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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30. 2022

훌륭한 말을 한다고 덕이 있는 자라 할 수는 없다.

용기가 있다고 하여 仁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子曰: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지만 훌륭한 말이 있는 자는 반드시 德이 있지는 못하다. 仁者는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가 있는 자는 반드시 仁이 있지는 못하다.”     

이 장은 읽을 때마다 수학의 필요충분조건을 떠올리게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간세상이 어디 수학처럼 딱 맞아떨어지기만 하던가. 그렇지 않기에 이 장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행간의 깊이는 훨씬 더 깊고 오묘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덕이 있는 자에 대한 기준으로 훌륭한 말을 삼았고, 어진 자에 대한 기준으로 용기를 삼고 있는데, 제대로 이 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를 덕이 있는 자라고 하는지 어떤 이를 어진 자라고 하는지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훌륭한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서부터 용기가 있다고 하는 의미가 어떤 범위에까지 활용되는 것인지를 모두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서 언제나 ‘제대로’ 공부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머리를 쥐어짜며 터져버릴 준비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배우는 자들을 위해 어떤 해설을 해주고 있는지부터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덕이 있는 자는 和順(화순)이 心中(심중)에 쌓여서 아름다운 榮華(영화)가 밖으로 나타나고, 말을 잘하는 자는 혹 말재주가 있어 口給(구급, 구변)을 잘할 뿐일 수 있다. 仁者(인자)는 마음에 사사로운 얽매임이 없어서 義(의)를 보면 반드시 행하고, 용기가 있는 자는 혹 혈기의 강함일 뿐일 수 있다.     


주자는 이 해설을 통해, 공자가 왜 그렇게까지 말만 익숙한 이를 혐오하고 폄하했는지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풀이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훌륭한 말이 갖는 정의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 공자가 말하는 훌륭한 말은 청산유수처럼 표현이 훌륭하거나 그 이치는 맞는 듯 하지만 뭔가 말하는 이와 일치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표현하는 방식이나 그 내용에 초점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이가 그 말을 얼마나 실천해왔는지에 대한 체행이 그 표현의 깊은 저변에 두둑하게 깔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메신저에 방점이 찍혀 있다. 궁극적인 가장 큰 차이는 앞서 수학적인 개념인 필요충분을 연상시켰던 원문의 해석 그대로, 덕이 있는 자의 표현은 설사 유려한 표현이 아닌 서툴지는 몰라도 진중하고 진솔한 체행에서 나온 훌륭한 말일 수밖에 없지만, 말을 잘하는 것으로 덕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仁者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인(仁)이라는 개념이 워낙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이 장에서는 정의를 실행하는 마음가짐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어진 이라면 마음에 사사로운 얽매임이 없어서 義(의)를 보면 반드시 행한다는 주자의 설명은, 원문에서의 용기가 단순히 단순 무식한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구별하라는 가이드라인에 다름 아니다. 즉, 무엇 때문에 용기를 내는가에 대한 차이라 할 수 있는데, 공자가 누누이 강조했던 용기는 다혈질의 자로(子路)가 그저 불의를 보고서 발끈하는 혈기의 강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주자의 주석에서 언뜻 언급된 듯 하지만 공자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자(仁者)가 과감한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다혈질의 본성 때문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사사로운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사사로운 얽매임’은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될 어진 이가 갖춰야 할 기본 자질이다.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인자(仁者)의 도리이다. 그런데, 그렇게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 그것이 내가 아는 사람, 혹은 내 가족이라고 해서 주춤하게 되거나 내가 이미 그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과 이익을 함께 하고 있어 내 이익을 위해 입을 다물고 그저 눈을 질끈 감는 것, 이것이 불의(不義)이고 불인(不仁)이라고 공자는 강조한 바 있다. 주자는 위 주석을 통해 이 부분이 인(仁)을 완성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임을 구분하여 이 장에서 말하는 용기란, 그런 사사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감히 인(仁)을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풀어준 것이다.  


이러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윤 씨(尹焞(윤돈))는 수학의 필요충분조건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깔끔한 한 문장으로 이 장의 사실관계를 정리한다.     


