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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04. 2022

당신이 지향하는 바는 어디인가?

힘으로 우겨서 얻은 자, 힘으로 강탈당할지니...

南宮适問於孔子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而有天下." 夫子不答. 南宮适出, 子曰: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     
南宮适이 孔子께 묻기를 “羿는 활을 잘 쏘고 奡는 힘이 세어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녔지만 모두 제대로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禹王과 稷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天下를 소유하셨습니다.” 하니, 夫子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南宮适이 밖으로 나가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로구나, 이 사람이여. 德을 숭상하는구나, 이 사람이여.”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남궁괄(南宮适)은 <논어>에서 세 번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임과 동시에 그 자질을 인정받아 조카의 사위로 삼은 인물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해서 아홉 명이나 되는 딸을 낳고, 아들을 낳을 욕심에 두 번째 결혼을 하여 얻은 아들이 하필이면 한쪽 다리를 못쓰는 절름발이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孟皮)라 하였는데, 세 번째 부인의 아들로 태어난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이복형인 셈이다.     


맹피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그 딸에게 자신의 제자 중에서 추천할 만한 인물로 사위로 삼으라고 하여 결혼시킨 인물이 바로 이 장에서 등장하는 앞서 남용(南容)이라고 언급되어 등장했던 남궁괄(南宮适)이다.      

질문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반응과 답변이 이 장에서 배우는 자들에게 의문을 던진다. 왜 공자가 그의 질문을 듣고서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가 나간 이후에 그에 대해 특별히 허여 하는 듯한 말을 남겼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 장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주자는 이 장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자는 남궁괄이 제시한 인물들을 어떤 의미에서 인용한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남궁괄은 곧 南容(남용)이다. 羿(예)는 有窮(유궁, 국명)의 임금이니, 활을 잘 쏘아 夏后相(하후 상)을 멸하고 왕위를 찬탈했었는데, 그 신하 寒浞(한착)이 또 예를 죽이고 대신하였다. 奡(오)는 《春秋左傳(춘추좌전)》에 澆(요)로 되어 있으니, 한착의 아들이다. 힘이 세어 육지에 배를 끌고 다녔는데, 뒤에 하후 少康(소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禹王(우왕)은 水土(수토)를 다스리고 稷(직, 후직)과 함께 씨앗을 뿌려 몸소 농사짓는 일을 하였는데, 우왕은 舜帝(순제)의 禪位(선위)를 받아 천하를 소유하였고, 稷(직)의 후손은 주나라 무왕에 이르러 또한 천하를 소유하였다. 남궁괄의 뜻은 羿(예)와 奡(오)를 당세에 권력을 소유한 자에게 비유하고, 禹王(우왕)과 稷(직)을 공자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남궁괄의 말이 이와 같으니, 군자다운 사람이어서 덕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다고 이를 만하니, 허여(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나가기를 기다려 찬미하신 것이다.     


이 긴 주석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데, 남궁괄의 언급한 인물들의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한 것과 이후 그 인물들을 뜬금없이 등장시킨 것이 아닌 나름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음을 설명하며 그 인물들이 누구를 빗댄 것인지에 대해 주자의 해설을 담고 있다.    

 

주자의 해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도대체 왜 남궁괄이 저런 역사적인 사실만을 질문의 형태로 던진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중고급 단계에 이르른 이들이라 하더라도 쉽게 주자의 의미를 이해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주자의 설명은 단순히 주자의 주관이라기보다는 뒤에 이은 공자가 왜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그의 의미를 이해하고 허여 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의문의 열쇠에 해당한다.     


주자는, 남궁괄의 비유가, 羿(예)와 奡(오)를 당세에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 해당하고, 禹王(우왕)과 稷(직)을 공자에 비유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앞선 선군(先君)에 비유하면서 높인 뜻을 바로 이해한 공자가 겸양의 의미로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덕을 가지고 인을 가진 자에 대한 일반론적인 설명이 구체적인 대상으로 언급하며 확장된 논의임을 알 수 있다. 군자와 선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개념 설명을 마친 이후 바로 나온 구체적인 논의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명확하게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남궁괄의 질문이 단순히 질문이 아니라 그가 이해한 당시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고 그가 군자다운 사람이어서 덕을 숭상하는 마음이 있다고 이를 만하여, 허여(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주자의 해설이다.      


