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18. 2022

모범은 되지 못할지언정 비난받을 짓은 하지 말거라.

늘 변명거리는 있겠으나 정답은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臧武仲이 防邑을 가지고 魯나라에게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하나 나는 믿지 않노라.”     

이 장에서는 앞의 13장에서 지혜로운 인물이라며 언급되어 등장했던 장무중(臧武仲)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역시 방식은 그가 과거에 했던 역사적 사실관계를 그대로 언급하되, 마지막에 공자의 의견을 한 줄 넣는 방식이다.    

 

이 장의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왜 당시에 장무중(臧武仲)이 저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좌전(左傳)> 양공 23년 조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해는 공자가 태어난 이듬해였기에 공자가 실제로 그 일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공부하고 그 내용을 상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무중(臧武仲)은 노나라의 대부였던 인물로 당대 실권자였던 맹손씨와 계손씨의 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되어 결국 주(邾) 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처음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계손씨에게 맹손씨가 이간질을 하게 되면서 계손씨가 그를 되려 공격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망명을 하게 되면서 그가 다스리던 땅은 다시 국가에 환수되었고 후사가 끊겨 사당의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무중(臧武仲)은 이후 주(邾)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자신의 영지였던 방읍을 점령하고 만약 후사를 세워주면 자신의 방읍을 헌상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양공의 조정에 협박 아닌 협박을 하게 된다.       

제나라에 세워진 장무중의 유지

그의 협박에 가까운 요구에 대해 노나라에서는 반란에 대한 부담도 있었고, 그 선대(先代)의 공로를 인정해주자는 견해도 있었기에 결국, 그의 이복형인 장위를 후사로 세우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이 되었고 장무중(臧武仲)은 다시 달아나 목숨을 도모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그 상황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防(방)은 지명이니, 장무중이 봉해진 고을이다. ‘要(요)’는 믿는 것이 있어 요구하는 것이다. 장무중이 죄를 얻고 邾(주)나라로 달아났는데, 주나라에서 防邑(방읍)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후계자를 세워주면 방읍에서 떠나겠다고 청하게 하여, 만일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장차 방읍을 점거하여 배반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임금에게 강요한 것이다.     


여기서 공자가 장무중이 범한 가장 큰 결례이자 실수라고 본 부분은 바로 어떤 상황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감히 군주를 협박하는 언행을 보였다는 자체만으로 국가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원칙을 깨뜨렸다는 것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후 역사적인 사실을 비추어보면 자신을 지지해주던 계손씨를 맹손씨가 이간질하여 누명을 썼다고는 하지만 공자는 그 억울한 사연을 감안하더라도 감히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군주를 협박했던 행위를 보인 그의 처사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엄중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운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뜻을 읽은 범씨(范祖禹(범조우))는 공자가 왜 그렇게 엄격하게 장무중의 잘못을 꾸짖고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無君(무군, 임금을 무시)의 행위이니, 죄 가운데 큰 것이다. 장무중의 封邑(봉읍)은 임금에게서 받은 것이니, 죄를 얻고 외국으로 달아났으면 후계자를 세우는 일은 임금에게 달려있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방읍을 점거하여 요청하였으니, 이는 지혜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이다.”     


이 주석의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면, 앞서 세간에서나 공자나 그의 지혜로움에 대해서는 인정한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합 평점에서 훌륭한 인물로 추앙받을 수 없는 결정적인 결점으로 이 일화를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서적을 통해 공부했던 양씨(楊時(양시))는 억울한 일을 당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며 장무중의 입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한다고 이해할 배우는 이들을 위해 공자가 어떤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그 행위를 비판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장무중이 말을 겸손히 하여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청하였으니, 그 자취는 임금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나 그의 뜻은 실로 강요한 것이다. 夫子(부자)의 말씀은 또한 《春秋(춘추)》의 ‘뜻을 주벌하는 법’이시다.”     

완곡하게 그 형식을 취하여 군주를 협박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실상 내용은 협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설명을 강조한다. 굳이 <춘추(春秋)>까지 언급하며 공자가 말한 ‘뜻을 주벌한다’라는 의미를 역설한 것은 행간의 의미를 배우는 자들이 놓치지 말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이 장을 그저 고리타분한 군주에 대한 신하의 예의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해한 이들에게는 공자의 깊은 의도가 안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의 핵심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군주에게 감히 협박성 딜을 시도하는 따위의 행위는 전통 유가(儒家)에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같은 것이 아니다.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앞에서 장무중(臧武仲)에 대한 ‘지혜로운 인물이었다’라는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에 대한 평가이다. 그 사실을 전제에 두고서 마지막 주석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적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그가 얼마나 억울한 상황이었는지, 그렇게 조국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사당을 유지하지도 못할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먼저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분명히 마지막 주석에서는 그러한 상황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공자가 왜 그를 용납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뜻을 주벌한다’라 설명하였다.     