“德(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지만 한갓 말만 잘하는 자는 반드시 덕이 있지는 못하며, 仁者(인자)는 뜻이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한갓 용기만 있는 자는 반드시 仁(인)이 있지는 못하다.”  

   

앞서 공부했던 ‘이인(里仁) 편’의 25장에서 공자가 말했던,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그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라는 말처럼 덕이 있는 자의 체행은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나 그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을 깨닫게 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덕이 있는 사람은 잔소리하듯 덕을 계속해서 강조하거나 그것을 유려한 표현으로 꾸미고 그것으로 심지어 자신이 유명세를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   

한편, ‘有言’의 해석을, 평소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저서를 저술해서 후세에 드리우는 ‘立言垂後(입언수후)’를 가리킨다고 보는 후대 학자들의 설도 있다. 지금과 같이 유튜브나 강연할 수 있는 매체가 많지 않았던 공자의 시기에 비추어본다면 말하는 것은 결국 대다수의 대중을 향한 것이 아닌 위정자 몇몇과의 개인적인 대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학설에도 일리가 있다. 다산(茶山;정약용) 역시 이 설을 지지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선인들은 훌륭한 덕에 걸맞은 훌륭한 시문과 자신의 사상을 문집 등의 저술을 통해 후세에 전하는 일을 매우 중시했던 문화가 있었기에 그가 남긴 저술을 통해 그의 사람됨과 덕(德)을 갖추고 있었는가에 대해 후대의 학자들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학자들에게 ‘有德有言(유덕 유언)’이란 말은 저술활동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덕행도 훌륭하고 언론 저술도 훌륭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반면, ‘無德有言(무덕 유언)’이라고 하면 덕행은 없으면서 언론 저술만 뛰어남을 풍자한 말이다.     


분명히 강연자로 유명세를 날리며 청산유수처럼 방송은 물론 유튜브나 강연 자리에 인기를 구가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인문학 열풍이 불고 나서 개나 소나 인문학 서적이라는 것을 내고 결국 인문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심성수양을 통한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자신의 인(仁)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늘어났다.      


