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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7. 2022

어떻게 할지 확인하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는단다.

자신을 지켜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에게,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孔子께서 公叔文子의 인품을 公明賈에게 물으셨다. “참으로 夫子께서는 말씀하지 않고 웃지 않고 취하지 않으시는가?” 公明賈가 대답하였다. “말한 자가 지나쳤습니다. 夫子께서는 때에 맞은 뒤에야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운 뒤에야 웃으시므로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義에 맞은 뒤에야 취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할까? 어찌 그렇겠는가.”

이 장에서는 공자가 衛(위) 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의 언행에 대해 공명가(公明賈)라는 사람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숙문자(公叔文子)는 바로 뒤의 19장에 서도 등장하는 인물이자, <논어>에서 ‘공문자(公文子)’라는 이름으로 몇 번씩이나 언급되는 인물로 문(文)은 그의 시호이다. 


한편, 공명가(公明賈)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고증할만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그들의 신분과 이름 말고는 인품이 어떠했는지를 묻는 방식이 아닌, 구체적인 방식으로 어디선가 들은 내용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묻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주자가 이 질문에 대해 해설한 주석을 통해 왜 이와 같은 방식의 설명이 나왔는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공숙문자는 위나라 대부 公孫枝(공손지)이다. 公明(공명)은 성이고 賈(가)는 이름이니, 역시 위나라 사람이다. 문자의 사람됨은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반드시 청렴하고 조용한 선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이 세 가지로써 칭찬한 것이다.

정작 공자는 위나라에 갔을 때 공숙문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주변 인물들이 그에 대해서 평하는 말을 듣고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다시 한번 공명가(公明賈)라는 인물에게 물어 확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말투의 뉘앙스에서도 묻어나지만 대개 주변에서 들은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확인하는 과정은 그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했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지, 자신이 들었던 약간 과장된 듯한 군자로서의 경지에 이른 듯한 내용을 언급하며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내용을 반증하듯이 공명가(公明賈)는 그 말을 처음 전한 이가 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오히려 훨씬 더 허풍의 정도가 강해져 더 높은 경지의 군자가 보이는 인격으로 포장하여 그를 설명한다. 

“맞은 뒤에야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운 뒤에야 웃으시므로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義에 맞은 뒤에야 취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바로 의구심의 말로 묘하게 그 대화를 갈무리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여 이 묘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배우는 자들을 도와준다. 


‘厭(염)’은 많은 것을 괴로워하여 싫어하는 말이다. 일이 그 可(가)함에 맞으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아 이러한 것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칭찬함이 혹 지나쳐서 ‘말하지 않고 웃지 않고 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공명가의〉 이 말은 예의가 마음속에 충만하여 때에 알맞게 조처함을 얻는 자가 아니면 능할 수 없으니, 문자가 비록 어질었으나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다만 군자는 남의 善(선)을 허여(인정)해 주고, 그 아님을 바로 말씀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러할까? 어찌 그렇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의심한 것이다.


공자가 위나라 사람들이 공숙문자(公叔文子)를 숭앙하는 듯한 평가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은 만나보지도 못했던 그 나라 대부(大夫)를 폄하하는 마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고 보인다. 다만, 그를 높이 숭앙하는 듯 평가하는 용어 자체가 군자가 취해야 할 높은 경지였으므로 실제로 그런 인물이라면 당연히 한번 만나보고 교류하며 그 사실을 확인하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물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미 천하를 주유하며 얻은 공자의 경험과 스킬로 볼 때, 그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그 나라의 대부(大夫)가 어느 정도 레벨인지를 가늠하기에는 충분한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평가하는 이들의 생각과 어떻게 그런 평가가 나왔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것인데, 더한 과장으로 포장한 공명가(公明賈)의 말에 비판하거나 폄하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의구심의 물음표만을 남기는 것으로 정리한다.

공자가 끝에 보였던 모호한 듯한 언급의 글을, 1778년 和順 東林寺에서 읽던 18세의 다산(茶山;정약용)은, 공자가 앞서 들은 말의 불합리성을 깨닫고 그런 말을 했다고 여겼다. 37년 후, 그는 다른 학자의 이설 속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해석을 발견하고는 기뻐서 그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다산(茶山)이 보았던 불합리성이라 함은, 공명가(公明賈)가 대답을 하면서 꺼낸 말과 뒤에 한 허풍이 가득한 포장성 말이 앞뒤가 안 맞는 표면적인 논리구조이기도 하지만 공자가 먼저 들었다고 했던 세 가지 경지가 그리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장은 단순히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에 대한 폄하나 그 정도 능력도 되지 않는 인물을 과대 포장하고 허풍으로 허상을 만들어낸 이들을 비난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숭앙하듯이 나왔던 그 세 가지 덕목은 객관적으로는 완전무결하다고 할 군자의 목표 지향점이기에 그 부분을 역으로 강조하고 그 경지가 쉽게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배치한 것이다.