현대 해설서를 통해 논어를 읽는 이들에게 있어 이번 장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구체적인 사안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훅 들어오는 구조라서 조금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다.      


다시 그 의문에 대해 찬찬히 풀이해보자면, 남궁괄이 羿(예)와 奡(오)를 언급한 것은 예(羿)라는 인물이 활을 잘 쏘았다거나 오(奡)라는 인물이 힘이 장사였다는 영웅적인 부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폭력적인 부분에 의해 온전하게 죽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고, 뒤에 그저 천하다고 할 수 있는 농사일을 했던 禹王(우왕)과 稷(직)이 특별한 폭력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음에도 천하를 순양 해서 잘 다스려 천수(天壽)를 누리며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음에 방점을 둔 것이다.      

엄밀한 논리에 의하면 羿(예)와 奡(오)가 나쁜 인물이라거나 억지로 왕위를 찬탈하여 천하를 장악한 이들이라는 식의 비난까지는 아니겠으나 이 두 인물과 禹王(우왕)과 稷(직)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어떻게 왕위를 갖게 되었는지 천하를 얻게 된 방식의 차이와 그들의 최후에 대한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공자가 ‘남궁괄(南宮适)을 두고 ‘군자로다 저 사람은! 德을 숭상하는구나, 저 사람은!’이라고 한 대목은, 그가 질문의 형태를 빌어 스승의 의견을 묻는 듯하면서 자신의 배움과 이해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힘을 믿었던 羿(예)와 奡(오)는 제명에 죽지 못했고 덕이 높았던 禹(우)와 稷(직)은 천하를 차지했던 옛일에 대해 어떤 견해인지 묻는 방식에서 공자의 제자의 의도를 바로 읽어낸 것이다. 공자는 그가 尙力(힘을 숭상함) 하지 않음을 알고, 군자의 자질을 지니고 또 마음으로 尙德(덕을 숭상함)한다고 평가한 것이 바로 그가 나가고 나서 허여(인정)했던 칭찬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배우는 자라면 어느 누가 尙力(힘을 숭상함)을 하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주자의 해석처럼 공자 당시에도 정권을 잡은 위정자들의 권력은 물리적인 힘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덕으로 백성들이 스스로 따르게 하거나 능력 있는 자들이 그를 위해 벼슬길에 나서 돕게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자는 전쟁을 통해 다른 이들을 굴복시키거나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일도 물론 대의명분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였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정치행위는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덕(德)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남궁괄이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했던 예(羿)만 해도 그렇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左傳(좌전)> 襄公四年(양공사년) 조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전한다.      

예(羿)는 하(夏) 나라 말기 유궁국(有窮國)의 임금으로 활을 아주 잘 쏜 사람으로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 해가 열 개나 뜨는 일이 있었는데 너무 뜨거워서 羿(예)가 그 가운데 아홉 개를 활로 쏘아서 떨어뜨려버렸다고 한다. 그는 한때 하나라의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정치는 돌보지 않고 사냥만 즐긴 나머지 머지않아 자신의 재상인 한착(寒浞)에게 나라와 아내를 함께 빼앗기고 말았다. 심지어 한착(寒浞)의 일당은 예(羿)를 죽인 후 그 육신을 삶아 고기를 먹었고, 그 아내를 빼앗아 취하여 오(奡)를 낳았는데, 오(奡)는 이후 하나라의 왕족으로서 난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소강(小康)에 의해 살해되는 잔인한 역사를 반복하여 겪게 된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공자 당시에는 위정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에서도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해당하지 않은 삶의 마무리도 상당히 큰 업적으로 보았다. 수천 년 후의 대한민국을 예로 들자면, 대통령을 한 이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후에 감옥으로 들어가지 않는지에 대한 그들에 대한 인생의 마무리가 역사의 평가라는 설명이다. 이는 이 장에서 남궁괄이 비유의 본질로 들려고 했던 덕을 숭상하여 일을 진행하게 되면, 자신이 천하를 얻게 되는 과정은 물론 똑같지만 천하를 다스리고 양위한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 않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로 그 큰 차이를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배웠고, 역사적인 사실에서도 명확히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현실정치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배우는 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자의 가르침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앞서 남궁괄에게 시집보낸 공자의 이복형, 맹피의 딸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아들에 대한 일화를 통해 공자의 생각을 다시금 공부하는 기회로 삼아보자. 맹피의 아들 이름은 ‘공멸(孔蔑)’이라 하였는데, 그에 대한 일화가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자로 초견(子路初見)’에 등장한다.     


