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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05. 2022

군자도 인(仁)을 완성하기 위해 힘쓰거늘...

군자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子曰: “君子而不仁者, 有矣夫! 未有小人而仁者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로서 仁하지 못한 자는 있지만 小人으로서 仁한 자는 있지 않다.”     

이 장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수학적 논리인 필요충분조건의 응용 버전이 조금은 복잡하게 적용되어 자세한 논리구조를 따져보아야만 한다. 군자(君子)는 큰 뜻을 품고 덕을 닦아나가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는 덕을 완성한 사람도 있지만 덕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大體(대체)는 선하다 해도 成德(성덕)은 어려우며, 本領(본령)이 잘못되면 至行(지행)에 이를 수가 없다.”라고 한 바 있다.      


군자라는 개념의 범위가 어느 하나의 덕목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군자가 ‘덕(德)을 갖추고자 수행하는 자’라고 규정하게 되면 그 덕(德)이라는 개념 안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서도 두루 갖추되 어느 일 면목이 뛰어난 사람도 군자라고 칭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네 가지 덕목 중에 가장 앞에 있는 인(仁)의 덕목이 다소 부족한 이라 할지라도 군자라 불리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덕이 있는 자가 훌륭한 말을 한다고 했던 부분과 그 반대 경우가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던 부분이나 어진 사람이 용기 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 언급한 것이 모두 헌문편에서 같은 맥락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원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인(小人)의 경우는 소인이라는 구별만으로 이미 ‘仁’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는 것이 무리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소인(小人)에게 ‘仁’이라는 덕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하여 이와 같은 설명을 대구로 맞춘 것은, 이 장의 내용이 君子로서 仁하지 못한 자가 있음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표방함과 동시에, 소인이라 규정되는 가장 큰 기준인 사리사욕이 결코 인(仁)이라는 개념과 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소인이 인(仁)을 갖추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소인(小人)이라 할 수 없다. 그는 누구도 의심할 바 없는 군자(君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려는 핵심은, 군자와 소인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간극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다.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바로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도리(道理)와 천리(天理)에 따라 움직이는가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움직이는가를 가지고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한다.      


그 기본적인 기준점과 이 장의 논리구조를 통해 살펴보게 되면, 군자의 경지보다 인(仁)의 경지가 조금 더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군자라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이라 할지라도 아직 인(仁)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깨닫고 그 궁극의 경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묵직한 죽비에 다름 아닌 셈이다. 아울러 군자라 할지라도 아직 인(仁)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어느 한순간 사리사욕의 얽매임에 제약을 받는 실수를 하는 순간 소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의 일일 수 있음을 권계 하는 회초리에 다름 아님 셈이다.      


이것이 소인이 인(仁)할 수 없다는 당연한 논리를 대구의 뒤에 넣어 단정적으로 인(仁)에 다다르지 못한 군자가 실수를 하거나 사특한 마음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음을 권계 하되 사욕(私慾)을 지향하는 소인은 결코 인(仁)은 고사하고 군자의 경지에도 이를 수 없음을 강하게 못 박아 소인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면 배우는 이로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다시금 강조하여 일러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사씨(謝良佐(사양좌))는 이 장의 의미를 간파하고 나서 배우는 이들이 그것을 흘려 들어 놓칠 것을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꼼꼼한 해설을 부연하였다.     


“군자는 인(仁)에 뜻을 둔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마음이 인(仁)에 있지 않으면 不仁(불인)이 됨을 면치 못한다.”     


앞서 이 장의 설명을 시작하며 단순한 수학적 논리인 필요충분조건의 응용 버전으로 이 장의 논리는 다소 복잡다단하다고 한 바 있다. 이제 이 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일깨우려 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곱씹어보기로 한다.    

  

공자가 선(善) 한 것과 불선(不善;선(善) 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에 대해서 이 장은 뚜렷하게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착하게 행동하다’의 반대 개념은 ‘나쁘게 행동하다’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착하게 행동하지 않다’ 혹은 조금 더 나아가 ‘착한 행동을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지 않고 방관하다’라는 개념이 착하게 행동하다의 반대 개념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공자의 학문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주목하게 한다.      

위 사 씨가 주석을 한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처럼, 군자는 인(仁)을 목표로 삼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려 노력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런 군자(君子)가 자신의 마음을 인(仁)에 두지 못하는 순간, 그 마음가짐과 행실은 바로 불인(不仁)이라 판정받는 행위가 된다. 인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이미 소인(小人)이라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고 인(仁)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흔들리는 순간이 바로 불인(不仁)이라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공자의 기준에 의하면 인(仁)이 있고, 그 인(仁)을 지향하며 노력하여 실천하지 않는 불인(不仁)이 있으며, 일반인들이 불인(不仁)이라고 생각했던 사리사욕을 지향하며 행동하는 자들은 이미 사람으로 도저히 취급할 수 있는 범위에 해당조차 되지 않는 소인배로 따로 분리수거되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기준은 공자가 절대적인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어 일반인들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저 꼭대기만을 지향하기 때문에 나온 터무니없는 내용이 아니다. 공자는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로 배우고 익히는 자들에게 있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막연한 성인(聖人)의 경지를 강조하기보다는 한 단계 한 단계 배우고 익히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주제를 알지 못하고 단계를 넘어서는 ‘엽등(躐等)’이라는 것을 가장 참람된 행동으로 서슴지 않고 비난했던 것이기도 하다.     