일반인들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 쉬워지면서부터, 그리고 대학교수가 아니어도 그저 강연을 업으로 삼는다면서 레크리에이션 강사처럼 푼돈 모아 생계를 영위하는 자들이 생겨나면서 동네 곳곳에 인문학 강연은 물론이고 다양한 형태의 강연과 인문학 콘서트는 물밀 듯이 늘어났다. 신기한 것은 그들이 하는 말이 내용 자체부터 틀린 수준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짜깁기로 인용하는 훌륭한 말들이나 일화는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이야기임에도 그 강연이나 그 책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과연 그들을 행동화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는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2년 뒤에 있을 총선(국회의원 선거)은 4년마다 한 번씩 우리 지역구의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권익에 목소리를 내줄 대표를 뽑는 선거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은 모든 투표자들이 정치행위를 통해 사회 정의와 투표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없으니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위해 대신 싸우고 대신 목소리를 높여달라고 대표선수를 뽑는 것이다. 그 선거판에서 서로 자신을 대표로 뽑아달라는 이들은 지역을 위해 지역 주민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며 공약이라는 것을 떠들어댄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그리고 매연이 가득한 삼거리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목이 터져라 떠들며 지역주민의 머슴역할을 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고 난 뒤 그들은 결코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이는 버젓이 국회 국정감사 기간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걸려서 방송을 타서 지역주민에게 부끄러움을 한가득 주고서는 다시 똑같은 짓을 해서 ‘제 버릇 개 못준다’는 소리까지 듣고서 당당하게 40대 주자가 어쩌네 하면서 당대표 선거에까지 나왔더랬다. 그뿐인가? 국회 대회의장에서 야한 사진을 찾아 시간을 소일하던 것이 걸린 사람은 물론이고, 대통령과 카톡을 하며 어린 당대표를 잘라버렸다고 키득거리는 대화 장면까지 버젓이 걸려놓고는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탓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이 국민을 위하고 지역주민을 위한다면서 유세장에서 목이 터져라 떠들어대던 내용들 중에 어디 하나 괴팍한 이야기나 잘못된 이야기가 있던가? 그들이 비싼 월급 줘가면서 작성한 그 유세 연설문이나 방송 토론회의 원고에 무슨 논리적 모순이나 결함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안다, 그들이 그렇게 멋들어지게 써준 원고를 달달 외워서 웅변대회의 어린이처럼 외쳐댄다고 해도 그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민낯이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를 말이다. SNS에 강남좌파라면서 당시 정부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던 자가 자신의 자식에게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겠다고 이런저런 꼼수를 피우다가 국민적인 개망신을 당하고 온 가족이 검찰에 불려 다니며 엄마는 감옥에 들어가고 딸은 의사면허가 취소되네마네 하는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대놓고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하는 빨간딱지를 표방한 자들은 어느 정도이겠는가를 당신이 결코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 지역주민들의 민원에 대해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명을 둘 수 있는 보좌관중에 지역 사무실을 지키는 사무국장이라는 자들을 찾아가 보면 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의 경로당으로 전락해버린 그곳은 적당히 굳어 있는 표를 관리하는 정도를 넘어서지 않을 뿐, 진정한 지역 민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 처리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에게 민원을 전해주더라도 결국 사무국장이라는 보좌관은 자신의 선에서 말로만 신경 쓰겠다고 들어주는 행위에서 그치거나 정말 구체적인 액션을 원하는 의식 있는 민원인에게는 버젓이 ‘여의도에 보고를 했습니다.’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민원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직접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잘못된 부분의 피해를 호소하는 일을 대신해달라고 대의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대표라고 그를 뽑아준 것인데, 그를 직접 만나 항변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좌관이라는 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통화하는 일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선거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의 손을 부여잡고 약속 때문에 바빠서 지나가야 하는데 자신을 꼭 뽑아달라며 애원하던 그 작자가 정작 배지를 달고서는 자취를 감춰버리는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한다. 일일이 지역 민원을 하나하나 들어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국회의 일정에 맞춰 회의에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고, 국회 본연의 임무인 안건을 만들어 발의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들은 사회시간에 졸고 땡땡이쳤을까? 대의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구획을 지어 편의상 사람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그 해당 지역구의 인구 대비 사람이 많은 경우 갑, 을, 병, 정으로 쪼개가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라고 하는 것이다.     


강남이 마치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인 양 빨간 깃발을 꽂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강남 지역구 국회의원실에 직접 보좌관들과 소통할 일이 추석을 전후로 있었더랬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통계청장 출신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국회의원과 현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외교부 장관을 겸직하고 있는 국회의원실의 행태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지역구 주민임을 확인하고서 굽신거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가 싶더니만 같은 빨간당임에도 불구하고, 민원의 발생지역이 엄밀히 자신들의 지역구일이 아니지 않은가 의문을 제기하며 미루기를 시연하질 않나, 그것이 직접적으로 자기 의원실에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사안인가부터 따지질 않나, 자기네 의원과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인지 족보를 묻는 보좌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행태는 그들이 모시고 있는 국회의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역구 사무실을 지키는 사무국장이라는 보좌관은 그들대로 자신들이 지역구를 관할하기는 하지만 중앙 업무는 모두 여의도 국회에 있는 보좌관이 처리한다며 미뤄두고 시간을 때우는 수법까지 어쩌면 쌍둥이처럼 똑같은 수법을 구사하는 신기함까지 보여주었더랬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해당 사안이 문제가 되어 행여 언론에 터지거나 상대 파란당의 무기로 쓰일 여지가 있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그 와중에 한 보좌관은 뜬금없이 코로나 확진을 받아 일주일간 격리를 한다고 하더니 그 기간에 청와대의 부름을 받아 들어가기로 하여 확실한 휴가를 사용하며 대거 잘려버린 청와대 정원을 채우러 들어갔다고 사후 연락조차 거부하고 자신은 이제 그 국회의원실을 나왔음을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런 작태를 보고 알면서도,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자들이나 자신들의 사욕과 유관할 때만 용기를 내는 자들에게, 그것이 그들만에 한정된 것이라 당신은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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