그가 복자천(宓子賤)이라는 이와 함께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공자가 직접 조카인 공멸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네가 벼슬에 나온 후로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공멸이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사오나 잃은 것은 세 가지나 있습니다. 임금의 일에만 얽매어 괴롭게 되니 어느 겨를에 학문을 익힐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학문에 대해서 밝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봉록이 적어서 죽을 먹게 되오니 어느 겨를에 친척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골육간에 더욱 소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무에 다급해서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문병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은 친구 간에도 소홀하게 되오니 그 잃어버린 바 세 가지가 이것이옵니다.”


공자는 그의 대답을 듣고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복자천(宓子賤)을 만나 다시 공멸에게 물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복자천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벼슬에 나온 뒤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얻은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려서 배웠던 것을 오늘날 실천하게 되니 이것은 학문이 더욱 밝아지는 것이오며, 봉록을 받는 것으로 친척들까지 돌봐 주게 되니 이것은 골육간에 더욱 친하게 되는 것이며,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죽은 사람도 조상하고 병든 사람도 위문하게 되니 이것은 친구 간에도 더욱 정이 두텁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얻은 세 가지란 바로 이것이옵니다.”


공자가 그의 대답을 듣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군자로구나! 저 사람은. 노 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덕성을 취했겠는가?”     


마지막 공자의 대답이 눈에 익지 않은가? 이 문장이 바로,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만 뜬금없이 등장하여 앞의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 ‘공야장(公冶長) 편’의 2장이다. ‘공야장(公冶長) 편’ 1장에 맹피의 딸에게 남궁 괄을 장가보낸 이야기가 등장하고 바로 뒤이어 맹피의 아들인 공멸과 대비되는 복자천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구성된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고 찬탈하는 데 있어 물리적인 힘보다는 덕이 더 귀중하다는 생각은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지식한 학자의 의견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남궁괄은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여 결국 물리적인 힘으로 천하를 쥐었던 이들이 마땅한 죽음을 얻지 못하는 함을 반어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스승 공자에게 배운 가르침과 공자가 세상을 일깨우는 방식이 진정으로 옳은 것임을 인정하고 간증(?)하고 있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비속어를 쓰고 그것이 공중파의 영상에 잡혀 터진 것은 해프닝이랄 수 있다. 그가 오래된 검사생활을 통해 그 비속어가 입에 배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자기가 속한 어린 당대표에게도 사용했다 하여 자연스럽게 외교부 장관이나 수행원들의 앞에서 버젓이 써도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나 해외 순방길에서 이동 중이든 뭐든 공식적인 카메라나 다른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 정숙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증거까지 나왔으면 그저 고개 숙여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본뜻이 그것이 아니었음을 설명한 후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더 이상 공격할 다음 자세를 잡기가 애매해진다. 

그런데, 그런 말 자체가 없었다는 빨갱이식 논리나,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는 둥, 그걸 방송한 방송사를 잡겠다는 둥 설레발을 치는 순간, 그가 이끄는 나라는, 그 배는 산으로 가는 것을 넘어 골로 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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