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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4. 2022

진정한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한가?

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모르는 이들에게.

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冉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 曰: "今之成人者, 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子路가 成人(완성된 사람)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臧武仲의 지혜와 孟公綽의 탐욕하지 않음과 卞莊子의 용맹과 冉求의 才藝에 禮樂으로 문채를 낸다면 이 또한 成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씀하셨다. “지금의 成人은 어찌 굳이 그러할 것이 있겠는가. 利를 보고 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成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군자(君子)나 인자(仁者)가 아닌 성인(成人)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읽다가, 공자로 대표되는 ‘성인(聖人)’과 헷갈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하여 원문의 한자 뒤에 ‘완성된 사람’이라는 사족을 달았다.  

    

‘완성된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으로서 완전무결한 경지에 오른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어렵지만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해나가야 한다는 목표 지향점으로서의 의미를 담아 자로(子路)가 우직하게(?) 물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공자는 바로 앞장에서 등장했던 맹공작을 포함하여 네 사람을 언급하며 그들이 가진 장점을 설명한다. 굳이 네 사람을 등장시켜 구체적인 그들이 칭송받았던 덕목을 제시한 것은 실제로 그것을 구현한 인물이 있었음을 통해 현실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구체적인 모델을 통해 어떻게 그 덕목을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방법론까지 제시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공자의 의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成人(성인)’은 全人(전인)이라는 말과 같다. 臧武仲(장무중)은 노나라의 대부이니, 이름이 紇(흘)이다. 卞莊子(변장자)는 노나라 卞邑(변읍)의 대부이다. 이 네 사람의 장점을 겸하면 지혜가 이치를 연구할 수 있고 청렴이 마음을 수양할 수 있고 용맹이 힘써 행할 수 있고 才藝(재예)가 두루 응용할 수 있는데, 또 예로써 절제하고 악으로써 화하여 덕이 안에 이루어지고 文(문)이 밖에 나타나게 한다면, 재주가 완전하고 덕이 갖추어져서 渾然(혼연, 완전)하여 한 가지 선(잘함)으로 이름을 이룬 자취를 볼 수 없으며, 中正(중정)하고 華樂(화락)해서 순수하여 다시는 편벽되고 雜駁(잡박)한 가리움이 없게 되어, 그 사람됨이 또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亦(역)〕’이라는 말은 지극한 것이 아니니, 아마도 자로가 미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 듯하다. 만약 그 지극함을 논한다면 人道(인도)를 다한 聖人(성인)이 아니면 이것(成人(성인))을 말할 수 없다.     

지혜롭다고 언급한 장무중(臧武仲)은 뒤에 15장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뒤에 언급되는 내용이 칭찬이나 긍정적인 서술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사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을 부각시켜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나친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으로 소개된 바로 앞장의 맹공작(孟公綽)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바로 앞에서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는 작은 나라의 대부(大夫)조차 맡길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한 점을 감안하면 공자가 그들의 장점을 부각시켜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한 방식에서 오히려 네 사람의 장점을 쪼개 보면 그들 한 명 한 명도 결국 성인(成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단점을 보완하며 온전한 사람됨을 구축하고 그 경지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장자(卞莊子)는 ‘변엄자(卞嚴子)’라고도 불렸던 인물로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쪽에 있었던 변읍을 지배했던 노나라의 대부(大夫)로 호랑이 두 마리를 단칼에 해치운 것으로 그 용맹을 떨쳤던 인물이다. <순자(荀子)>의 ‘대략(大略)편’에도, “제(齊)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치려고 해도 변장자가 두려워 노나라를 지나가지 못했다.”라는 일화가 나온다.       


한편, 앞서 ‘옹야(雍也)편’의 6장에서 공부했던 염구(冉求)의 재예(才藝)에 대해서도 그가 가진 최대 장점을 그것으로 제시한 것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가 네 명의 언급으로 강조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것도 많고 전체적으로 보면 완성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그릇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평가받은 인물들을 등장시켰는지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다시 한번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공자가 이 장에서 구사한 이 설명방식에서 놓치지 말고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4명에 대한 각자의 설명에 이은 문장의 마무리에 나오는 ‘禮樂으로 문채를 낸다면’이라는 언급이다.      


예악에 대한 개념 규정에 대해서는, 앞서 공부했던 ‘선진(先進) 편’의 첫 장에서 ‘앞선 사람들은 예악에 있어 야인과도 같고, 나중 사람들은 예악에 있어 군자와도 같다.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단연코 앞선 사람들을 따를 것’이라고 한 설명에서 명확히 한 바 있다. 시작과 기초에도 예약이 필요하겠지만 앞서 나열한 지혜와 욕심이 없음과 용기와 재예(才藝)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정돈하여 밸런스를 유지하는 예악(禮樂)의 기능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따로 놀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반어적으로 강조한 것이기에 그 부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할 것이다.     


그래서 정자(明道(명도)는 주석을 통해 장무중의 예를 들어 이 내용을 꼭 짚고 넘어간다.     


