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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06. 2022

진정으로 사랑하고 충성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편하고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충성인가?

子曰: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성한다면 가르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장에서는 사랑과 충성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안일함에 죽비를 소리 없이 내려치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강조를 위해 반어의 구조로 되어 있기는 하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수고롭게 해야 하고 충성한다면 상대에게 가르쳐주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단순하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게 만만한 내용도 아니다.     


공자의 이 가르침에 대해 소동파(蘇軾(소식))는 다음과 같이 행간의 의미를 정리하였다.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짐승들의 사랑이요, 충성하기만 하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부인과 내사(내시)들의 충성이니, 사랑하면서도 수고롭게 할 줄 안다면 그 사랑이 깊은 것이요, 충성하면서도 가르쳐줄 줄 안다면 그 충성이 큰 것이다.”     


그저 사랑이라 말하며 상대방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사랑이라고 선을 긋는 설명부터가 소동파식의 파격적 비유를 감지하게 한다. 바꿔 말하면 오직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상대방을 수고롭게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수고롭게 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무언가 일을 시켜 수고롭게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게 수고롭게 만드는 목적이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에 해당하는 목적에 의미를 둘 수도 있다. 진정 사랑하는 이가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수고로움을 자처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수고로움을 통해 그 보함을 깨닫게 하는 이치를 가르쳐주려는 애정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나는 이 부분을 가르칠 때, 아주 단순하게 설명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을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여 그 사람이 귀찮지 않게 불편해하지 않게 움직이지 않고 내가 더 움직이고 내가 더 귀찮아하는 것을 일반적인 사람들은 사랑이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상대가 직접 귀찮게 주방까지 가서 물을 떠 오게 하지 않고 내가 달려가 그 귀찮음을 대신하는 것을 배려이자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농사짓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의 입에 맛있는 쌀이 들어가게 하기 위해 1년 내내 고생하고 농사를 지어 그것으로 밥을 해서 자식에게 먹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하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설명한 배려라고 생각하여 그 수고로움을 자처하고 상대를 위해 하는 행위가 결코 아니라는 반어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상대가 수고로움을 직접 겪도록 내몰아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의미를 이해한 소동파는 왜 주석에서 그런 배려가 짐승들의 배려라고 했을까? 짐승과 사람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동물적인 본능만을 가지고 있는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보면, 새끼를 사랑하는 부모의 입장이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상대를 위해 귀찮거나 위험하거나 번거로운 일을 대신해주는 것을 기본적인 배려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생각건대,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깨달을 힘을 줄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라 본다.     


누구나 편하게 드러누워 다른 사람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직접 몸을 움직여 그것을 가져오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귀찮은 지를 알게 된다. 귀찮고 힘든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상대를 위한 배려를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실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행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고마움을 알까?     


어릴 적 식사를 하다가 밥공기에 밥을 깨끗하게 먹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는 무서운 표정으로 근엄하게 말씀하셨다.     


“그 쌀 한 톨 한 톨이 농부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농부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밥 한 톨이라도 남기고 버릴 수 있겠느냐?”     


고물가를 가로지르는 작금의 시기에도 부모의 카드를 받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끼 밥값을 훌쩍 넘는 음료를 사 마시는 중고생들을 카페에서 어렵지 않게 보곤 한다. 물론 집안마다 사정은 다르겠으나 당장 법정 시급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면서 알바를 하며 가정을 건사해야 하는 그 또래의 친구들을 가까이에서 접해보았거나 자신들이 그런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카드를 휙휙 그어가며 음료를 사 마실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중요시한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그 수고로움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수고로움을 모르는 이에게 그것을 경험하고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지 당장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것이 사랑일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을 강조한 내용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무조건 일부러 고생하게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직접 그 수고로움을 경험하게 하여 그것으로 얻는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서 직접 깨닫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뭐고를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앞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충성에 대한 소동파의 설명을 다시 살펴보자.   


파격적인 비유이기도 하지만, 왜 충성하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을 설명하면서 ‘부인과 내사(내시)들의 충성’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여기서 부인과 내시가 충성하는 대상은 누구던가? 바로 임금이다. 부인이라 함은 일부일처제의 한 명의 부인이 아닌 황제의 사랑을 두고 여인들 간의 암투를 벌이는 바로 그 수많은 부인들을 일컬음이다. 내시 역시 같은 존재로 본연의 임무가 충심을 담아 국정을 논하며 나라를 위해 간언을 올리는 존재가 아닌 말 그대로 황제의 편의를 돕기 위한 수족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들의 태생적인 근본부터 생각하건대, 그들에게 충성은 나라를 위함이 아니다. 황제를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충성이라고 입에 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함이고 자신들이 돋보이며 선택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동파는 그들의 충성이란 진정한 충성이라 말할 수 없음을 극명한 비유로 설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충성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소동파의 설명은 먼저 전제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충성은 나 스스로의 심리적 만족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라는 점이 사랑과 충성이 함께 언급된 중요한 기본 전제이다.      