분명히, 때에 맞춰 말하는 ‘時言’, 진정 즐거워 웃는 ‘樂笑’, 도의에 맞는 재물만 취하는 ‘義取’는 하루아침에 완성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렇게 어렵기만 한 일인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가장 큰 키워드가 이 글 속에는 담겨 있다. 이 장의 글에서 동일한 구조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맥점을 찬찬히 살펴보면 ‘然後(그러고 난 후)’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설명하자면, ‘然後(그러고 난 후)’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순서나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뉘앙스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의 태도, 가치관, 기준이 무엇인가를 조용히 관조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과정을 강조한 내용이 담겨 있다.


때에 맞춰 말하기(時言) 위해서는 먼저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에 급급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 핵심을 파악해내야 하고 상대방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정까지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내야 한다. 즉,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닌 상대방을 설득은 물론이고 일방향적인 말하기라고 착각할 수 있는 설명조차도 결국 상대의 이해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지 내가 준비한 것을 그저 쏟아내고 내뱉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만 한다.


진정 즐거워 웃는다는 행위(樂笑)는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공감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며 썩소를 짓는 것과 정말로 즐거워 함께 박장대소하며 기쁨을 나누는 것은 훈련되지 않은 이가 보더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말로 무언가를 즐기며 웃는다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과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공감능력이다. 


기쁨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모든 감정에 그 원칙은 적용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 공감의 표현을 원만하게 꺼내놓지 못하는 순간, 오해가 생기고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관계가 껄그러워지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님에도 함께 좋아하는 것을 찾아간다거나 내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은 그저 상대를 위한 배려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수양은 바로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 주파수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에 동참하려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은 결국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수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도의에 맞는 재물만 취한다는 행위(義取)는, 앞선 두 가지의 종합적인 실천 버전이다. 내 주장을 언제 해야 할지 파악하고 그것을 수양을 통해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읽어 내 주장만을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먼저 공감해주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읽어낸 뒤에는 그를 설득하거나 그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그가 즐기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목표와 방향성은 지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도의에 맞는 것‘만’ 취한다는 행위이다. 이것은 행동과 가치관의 기준을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목적 없는 행위는 없다. 그런다면 그 목적된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것은 결국 그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정해진 기준에 한정되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앞선 두 가지 행위를 통해 수양된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지향해야 할 바를 도의(道義)에 두어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결코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의(義)’라고 적고 도의(道義)라 해석하였지만, 재물을 취함에 있어 도의에 맞게 재물을 취한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게 들릴 여지도 있다. 재물을 취하는 것 자체가 사리사욕을 위해 자신의 것을 챙긴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데, 굳이 그것을 도의에 맞게 취한다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충분히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의(義)’라는 것을 도의(道義)라고 해석하긴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땅한 것’이라고 범위를 넓혀 해석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울 듯하다. 즉, 무언가를 받거나 쟁취하는 행위는 정치행위 중에서도 일반적인 것이다. 예컨대 불의나 부정을 취한 이들을 정복함에 있어 군사를 일으키더라도 대의명분이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내가 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상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시 말해, 내가 무언가를 취함에 있어 마땅한 근거에 의거하지 않으면서 챙기는 것이야말로 불의(不義)이고 부정(不正)이라는 설명이다. 하물며 대놓고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겠다고 그것을 위해 목적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경우는 사람 이하의 경우도 아예 언급조차도 하지 않은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 대통령을 뽑는 선거유세를 하며 한 후보가 빨간당의 후보를 저격하며, ‘그를 뽑으면 1년만 지나서 그를 뽑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강한 비판을 던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후보직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비판에 마지않았던 이와 손을 잡고 파란당의 정권연장을 막는데 뜻을 함께 한다고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렇게 한때 대통령직에 도전했다는 그는 빨간당의 국회의원이 되었고 지금 그 존재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고 혼자서만 정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그가 어린(젊다고 하기엔 너무도 젊었기에) 나이에 의대 교수로 그냥 있지 않고 자신의 뜻한 바가 있어 한국산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선한 영향력이 있는 벤처의 신화중 하나로 인정했었다. 그가 평범한 의대 교수가 아닌 백신 개발 회사의 벤처 CEO로서의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치권에 출사표를 내면서부터 그가 좋은 평가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사그라들어갔던 이가 그가 처음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반면교사가 있었음에도 유사한 인물들이 계속 나오는 것은 그들이 머리가 안 좋고 덜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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