내가 <논어>를 읽고 공자의 가르침을 하나씩 공부해나가면서 알아갔던 공자라는 성현은 자신의 배움을 실천하지 않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거나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만한 짓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은 바 있다. 선(善)을 행하려는 것에 반해, 불선(不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규정하면서, 자신의 사욕을 위해 악(惡)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아예 인간 이하의 소인배로 취급하고 논외로 보되, 선하지 못한 것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 혹은 선을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것은 내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아침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풀이했던 공자의 의도, 그러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올바른 것을 배웠으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육교가 멀리 있다고 하여 무단횡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교통 경찰이 과태료를 바로 부과하겠다고 노려보고 있으면 힘들더라도 육교까지 투덜거리고 걸어 다닐 사람들이 경찰이 없다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차가 달리는 도로를 달려 무단횡단을 한다. 그렇게 무단횡단을 하던 이를 골목에 숨어 있던 교통경찰이 뛰어나와 단속하고 과태료를 부과하며 소위 딱지를 끊으면 정작 단속당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억울하다’, ‘왜 나만!’ 혹은 ‘하필 재수 없게 걸렸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그들이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모를까? 그들이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멀리 있는 육교까지 걸어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하고 경찰에게 걸리지 않는 한, 적당히 어기고 살아도 된다고? 아닐 것이다. 그들도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 한, 그렇게 뻔뻔하게 자식들에게 불법과 위법을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는 자기 자식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배우고 익힐 때의 지식과 현실적인 실천에 있어 해석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해왔다. 그래서 공자가 늘 강조한 것이 아무도 살펴보지 않고 혼자서 있을 때의 행동을 지켜보고 다른 이들이 볼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것만이 진정한 ‘신독(愼獨)’이라며 누누이 강조하였다.      


자신이 행하는 언행이 잘못인지 몰라서 범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무조건 꾸짖지 않았던 것은 몰랐으면 무조건 용서한다는 개념보다는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는 자들의 그릇된 행동에 비해 용서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형법에서 동일한 범죄를 또 저지른 자에 대해서 상습죄나 가중 처벌하는 이유 역시 같은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로 꼽히는 직업은 시대의 변화가 상관없이 법조인, 의사, 교수 등이다. 그런데 경제적 부의 기준으로나 사회적인 지위로 보더라도 해당 직업을 가진 이들의 모럴 해저드로 인한 파국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피의자로 오르내리기 일쑤이다.     

과거 개천표 용으로 불렸던 이들이 소년 급제니 마담뚜로 인해 팔려가는 결혼이니 하는 형태로 신분상승을 하여 이룬 콘체른은 아주 자연스럽게 공부만 열심히 하더라도 부잣집 데릴사위로 팔려가서 부의 완성을 이루면서 법조계, 의료계, 학계 등의 실세(實勢)로 자리를 잡아 이제는 원로급이 되어 그 엄마를 닮아 공부 못하는 자식들을 돈과 권력으로 끌어올려 부와 지위의 대물림을 하는 것에 ‘현대판 음서제’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의 얼굴 두께를 갖추게 되었다.     


그들이 배우지 못하여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정치계로 데뷔하겠다고 선거에 나오거나 청문회장의 대상으로 올라와 공개되는 민낯은 그들이 그저 조용히 사회 지도층으로 누리고 있던 그 혜택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있어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들이었는지를 그들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대놓고 떠든다. “이건 관행이었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로 공격하고 그러느냐!”라고 후안무치한 볼멘소리를 내뱉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식의 좋은 학군을 위해, 자산의 증식을 위해, 위장전입을 하는 것이 부끄럽던 시대에서 어느 사이엔가 모르게 순식간에 위장전입은 기본으로 하고 학위 논문을 표절하는 것은 이제 부끄럽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학계에서 표절로 논문이 철회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버젓이 대학교수라고 청문회장에 올라 장관 임명에 침을 흘리고, 제자의 논문에 지도교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심지어 대학에 들어가지도 않은 자식의 이름을 지도 학생들을 시켜 스펙을 쌓게 하고서도 당당하게 의사라고 학자라고 고개를 쳐들고 환자를 보고 연구자라고 방송에 그 뻔뻔한 얼굴들을 드러낸다.     


공자가 ‘헌문(憲問) 편’에서 가르침을 주는 내용들 중에서도, 덕을 갖추기 위해 군자가 되기 위한 이들이 갖춰야 할 덕목들을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세부적으로 그것을 갖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풀어 설명한 것은 바로 위에 언급했던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자들에게 그 배움을 사리사욕을 쟁취하는 것에 쓰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무엇보다 침묵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에 실리는 무게에 훨씬 더 힘을 싣고 있음에 주목해야만 한다. 잘못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잘못이라 인지하지 못한 이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혹은 자신이 우연히 깨닫고 알게 되었을 때 그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수양을 한 걸음 더 올리게 만든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일상적인 삶의 행동 하나하나가 배움이고 수양의 연속이다. 만약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닌 정말로 인지하지 못했거나 실수였다면,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발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어리고 배우는 과정에 있는 이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얻고 그것을 누리고 있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 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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