충성의 기본 전제는 자신이 섬기는 존재이다. 섬기는 존재는 신분적으로 당연히 나보다 상대적으로 높이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행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소동파의 비유처럼 부인이나 환관들은 최대한 그를 거스르지 않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충성이라는 포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진정한 충성이란 그런 사리사욕을 위해 비위만을 맞추며 그가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 실수를 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 일깨워줄 역할을 감히(?)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말하자면 섬기는 이도 사람인지라 잘못을 일러주거나 지적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서 생긴다. 사랑이 그저 상대가 편하게 느끼도록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충성은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그가 거슬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가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보조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이야말로 다스리는 위치에 서게 되면 자신이 하는 행동을 모두 체크할 수 없게 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도 있으며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진정으로 충성하는 이의 간언(諫言)이 필요한 것이다.     


이 장에서 사랑과 충성이 나의 만족을 위함이 아닌 상대의 완성을 위한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같은 성향으로 묶인 이유는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사랑과 충성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상호 보완적인 교감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훌륭한 부모님을 묘사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오히려 인자하면서도 유독 자기 자식에게 엄격하고 자기 자식에게 더 험한 일을 시키고 더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도록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저 드라마의 극적인 묘사가 아닌 공자의 시대에서부터 학습되어온 실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하는 부모의 참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자식의 입장을 경험하고 결혼하고 자기 자식을 낳아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내 자식이 힘든 일을 하고 몸이 상하고 힘겨워 울고 여기저기 부대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부모는 없다. 그래서 앞서 소동파가 파격적으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대개의 일반적인 동물적인 본능을 보이는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뭐라 탓하지 않으며 오냐오냐 애지중지 키운 것을 부모의 사랑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어려움을 모르고 자신이 직접 고생해서 돈을 벌어보지 않은 자식들이 어떤 일을 벌이던가? 부모님이 안 계신 것을 안쓰러워하며 할머니가 없는 살림에 자신의 입에 들어갈 것들까지 참아가며 모은 돈으로 어렵게 키운 손주는 자신에게 넉넉하게 용돈을 주지 않는다며 할머니에게 폭행을 행사하고 존속상해라는 험한 짓까지 벌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부족하지 않게 키우겠다고 어렵게 자수성가하여 자식들을 입히고 먹이고 가르쳤지만 해외유학까지 보내주며 지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삐뚤어진 성향으로 이혼하고 다시 부모에게 돌아와 죽기 전에 더 많은 재산을 자신의 앞으로 해달라면서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납치하듯 끌고 가서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의 손을 움켜쥐며 재산을 양도한다는 문서를 억지로 작성하게 하고 부모고 형제고 상관없다며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행태를 보이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운 것은 결국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부모들이었다.     


대개 자신이 바른 교육을 받아 어렵고 수고롭지만 그 가치를 이해해본 자들이 자식의 교육에도 엄격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르친다. 배워본 사람이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자신이 엄한 부모님에게 그저 압박만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에게는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겠다고 하는 보상심리를 구현하는 덜 성숙한 부모는 결국 자신의 실수를 자식을 통해 기어코 그 험한 꼴을 목도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나름 기개가 있는 검사 흉내를 냈던 이가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고야 말았다. 본래 빨간당의 정치판에 몸을 담고 담금질을 한 경력이 일천한 관계로 그와 빨간당의 연결고리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여론조사의 데이터를 검증해보더라도 여당에 대한 지지도와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정비례하지 않았던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2022 대한민국판 벌거벗은 임금님’ 혹은 ‘대국민 한국어 듣기 평가’로 불리는 지극히 의미 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보더라도 이 장에서 공자가 그리 강조하려 했던 충성은 바로 드러난다. 그 논쟁이 나오자마자 떠들어댔던 대통령실의 말 바꾸기와 그에 연이은 반응들이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며 아예 그런 말이 없었다는 둥 심지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둥의 주변 변죽을 울리는 홍위병 역할의 여당 의원들이 더 나대기 시작하며 새삼스레 그들에게 그나마 비판적이지 않던 이들까지 돌아서며 여당과 대통령에 대한 비호감이 정배열 구도를 갖추기 시작했다.     

카메라 영상에 바로 옆에 있었던 외교부 장관이라는 이가 보였어야 할 충성이란, 자신의 자리를 인사권자가 결정할 문제라고 뻗대는 헛소리를 하기 전에, 진작에 대통령에게 실수한 거라고,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하겠다고 사과하고 일을 바로잡으라는 직언이고 충고였어야만 했다. 그가 해임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 말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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