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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1. 2022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평가되고 싶은가?

자신에 대한 평가는 결국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 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혹자가 子産의 인품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은혜로운 사람이다.” 子西를 묻자,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여, 저 사람이여.” 管仲을 묻자, 대답하셨다. “이 사람은 伯氏의 騈邑 3백 戶를 빼앗았는데, 伯氏는 〈이 때문에〉 거친 밥을 먹었으나 평생을 마치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이 장에서는 앞에서 등장했던 정(鄭) 나라의 재상이었던 자산(子産)과 자서(子西), 그리고 관중(管仲)까지 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누군가 공자에게 묻고 공자가 그 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한 내용이다. 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똑같은 기준으로 설명한 것도 아니고 말하는 방식 또한 완전히 다르지만 그 대답하는 방식을 통해 왜 그렇게 대답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 행간의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해야만 이 장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자산(子産)에 대해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대답을 주자가 뭐라고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산(子産)의 정사가 寬厚(관후)함에 오로지 하지만은 않았으나,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위주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니, 그 중한 것을 들어 말하신 것이다.      


자산(子産)이라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단 한 가지를 꼽아 평가한다면 백성들에게 은혜로움을 베푼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리 말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그 중한 것을 들어 말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체를 읽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추릴 수 없는 것을 완곡하게 강조한 말이다. 어느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그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의 가장 훌륭한 점을 한 마디로 집약하여 설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장을 공부하면서 자산(子産)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자산은 법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엄격한 성문화 된 형법을 제정한 인물이었고 혁신적이면서도 백성들에게 유익한 정치를 하여 정나라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힘없는 약소국이던 조국 정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명확한 목표 지향점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진정한 위정자로서의 삶을 완성시켰다고 공자가 평가했던 그가 죽었을 때 공자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던 것이다.     

초나라 평왕


두 번째 인물인 자서(子西)에 대해서는 답변이 묘하다.

“저 사람이여, 저 사람이여.”     


이것이 칭찬인 것인지 비판을 한 것인지에 대해 그 배경이나 방식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소 모호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묘한 평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자서(子西)는 초(楚) 나라 公子(공자)인 申(신)인데, 초나라를 사양하고 소왕(昭王)을 세워서 정치를 개혁하고 기강을 세웠으므로, 또한 어진 대부이다. 그러나 왕을 참칭하는 칭호를 고치지 못하였고, 또 소왕(昭王)이 孔子를 등용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그 후에 마침내 백공(白公)을 불러들여 화란을 초래하였으니, 그렇다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彼哉(피재)’는 그를 외면하신 말씀이다.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결론적으로 그 모호한 표현은 그를 외면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외면했다’라는 것은 그를 무시했다거나 그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는 표현이 아님을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정확한 ‘외면했다’의 의미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를 유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 또 오독을 하려는 이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소왕(昭王)이 孔子를 등용하려던 것을 저지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산 것이 아니냐고 호도할 수도 있겠으나 주자의 해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 문장에서는 그에 대해 ‘어진 대부’였다고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하였고 뒤에 아쉽고 부족했던 면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끝에 결국 백공(白公)을 불러들여 화란을 초래하였다고 결론지어 앞에 가산점을 받은 것만큼이나 뒤에 까먹은 부분이 많음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그 아쉬움을 담아 뭐라 평하지 않는 방식의 모호한 평가를 보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다시 난을 일으켜 헛된 죽음을 맞고야 말았기에 후대 역사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마지막 인물인 관중(管仲)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은 관중과 백 씨(伯氏)의 일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평가하되, 일반인들이 보기에 가혹한 듯 처분에도 상대가 평생토록 원망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한다. 중요한 것은 백 씨(伯氏)가 대단하다고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닌 왜 그가 그렇게 원망하지 않았는지 그렇게 생각하게끔 처리했던 관중(管仲)에 대해 허여(인정)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관중의 초상화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자세한 전모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상세한 설명을 부연한다.     


‘人也(인야)’는 이 사람이란 말과 같다. 伯氏(백 씨)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騈邑(병읍)은 지명이다. ‘齒(치)’는 ‘연치(나이)’이다. 환공이 백 씨의 병읍을 빼앗아 管仲(관중)에게 주니, 백 씨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고 관중의 功(공)에 심복하였다. 그러므로 곤궁하게 몸을 마쳤으나 원망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荀卿(순경)의 이른바 “그(관중)에게 書社(서사) 3백 호를 줌에 부자들이 감히 항거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이 일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분명히 管仲(관중)에 대한 설명인데, 아무리 주석을 살펴보더라도 자신의 부족한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管仲(관중)의 功(공)에 심복한 백 씨(伯氏)의 행동이 오히려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처럼 느껴진다. 다소 주자의 서술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주석의 방점은 ‘管仲(관중)의 功(공)에 심복한’에 있다. 원문에서 백 씨가 빼앗겼다는 ‘병읍 300호’라는 말의 의미는 이른바 당시 국가가 공신에게 내려서 그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했던 고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월급을 삭감해버리되 그 월급을 공이 더 큰 관중에게 주었다는 말이다.     

