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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6. 2022

지킬 수 있는 약속이라면 말 대신 그냥 실천으로 보여라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아예 약속을 하지 말라.

子曰: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이 장의 가르침은 단 열 글자이다. 짧다. 이미 앞서 배운 것을 포함하여 공자는 언행(言行)이 갖는 무게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조에 강조를 거듭한 바 있다. 공자가 왜 그렇게까지 말만 잘하는 이를 경계하고 폄하했는지, 그리고 언행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지에 대한 실마리를 이 장에서는 명확하게 한 가지 논리로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언행(言行)이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원문의 내용의 해석은 한번 읽는 것으로 쉽게 와닿지 않는 묘한 표현을 담고 있다. 말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실천하는 것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어 이런 표현을 했는지 현대어의 해석만으로는 이 가르침의 행간에 담긴 의미를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주자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주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큰소리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천하려는 뜻이 없어서 스스로 능하고 능하지 못함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니, 그 말을 실천하려고 하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말하는 것’을 ‘큰소리치는 것(호언장담)’으로 풀이하여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허풍으로 설명하고 있다. 만약 말이 앞서서 큰소리를 치고서 그렇게 떠들어댄 말을 실천으로 실행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역설한 내용이라는 해설이다.


주자의 이 해석은, 말 자체에 대해 발언하는 순간 그 발언에 대한 실천의 무게감을 느껴야 하고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행하는 것을 감안하기 때문에 언행(言行) 모두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풀이한 것이다.


이후 학자들의 조금 다른 해석을 비교하여 참고하자면, 이 장의 내용을 이렇게 보기도 한다.

“큰소리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 말을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조금 결이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언행(言行)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실천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른 해석은 아니다. 여기서 조금 간과하기 쉽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은 ‘부끄러워한다’는 행동의 원인과 방식이다.


이전에 공부하면서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부끄럽다’는 개념 자체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거나 비판받아 발생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느끼고 반성한다는 취지가 강한 감정이다.


공자가 말에 그렇게 민감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말이 그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배움의 정도를 드러내는 가장 기초적인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얼마나 공부를 하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는지를 아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다는 내용은, 단순한 지식적인 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공부하고 익힌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르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배우기를 시작하되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파악하게 되면 자신이 행동해야 할 바와 지향해야 할 바를 정하게 된다. 잘못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공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언행(言行)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말이 많아질수록 실수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고 자신이 지켜야 할 약속이 많아지기 때문에 실천으로 이행할 수 없는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말한 ‘부끄러워할 줄 안다’라는 표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자신이 말했지만 아직 실행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말이 먼저 선행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실천에 앞서 말이 예고편처럼 나오는 것은 그 공부의 깊이가 낮고 기본이 안된 자들이 저지르는 만행임을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의 깊이가 낮거나 그 밑천이 금방 드러나는 자일수록 말이 앞서고 커지고 자극적이기 마련이다. 배운 바대로 옳은 바를 실천하고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실천을 행하는 것은 즉각적이지 않을뿐더러 일시적인 퍼포먼스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오랜 시간 그의 행동을 기반으로 한 일상과 그 행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앞서 배운 ‘이인(里仁) 편’에서 공자가 “옛사람이 함부로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행이 미치지 못할까 부끄러워해서였다”라고 한 말은 이 장의 가르침과 그러한 점에서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과장된 허풍의 말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행하려는 뜻이 없고 또 스스로의 능력을 헤아려보지도 않는 것이기에 실천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풀이한 것이다.


말이 실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은 언행(言行)이라 한 단어로 묶어서 말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부를 통해서 내실을 갖춘 자는 이미 내실을 충분히 갖추었으니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끄집어내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인데 그것을 삼가며 함부로 말을 꺼내놓지 않는다. 내실을 쌓은 자는 함부로 말을 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이라 강조한 이유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말을 내뱉어도 될지, 그 말을 지켜왔는지 혹은 지켜낼 수 있는지의 깜냥을 가늠하는 것도 결국 자신밖에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무리인지를 아는 것은 일정 수준 올라서지 않은 자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수준이 낮은 이들은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스스로를 책사(策士)라고 말하는 자칭 배운 것으로 알량한 자리를 보전하는 자들과 수많은 만남을 통해 그들의 민낯을 보아왔다. 심지어 위정자라며 한 나라의 군주 혹은 제후라 하는 자들과도 수많은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왔다. 이미 서른 즈음 학문의 완성을 통해 수많은 역사서들의 군상(群像)들을 통해 시뮬레이션해왔던 자신의 공부를 현실에 충분히 대응하여 확인했다.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배우고 익혔던 ‘상식’이라 여겼던 부분들이 현실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고 그것을 오히려 어긴 자들이 현실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 상황에 역겹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자고 입으로만 떠들며 그렇게 실행하지 않는 이들의 면면을 접하며 실망을 넘어 좌절하고 또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한 점들을 알고서 보면, 공자가 말만 익숙한 자들에게 서슬 시퍼런 날을 세워가며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의 가르침은 언행의 무게를 두 가지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는 자신의 능력조차 가늠할 수준조차 되지 않은 자가 함부로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쳐놓고 그것을 자신이 실천하여 행할 수도 없음을 알지 못하는 단계를 말한다. 즉, 어떤 계획이나 자신의 능력이나 깜냥을 명확하게 알고서 할 수 있는 범위라 여겨 호언장담한 것이 아니라 그저 되는대로 나오는 대로 떠들어댄 경우를 말한다. 물론 잘못이고 부끄러워할 일이지만 그 부끄러움은 그가 결국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한참 이후에서야 깨닫게 될 일이고 그나마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할 수준이기에 무지(無知)에서 온 무치(無恥)인 경우이다.