“장무중의 지혜는 바른 것이 아니니, 만일 예악으로써 문채를 낸다면 바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장은 후대 학자들의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어서 ‘왈(曰)’이 나오며 갑자기 현실적으로 앞에 말한 것이 가능하지 않으니 완화된 기준을 제시하며 다시 한 단계 낮춘 기준을 제시한다. 이 묘한 논리적 반전(?) 때문에 후대 학자들 중에서는 뒷부분이 공자의 이상적인 가르침을 듣고 도저히 동의하지 못한 자로(子路)가 현실적인 성인(成人)의 개념을 다시 부연한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생겨나게 된다.  

   

‘지금의 성인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라는 유보적인 말이 그러한 해석을 내놓은 학자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게 되면 그것은 논리적인 간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공자의 의도에 시도조차 하지 않을 배우는 자들을 생각하여, 앞의 가르침이 갖는 의미를 새긴 자들에게 그렇다면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부연하는 공자의 부연설명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공자가 가장 먼저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덕목이라고 제시한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利를 보고 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成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적지 않은 후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설 중에는 오히려 앞의 설명이 자로(子路)의 주장이고 뒤의 설명이 자로의 의견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앞의 ‘자왈(子曰)’에서 ‘자(子)’가 오히려 뒤에 ‘왈(曰)’앞에 붙어야 한다는 설명인데,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 선뜻 동의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배우는 자들이 여러 이설을 알고 연구할 부분이라 과제로 남겨둔다.     


이러한 논란이 분분한 뒷부분에 대해서, 나와 같은 의견을 견지한 주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통해 그 의미를 다시 부연 설명해준다.     


다시 ‘曰(왈)’ 자를 더한 것은 이미 대답하고 다시 말씀하신 것이다. ‘授命(수명)’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여 목숨을 가져다가 남에게 줌을 말한다. ‘舊要(구용)’는 오래된 약속이고, ‘平生(평생)’은 평소이다. 이러한 충신의 실상이 있으면 비록 才智(재지)와 禮樂(예악)이 미비된 바가 있더라도 또한 성인의 다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利를 보고 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의견이니 바로 수긍할 수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원문의 구요(久要)의 요(要)를 약(約)으로 해석하여 ‘이인(里仁) 편’의 2장에서처럼 ‘고생’이나 ‘빈곤’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국 약속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범위가 넓어질 뿐 의미를 새기는 것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고생할 때와 빈곤할 때, 한 약속에 대해서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게 되면 변질되고 입장이나 상황이 바뀌었다며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앎이 밝고 信(신)이 독실하고 행실이 과감함은 천하의 達德(달덕)이니, 공자께서 말씀한 成人(성인)도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장무중은 智(지)이고 공작은 仁(인)이고 변장자는 勇(용)이고 염구는 才藝(재예)이니, 모름지기 이 네 사람의 장점을 합하고 禮樂(예악)으로써 문채를 내면 또한 成人(성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大成(대성)을 논한다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의 成人(성인)으로 말하면 충신이 있으나 예악에는 미치지 못하니, 또한 그다음인 자이다.”     

앞의 네 사람이 가진 최대 장점을 더한 것에 그것을 예악으로 아우르는 것이 성인(成人)의 경지에 해당하지만, 거기에 예악(禮樂)이 빠지게 되면 뒤에 다시 부연 설명한 아래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뒤이어, 성인(成人)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연상시킨 성인(聖人)의 개념으로 라임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인다.      


“成人(성인)의 명칭을 말한다면 聖人(성인)이 아니면 누가 이에 능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오직 聖人(성인)이라야 形色(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 하셨으니, 이와 같아야 成人(성인)이란 이름에 걸맞을 수 있다.”     


결국 다른 듯 하지만 완벽한 사람됨을 이루는 것(成人)은 성인(聖人)만이 가능한 경지임을 재확인하는 해설이기도 하다.      


한편,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뒷부분의 왈(曰)로 시작하는 언급에 대해 다양한 학자들의 이설 중에서도 호씨(胡寅(호인))는 그 말을 자로의 의견이라고 보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今之成人(금지성인)’ 이하는 바로 자로(子路)의 말이니, 다시는 ‘들으면 즉시 행하는 용기’가 없고 ‘종신토록 외우는 고루함’이 있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뒤에 현실적인 당대 성인(成人)의 경지를 언급한 부분이 공자의 부연설명이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단계로 낮춰 설명한 자로(子路)의 말인지는 사실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호씨가 의미심장하게 던진 마지막 의문처럼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바로 실행하던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이 되는 가르침을 바로 실천으로 옮겨 완성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 그 완성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그 문구를 외우는 것으로 바꾸었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흔히 만 스무 살이 넘으면 성인(成人)이라 부른다. 사회적으로나 법제적인 용어가 갖는 의미에서도 성인(成人)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제대로 사람이 되는 것(成人) 그저 나이를 먹기만 하는 것처럼 그리 쉽다면 이 장에서처럼 공자가 굳이 네 사람을 언급하면서까지 그 모든 것을 종합하고 그것을 아우리는 예악까지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흔만 넘어도 노인 취급을 받던 중세시대가 아니라 칠순이 되어도 노인이라 칭하는 것이 애매해진 최첨단의 시대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젊은 시기에 그토록 총명하고 정의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나이를 넘기면서 망령된 언행을 스스럼없이 하거나 자신이 신념이라고 평생을 외쳤던 시간과 공적을 한 번에 뒤집어엎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언행으로 그나마 작은 인정마저도 모두 말아먹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인사들을 보며, 성인(成人)을 향한 노력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망령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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