다는 식의 설명으로 대강 넘어가는 해설을 설명이랍시고 붙여두었다.     

과연 그럴까? 비슷하지만 같지 않으면 그것을 일러 ‘사이비(似而非)’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들이 어디선가 주워 들었을 근거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윤 씨(尹焞(윤돈))의 부연설명에 의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군자의 몸가짐은 변할 수 없지만 말에 이르러는 때로는 감히 다하지 못하여 禍(화)를 피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는 것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군자와 선비의 개념이 혼용되고 있는 이 주석의 핵심은 위정자에게 하는 경고에 다름 아니다. 군자를 목표로 공부하고 수행하는 자로서 몸가짐은 언제나 높아야 하는 것에 변함이 없지만 함부로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고 위정자가 포악한 자일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니 위정자가 신하 된 자들이 그렇게 표현을 가려서 해야 할 정도로 정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에 대해 우리는 이미 앞서 ‘공야장(公冶長) 편’의 첫 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공자가 남용을 평가하면서 이르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림받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형벌은 면할 것이다.’라는 언급을 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이 장의 상황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으나,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논어>의 가르침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논어>가 대개 성인 공자가 제자들과의 대화나 천하를 주유하며 나눈 위정자들과의 문답을 정리한 책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록을 정리한 것이고, 정작 그 책을 읽고 공부하라고 엮은 것은 누구를 향한 글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면서 사서(四書)의 대표 격인 <논어(論語)>는 고문의 문리(文理)를 익히는 학습서로써의 역할이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논어>는 공자의 존재가 갖는 무게만으로도 수험 학습서이기 이전에 인간 공부에 대한 기본수양서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를 위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엮어진 이 책의 이 장은 누구를 향해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공자 당시는 봉건 신분제도가 명확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위정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군자를 목표로 하는 배우는 자들을 향해 던져준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굳이 뜬금없이 이 가르침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한 이유는, 일반인이라고 지칭되는 백성들을 향한 글이 아님을 강조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그 차이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워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권익을 위해 배움을 실천해야 할, 군자를 목표로 배우는 자들에게 일러주는 가르침임을 잊지 말라고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이 장에서 이 가르침을 듣고 뜨끔하고 바로 행해야 할 자들은, 다만 국가의 녹을 먹는 이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최소한 이 글을 읽고 <논어>를 읽고, 그것을 수험서로 삼아 국가의 녹을 먹겠다고, 나름 먹물깨나 먹은 지식인이라고 스스로를 배운 자라 여기는 이 전체를 향하는 말이다.


나라에 도가 제대로 행해질 때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장에서도 그렇고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라는 전제조건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조건절에 의해서가 아니라 뒤의 내용에 의해서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장만해도 그렇다. 나라에 도가 행해질 때라는 것을 알아서 행실과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 자신이 배운 대로 행동을 높이하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가 위정자에게 반영되는 것이 바로 나라에 도가 행해진다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보다 그 목소리를 냈을 때 그것이 실질적으로 반영되는가 하는 부분이다. 전쟁을 일으키고서도 버젓이 확전을 하겠다며 배우지 못한 이들을 전쟁에 동원하겠다고 선포한 푸틴의 나라에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며 녹이 든 홍차를 마신 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그는 그저 감옥에 들어가 버린 것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아주 적실한 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에서 공자가 던져주는 가르침은 공자의 논리가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명확하게 반증해준다. 위에 언급했던 <논어>의 현대 해설서에서 말한 함부로 입을 놀려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는 내용이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공자의 설명은 목소리를 높여도 그것이 반영되지 않을 것이 빤한 상황이라면 굳이 효율성이 떨어지게 배운 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듯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죽을 것이 두렵기 때문에 뜻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삼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직접적으로 행동화가 될 것이 아니라면 더 높은 효율을 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용(中庸)>에서 “행동이란 높게 행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나라에 도가 있어 벼슬하면 곤궁할 때의 절개를 변하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자기의 지킬 바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라는 설명이나 “도가 있으면 그의 말이 쓰이게 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침묵하여 몸을 거두어야 한다.”로 대변된다.     


이 문구들은, 내 말이 들어지지 않을 상황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위해 그 위정자에게 기탁하는 것은 그저 ‘기생하는 것’이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완곡하게 설명한 말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대가 있었다. 

