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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2. 2022

당신은 무엇을 위해 부와 명예를 꿈꾸는가?

부와 명예는 목표가 아니라 도구여야 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가난하면서 원망이 없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이 없기는 쉽다.”     


이 장의 내용은 앞서 ‘학이(學而)편’의 15장에 비슷한 내용으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간략하게 그 내용을 상기해보자면, 子貢(자공)이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그것도 괜찮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함만 못하다.”라고 하여 마치 이 장과 연결되는 내용인 듯 가르침을 먼저 준 바 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遺墨) 중에서도 ‘貧而無諂 富而無驕’가 들어가 있었던 것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안중근 의사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굳이 앞서 학이편의 공자의 가르침을 쓰지 않고 이 장의 내용을 적은 이유는 아마도 ‘貧而樂 富而好禮’의 정신 태도를 자부하며 자처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충실하면서 인간다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함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 장의 내용이 쉬워 보이는 듯 하나 그 의미가 한 번에 확 와닿을만한 일반적인 내용이 아님은 곰곰이 뜯어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두 대구의 문장 중에서도 ‘가난하면서 원망이 없기는 어렵다’는 말은 그럴만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부유하면서 교만이 없기는 쉽다.’라는 내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미묘한(?)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배우는 이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가난에 처하기는 어렵고 富(부)에 처하기는 쉬운 것은 사람들의 떳떳한 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땅히 그 어려운 것을 힘써야 하고, 그 쉬운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짧은 주석은 읽는 순간, 원문의 모호함을 진흙 속에 빠뜨리는 느낌이다. 가난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니?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듯한데, 버젓이 가난에 처하는 것이 어렵고, 부자가 되는 것은 쉽다고 주석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주석을 위한 부연설명을 하자면, 주석에서는 원문의 내용을 모두 쓰지 않고 대구가 되는 원문의 구절을 나누어 설명한 것뿐이다. 즉, 가난에 처하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문에서 공자가 말한 그대로 가난에 처했을 때 원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현실주의자였던 공자의 입장에서 통찰력 있는 관찰을 통해 보았을 때 가난한 사람은 현실적인 우환(憂患)이 피부에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이기 때문에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그런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부정적인 마음을 갖기 때문에 당연히(?) 남에 대한 원망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원망에 이르기까지 원망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부분은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꼬인 부분인 없다.     


문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뒷부분이다. 부자가 교만하지 않는 것이 쉽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의 문장을 해석했을 때와 똑같은 구조로 글자의 뜻을 새길 필요가 있다. 즉, 돈이 많은 사람은 현실적인 스트레스나 압박을 경제적인 이유로 피부에 와닿을 정도의 힘겨움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여유로울 수밖에 없고, 외적으로 여유로워지게 되면 환경이나 현실에 영향을 그만큼 덜 받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안정되도록 수양하여 교만한 기운을 억누르기 쉽다고 설명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진정한 학자가 탄생하기 위해서 3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1대인 할아버지대부터 경제적인 부와 권력에 해당하는 명예까지 아버지인 2대까지 쌓아야만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현실적인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지고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3대에야 비로소 진정한 대학자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는 세간의 설명과 비슷한 설명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허생이 10년 독서를 생각하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공부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그의 아내는 그를 무능한 한량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돈을 벌어오라며 내쫓는다. 70이 넘도록 세월을 낚으며 주군을 기다리고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던 강태공 역시 아내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때를 기다렸고, 결국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아내가 재상이 된 자신에게 조강지처임을 강조하고 나섰을 때 항아리를 깨부수고 그것을 다시 부칠 수 있느냐는 일갈로 그 세속적인 얄팍한 마음을 박살 낸 바 있다.     

허생과 강태공의 경우는 특별한 예외에 해당한다고는 하겠으나 그들은 가난함에도 환경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뜻한 바를 유지할 수 있는 군자급의 인물들이었지만 일반인들은 다르다. 당장 집안에 쌀이 없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돈이 없고 맛있는 외식을 사줄 돈이 없는데 자신만 독야청청할 가장은 극히 드물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연구에만 전념하고 자식이 굶든 학비가 없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되든 하는 나 몰라라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환경적인 요인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으로 경제적인 돈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이 장은 단순히 돈에 대한 것이 아닌 외부적인 환경요인이 개인의 심성수양에 있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 그것에 휘둘리는가에 대한 화두를 전제로 삼고 있다.     