‘뜻을 주벌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군주에게 대들었다는 ‘불손한 의도’를 의미하는 것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봉읍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살피라는 것이 공자가 말하려는 궁극적인 가르침임을 마지막 주석에서는 완곡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초급자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해주자면, 장무중(臧武仲)의 행위가 결국 지극히 ‘사적(私的)인 목적’이라는 것이 공자에게 비난을 받은 이유라는 말이다. 어리석은 군주든 다른 실권자들에게 휘둘려 힘이 없는 군주든 군주에 대해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은 당연한 신하로서의 의무이다. 


주석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봉읍(封邑)’이란 그 군주에게 하사 받은 땅이고 권리이다. 설사 권력투쟁의 희생자로 그렇게 하사 받았던 봉읍을 빼앗기고 자신이 소유했던 자산이 모두 날아가버리고 부와 명예가 한 줌 흙이 되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겠다며 딜을 하는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공적(公的)인 부분에 해당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이 공자의 입장이고 불변의 기준인 것임을 마지막 주석은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장무중(臧武仲)은 사당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후사를 지정해달라고 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공자가 볼 때, 그가 벌인 행동은 협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언행이었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그 행위의 목적이 자신의 사욕(私慾)을 위한 것이라는 근거를 명확히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망명’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도모하겠다고 하였다. ‘망명’은 조국을 등지는 행위이다. 나중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을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조국을 버린 것은 명백한 그의 판단인 셈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가피하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망명을 결정해놓고 다시 잠시 돌아와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사당의 유지를 위해 후사를 정해달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하는 것이 군주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완곡하게 아뢰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는 판단인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당시, 세간에 지혜로움의 대명사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어리석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자라면 아예 근본부터 썩어 있고 사리사욕만을 취하려는 것이 빤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으나 나름 세간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았던 장무중(臧武仲)이 그런 언행을 보인 것은 공자의 눈에는 다른 이들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줄 전례가 될 수 있다고 여겼을 확률이 매우 크다.     


억울한 일을 당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굳이 정치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비일비재하다. 언젠가 억울한 일을 당해 힘겨워하는 이의 넋두리에 대고 옆에 있던 이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서 무식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다 얻어터지고 자백이라는 것을 하고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는 장면을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어이가 없었다.     

물론 행복이 그러하듯이 불행도 상대적이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제대로 마실 깨끗한 우물조차 없는 아프리카 오지의 삶을 보여주며 기부를 해서 생명을 살려달라고 하는 광고를 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기부를 유도하려는 광고를 좋게 보지 않는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돈이 없어 급식을 편하게 먹지 못하는 결식아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아프리카 난민들을 위해 돈을 보태달라고 하고, 한국의 결식아동들을 돌보는 일조차 완성하지 못하고서는 비행기를 타고 굳이 오지에 가서 그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사진을 찍어오는 배우들과 셀렙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별로 곱게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기부를 하는 업체들이 그 기부액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투명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제 배를 불리려다가 형사처벌을 받은 사례들을 워낙 많이 봐왔던 터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직접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되, 어떻게 흘러들어 가는지도 모르는 기부행위를 하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기부단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떨떠름한 마음은 직접 현장에서 기부하고 봉사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단무지성 고집(?)을 내세우는 편이다.     


왜 자신보다 못하는 이들을 보며 내가 가진 것에 행복해야 한다는 걸까? 굳이 내가 가진 것보다 못 가진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을 보며 내가 측은지심을 갖는 것이 어쩌면 그 측은지심 이전에 본능적으로 나는 그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감사하고 상대적 만족감을 가지며 지내라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 공부한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그 의문에 시원한 답을 내리고 있다. 일반인도 아닌 나름 지혜롭다는 평가까지 받은 인물이 하는 행동이라면 어쭙잖은 효(孝)를 내세우며 사당을 유지하기 위해 봉읍을 지킬 후사를 지정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그 행위는 효(孝)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사욕(私慾)일 수 있다는 권계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억울할 수 있다.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목숨이 위협받을 상황까지 놓여 조국을 떠나 망명하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시 잠깐 들어와 군주에게 받은 봉읍을 빼앗지 말라고, 그것을 유지하게 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공자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중국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최근 몇 년간의 사실만으로도 아주 잘 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들의 것을 빼앗기지 않고 더 불리기 위해 얼마나 악착같은 짓거리를 했는지, 그리고 그 부와 명예를 머리 나쁘고 노력하지 않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어지게 해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가 자신의 대에서 끊기지 않게 하고 대대손손 배를 떵떵 두드리며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부정들을 적당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이어나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민주화 열풍이 대학생은 고사하고 전 국민들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던져줬을 때도 친일파 할아버지의 부와 명예를 누리며 대대로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던 빨간당쪽 이들은 그렇다손 치자. 이 장에서 공자가 한탄하는 것은 그런 아예 빌어먹을 개념 없는 자들이 아니었다. 지혜롭다고 인정받았던 장무중(臧武仲)과 같이 나름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젊은 날을 불태우고 정의를 위해 목이 찢어져라 외쳤던 운동권출신의 인사들이 정치권에서 활약(?)하며 그들이 벌이는 그 추잡한 부와 명예를 유지하려는 작태와 계승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빨간당에서 으르렁거리며 니들이 더 나쁘다는 손가락질을 피할 재간이 없어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당신은 부러워할 것인가? 반면교사로 삼을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어떻게 할지 확인하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는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