 

관중의 초상화

공자의 설명방식은, 백 씨(伯氏)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도 훌륭한 일이라는 점은 표면에 둔 채 그렇게 훌륭한 자기반성의 태도를 보인 백 씨(伯氏)가 자신의 월급을 모두 보상으로 받게 된 管仲(관중)에게 원한을 갖지 않았던 이유는 행간의 저 깊이 감춰져 있기는 하나 백 씨(伯氏)가 판단했을 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받아갈 만한 공(功)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 인정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중(管仲)의 공(功)’이란 다른 대단한 공이 있어 백 씨(伯氏)가 인정했다는 내용이 아니다. 백 씨(伯氏)가 인정한 부분은 자신이 본래 받았던 ‘병읍 300호’에 대해 자신이 받아서 운용할 때에 비해 관중(管仲)이 포상으로 받아 그 병읍의 수입을 운용하는 방식이 훨씬 더 공정함을 확인하고 그의 사람됨에 탄복했다는 의미이다.     

이래서 고문(古文)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자신이 빼앗긴 전재산을 어느 누군가가 보상으로 받아 차지하게 되면 당연히 원한을 살 수 있는데, 자신이 그 재산을 모두 빼앗긴 것에 대해서 먼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죄과를 인정하는 것도 군자의 모습일진대, 그런 군자의 자질을 갖춘 이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보상으로 받은 이에 대해서 살펴보고 파악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이 재산을 모두 빼앗겨 가난하게 지내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전혀 원망함이 없었다는 설명은, 그야말로 최종적으로 관중(管仲)에 대한 삼단논법식의 최상의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주석에서 주자는 가상의 질문을 통해 공자가 판단을 유보한 자서(子西)를 제외한 관중(管仲)과 자산(子産)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혹자가 “관중(管仲)과 자산(子産)이 누가 나은가?” 하고 묻자, 내(주자)가 말하였다. “관중의 덕은 그 재주를 이기지 못하였고, 자산의 재주는 그 덕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인의 학문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들은 것이 없었다.”     


둘을 덕과 재주라는 동일 기준의 덕목을 가지고서 비교 평가한 것이다. 관중(管仲)은 재주보다는 덕이 더 앞선 인물이라 보았고, 자산(子産)은 그 덕이 재주보다 더 많지 못했다는 분석인데, 마지막 문장에서 그들 모두가 궁극적인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익혀 실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말한다. 그들이 평생을 인정받았던 덕이나 재주보다 성인의 학문을 제대로 익히고 실천했다면 더 궁극의 군자다움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저 너머의 지향점을 배우는 이들에게 다시금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관중(管仲)은 일반인들에게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다양한데, 공자의 평가도 긍정일관도만은 아님을 <논어>의 문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과 뒤에 이어지는 17장과 18장, 그리고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치사(致思)’편 등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보이는 듯 하지만, 앞서 공부했던 ‘팔일(八佾) 편’의 22장에서나 <사기(史記)>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사마천이 내리는 평가를 살펴보면, 상당히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정치를 하는 인물들의 입에서 ‘나에 평가는 후대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한다. 현대에 접어들면서 나온 말이 아닌, 공자의 시대부터 있어온 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유명한 관중(管仲)에 대해서마저도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면, 누군가의 삶을 플러스 마이너스로 감안하여 한 마디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처음 시작은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었지만 차츰 보완하고 더 발전해나가면서 완성하고 자신의 삶을 인정받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되었지만 이후 자신의 사욕으로 인해 실수하고 삐뚤어진 행보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왔던 명성과 평가에 먹칠을 하고 추락하고 마는 인생도 있다. 훌륭한 업적을 이뤄냈다고 하는 이들일수록 오히려 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추락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지고 추락할 수 있는 유혹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명예가 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아무것도 없던 위치에서 부(富)를 더 움켜쥐게 되면 더 많이 갖게 될수록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큰 것을 바라게 되고 더 높은 것을 바라게 된다. 부와 명예가 나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목표가 되는 순간, 공자가 그렇게 경계하고 혐오에 마지않던 사리사욕(私利私慾)이라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학을 들어가고 사회를 보는 눈을 갖게 되면서 군부독재에 항거했던 젊은 대학생 투사들은 그 당시에 분명히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화염병을 들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거리에 나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진정으로 잘못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 중에서 웃으며 당당하게 감옥생활을 했던 이들 중에서 모두가 정치계로 투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한 아이의 아빠, 엄마가 되어 사회에 녹아들어 자신들의 젊은 시절 피와 땀이 바꾼 세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있을 것이다.     


오히려 대학 총학회장 출신이라며 그것을 훈장처럼 정치계로 나서는 디딤돌로 만들어버린 386들은 그렇게 만든 새로운 시대를 자신들의 사리사욕으로 채우는 것에 몰입하여, 빨간당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사리사욕을 누리려는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직을 누리게 되는 국회의원은 역사가 그들을 기억할 정도의 행보를 보이지도 못한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 중에서 지저분한 민낯을 보이고 끝까지 역사가와 사회학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로 기억되는 인물은 거의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은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수준이다.     


정치인들 중에서 후대 역사의 평가까지 고려하면서 자신의 행보에 조심스럽게 제대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늘 점검하는 자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현재의 자기 위치를 통해 더 올라갈 수는 없는지, 낙선해도 도지사나 장관직으로 어떻게든 그쪽 언저리에 기생할 수 없는지만 전전긍긍하며 고민한다. 그런데, 법조인은 다른가? 학자는 다른가? 당신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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