좋아하는 여인이 생겨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자가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늉만 한다고 해서 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돈이 없어 당장 신경 쓸 것이 많은 상황,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사랑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에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가 되고 수양이 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렇다면 ‘학이(學而) 편’의 가르침에 이어 이 장에서 공자가 일깨워주려는 가르침이 환경과 인간의 평정심 유지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끄집어낸 것일까? 전제와 구조는 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공자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음을 이 장까지 ‘제대로’ 공부해온 사람이라면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콕 찔러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대구의 구절 뒷문장에 있다. 부자들은 환경적으로 신경 쓸 것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쉬운 교만함을 없애는 공부를 완성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비판하고자 한 의도이다. 조금 복잡해졌나? 대구가 되는 앞 문장에서 원망이 쌓인다는 말은 당연한 상황인 듯 하니만 실제로 그 원망이 향하는 대상은 바로 뒤의 부자에게 있다. 가난한 사람의 원망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자에게서 오는 자격지심과 자괴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굳이 멋진 외국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같은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부(富)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동양고전에서 군자를 말할 때의 경지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은 잃는데 나만 없는다고 화를 내는 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내 배가 부르면 다른 사람들도 배가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며 부자가 된 이들은 이미 가난한 자들과 자신이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환경이라고 인지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가난이라는 바이러스를 가진 자가 새롭게 자신들의 세계로 침투(?)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특히,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몇 차례 겪으며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을 뿐이다.     

어제 메인 뉴스들은 하나같이, 전 세계적인 인플레와 경제위기 속에서 아시아발 경제 폭락의 위기에 대한 심각한 경고 사인을 헤드라인 뉴스로 다루었다.     


‘학이(學而) 편’에서 운을 띄운 것을 시작으로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순히 개인의 수양이나 환경적인 요인이 개인의 수양에 미치는 영향 정도를 언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본능적인 요소를 전제로 삼되 사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더 배우고 더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서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많은 현실을 호되게 비판하는 것이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배운 자들도 제법 적지 않지만, 공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무언가를 배우고 익힌 자들이라면 가난하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배우고 익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자들은 단순히 직접적인 먹고사는 재주, 예컨대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먹고사는 재주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대다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우위에 서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부와 명예를 쌓아갔고, 중세 봉건제는 그것을 혈족계승으로 이어나갔다. 


물론 사회가 발전하면서 신분이 낮지만 부를 쟁취하여 권력층으로 침투하는 이들도 제법 늘어갔고, 춘추전국시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무력의 시대로 힘만 가지고 있으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은 다른가?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고 수정자본주의니 개방공산주의로 보완하네뭐네 하지만 결국 독재자들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우익화되어가는 작금의 사태를 본다면 봉건 자본주이의가 가지고 있던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는 오히려 소략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여길 정도이다.     

한참 국정감사기간이라고 하는 10월임에도 한국은 빨간당은 물론이고 파란당마저 현재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환경적인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민생고(民生苦)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한 말로 알려진 ‘가난해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저 유명한 말은, 불어로는 “Qu’ils mangent de la brioche!(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게 하라고 해!)로 본래의 의미도 다르지만 그 본래의 워딩조차도 실제로 그녀가 입 밖에 꺼냈다는 기록조차 찾을 수 없는 가짜뉴스였다. 누가 그 말을 만들어냈는지는 그녀의 최후와 이후 프랑스의 사회적 변화의 결과물을 고려하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공자가 우려했던 일반인들의 동물적 본능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이라 지적했던 것은 상대적 빈곤감이나 자격지심에서 오는 질시나 폭력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이 장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똑같은 본능을 가진 인간이면서도 자신이 보다 나은 환경에 처한 이들이 자신이 더 많이 갖게 된 것에 대해 교만하지 않는 평정심을 배움과 수양을 통해 이뤄내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갖지 못한 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이나 열등감에서 오는 분노와 질시를 배움과 수양을 통해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어 마음이 여유로울 수 있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분노와 질시를 원천적으로 희석시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아주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 태생적으로 태어나니 귀족이고 왕족이어서 그것을 누리는 금수저들은 존재했다. 태어나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하고 당장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써야만 했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야 하는 흙수저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더 많이 배우고 그러한 이유로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 이들은 태생적으로 누리는 금수저에게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흙수저들이 힘겹지 않게 목숨까지 걸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조언과 조력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위정자의 비위에 맞춰 자신의 부와 명예를 높이는 것에 활용하는데 전념했고, 그런 자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혼탁해질 수밖에 없었다. 태생적인 금수저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이른바 배운 자들이 자신이 배운대로 행하지 않는 모순과 역설에서 사회적 부조리가 일어난다는 것이 공자가 생각한 가장 큰 문제였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들이 더 갖지 못함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풍족하지 못하고 결여에서 오는 원망을 나라를 경영하는 이들에게 쏟아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현상으로 보았다.      

모두 내가 더 노력해서 모은 부(富)이고, 어렵게 얻어낸 명예와 권력인데 그것을 왜 사회에 환원해야하는지 혹은 사회적 약자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본능의 손톱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노력해서 얻었다는 것이 정말로 그만의 노력이었는지, 지저분하고 가난하다며 깔보는 국민들에게 갈취한 표로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이 교만함을 거두지 못하는 꼴을 보는 것은 정말로 곤욕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당신은, 국회의원이 아니니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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