이른바 입만 잘못 뻥끗해도 남산에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던 군바리 대통령의 시대가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삼청교육대라는 곳에 끌려가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일을 받거나 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돈 없고 빽 없다는 이유로 특진을 하겠다는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하고 수십 년을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이들이 억울함이 가득 넘쳐흐르던 시기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투(街鬪)를 나가서 화염병을 던지고 당당히 웃으며 구속되어 정치범이라는 이름으로 전과를 훈장처럼 달고나와 사회를 바꾸겠다고 했던 386세대가 586세대로 늙어가고 수구화되면서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사회의 부조리가 바로 잡혔던가?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젊은 당시의 초심을 잃고 20대의 혈기로 외쳤던 민주화를 방패 삼아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식들에게 부귀영화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그것을 키워나가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것은 대놓고 화염병 한 번 만져보지 않고 자기 사욕을 위해 법전 들고 공부해서 공안검사 되고 판사 짓 하다가 빨간딱지 달고 나와서 정치인이라고 하는 자들과 무엇이 크게 다른가 말이다.     


민주화는 고사하고 그 전대(前代)의 사욕 DNA를 확대 계승하여 빨간딱지로 여의도에 가게 해달라고 헤헤거리며 배지를 단 그들의 후안무치함과 민주화 열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정치인 이름으로 살며 자신의 편안함과 머리 나쁘고 공부 못하는 자기 자식을 음서제로 어떻게 해서든 일반 국민들의 위에 올려놓으려는 그 표리 부동한 자들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번에 정권을 빨간딱지들에게 내어준 것은 결정적으로 입으로는 민주화가 어떻게 사회정의가 어떻게 하면서 벌인 그들의 표리 부동하고 냄새나는 그 지저분한 짓거리를 사람들이 조금 더 싫어했다는 명확한 결과물에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말하는,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경우에는 말을 낮춘다. 혹은 ‘공손하게 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오독으로 인해 호도하려는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줄 필요가 있겠다. 이미 앞의 설명에서 눈치를 챈 학도들도 있겠으나, 기존의 현대 해설서식으로 함부로 입을 놀려서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는 식의 해석이 제대로 된 해설이라면, 말을 공손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맞는 행동을 하되 말은 공손하게 살길을 찾으라는 모순된 가르침이 되고 만다. 


행동을 군자로서 부합하는 높은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떻게 표현만 하지 말라는 것인가? 높은 행동을 유지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자신이 표현을 해도 효율적으로 위정자가 잘못을 고칠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해야 옳다. 행여 그렇게 되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고 기존에 자신이 누리던 명성이나 부귀를 버려야 할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행동함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이 장에서는 말하고 있다.     


내가 말을 낮추라는 표현을 ‘공손하게 해야 한다’로 의역을 괄호 안에 넣은 것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올바름을 잃지 않는 선에서 표현을 완곡하게 해서라도 위정자의 잘못을 바로잡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는 공자의 의도를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위정자의 그릇에 따라 나라에 도가 행해진다고 여길 정도의 수준이라면 있는 그대로 바른 소리를 하더라도 그 말을 왜곡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싸한 위정자의 노릇을 하고 싶은 그릇이 조그만 자라면 그 말이 바른 것은 알지만 자신에 대한 잘못이나 자신이 놓친 부분에 대해서 지적한다고 생각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도드라져 올라와 발끈하며 그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공자는 누구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 안된다면 뜻을 접고 은거해야 옳겠으나 그전까지는 그 위정자의 좁은 그릇을 감안해서라도 공손하고 완곡하게 뜻을 전달하라는 표현방식까지 염두에 둔 가르침이 이 장의 내용 안에는 담겨 있다.     

외교부 장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자가 바로 영상 속에서 대통령의 비속어가 쏟아져 나오는 현장에서 들었다. 뉴스 인터뷰에 버젓이 나와서 그런 말을 들었냐는 질문에 그 자가 보이는 눈동자의 움직임과 말투 그리고 행동을 수많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현직 형사와 검사들이 보았을 것이다. 그가 진실을 회피하며 자신에 대한 해임결의안이 야당에 의해 제기된 것에 대해 ‘외교를 정쟁으로 활용한다’는 식의 헛소리를 떠드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지금 강남 한복판의 지역구 국회의원직을 겸직하고 있다. 지역구 관리와 동시에 외교부 장관직을 그가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겠다마는 그것과 별개로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장관의 자리에서 그저 인간적으로 말실수를 한 것이고, 평상시 하던 버릇대로 나왔다고 인정하고 깔끔하게 사과하고 이런 쓸데없는 정쟁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어떠냐는 직언조차 하지 못하는 자라면, 굳이 ‘장관님’ 소리를 듣는 것에 흥이 겨워 그 자리에 연연하기 전에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가 배운 자라 자처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당신은 실천을 보여야 할 때는 그저 ‘일반국민(이라 쓰고 ‘개돼지’라 읽는다더라)’이고 이익을 취할 때는 배운 자라 자처할 것인가?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는 쥐새끼 같은 삶을 영위할 셈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편안하고 만족하면서 발전하는 방법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