공자가 정작 따끔한 일침을 놓이려고 하는 경우는 바로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조금 배웠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하지만, 실제로 높은 수준의 경지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파악하기에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사 할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렇게 먼저 말로 내뱉어서는 안 될 것임에도 그는 방자하게 그 허풍을 떤다.


문제는 그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지르는 그 의도에 있다. 앞서 첫 번째 경우는 스스로 그것을 알 수 있는 수준도 못되기 때문에 그렇다 이해해줄 여지가 있다 하겠지만, 이 경우는 자신이 그것을 실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거나 실천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일단 말을 내뱉고 만다.


공자는 그들이 왜 그런 허풍과 허언을 내뱉는지를 현장에서 그 지저분한 민낯을 여실히 목도한 바 있다. 그것은 늘 그들의 사리사욕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의 알량한 체면을 위해, 그들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더 위로 기어올라가기 위해 그들은 그것이 밑도 끝도 없는 공수표임을 알면서도 내질러댔다.

법에서는 죄임을 인지하지 못한 미필적 고의의 경우에도 당연히 처벌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행했을 때에 더 큰 벌을 내린다.


이 장에서 공자의 지적은 그 인지와 자기 수주의 파악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로 구분하고 있다. 최소한의 기준은 자기가 스스로 판단했을 때 자기가 가볍게 입을 놀리기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 것, 아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말보다 실천이 앞서지 못한 부분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준이라면 아예 그런 일을 벌이지 않거나 가벼이 언행 하지 않을 것이라는 배우는 자들이 뼈에 새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법과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 거라며 어퍼컷을 끊임없이 올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이의 허언(虛言)을 처음부터 믿고 그에게 표를 던진 이는 많지 않았다. 저마다의 이유는 다를 수도 있겠으나 이른바 개돼지로 분류되는 이들이 그에게 표를 던져 그를 권력의 정점에 올려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전 정부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심리였다.


물론 그들을 응징하고 정말 옳은 대안을 내세운 그 누군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 아쉬운 변명을 하더라도, 정말로 현 정부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한 국민들이 개돼지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인지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는지 누군가 예언했던 것처럼 그를 뽑아준 손을 자르고 싶어질 지경이었는지는 지금 불과 6개월 만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머릿수를 보면 알고도 남음이 있다.

법무부 장관이라고 연일 신나게 방송을 타는 이의 말에 따르면, ‘검사는 정의를 구현하고 나쁜 놈들을 잡고 그들을 벌주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를 비롯하여 최초로 검사 출신의 대통령이 정부 수장이 되었으니 어퍼컷을 내지르며 했던 공약(公約)처럼 ‘법과 상식과 공정’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실천을 보였으면 된다.


법은 상식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켜야만 할 규칙이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니 법대로만 이행된다면 그야말로 아무런 문제가 될 일이 없다. 문제는 그의 처가 그리고 그의 장모가 그가 고위직 검사였다는 이유로 처벌받아야 할 죄를 지었음에도 처벌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조사조차 안 받는다면 그가 먼저 떠들어댔던 그것도 자신을 뽑아달라며 약속했던 ‘법과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말은 공약(空約;헛된 빈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부터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원님을 찾아 고했다. 시대가 바뀌어 사람들은 고소라는 것을 한다. 고소의 절차는 경찰에게 신고가 접수되어 수사를 하고 경찰이 그 내용을 조사한 것을 토대로 죄가 되면 송치를 그렇지 않으면 불송치를 한다. 수사 종결권을 검찰에서 가지고 온 이후로 경찰은 그간 검찰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의 콩고물을 주워 먹으며 키득거렸다. 이른바 ‘검사는 기소로 명성을 얻고, 불기소로 수입을 얻는다’라는 전권(全權)을 나눠갖게 된 것이다.

물론 경찰들이 자신들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범죄를 눈감아주고 불송치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억울한 고소인은 검찰에 이의제기를 할 수 있게 법제적으로 절차가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이전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아야만 했던 때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검찰에 이의를 제기해도 전관 변호사가 나서서 전화를 넣는 일이 없으면 검찰에서 다시 불송치한 사건을 상세히 들여다보며 진실을 규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검사가 불기소 결정을 도장 찍어준 것에 항소를 할 수 있지만, 검사 선배는 후배들이 불기소 결정 도장을 찍어준 사건을 잘못 판단했다며 지적하는 경우가 희박하다.


그렇게 수년간 옹고한 콘체른으로 형성된 곳이 법비들의 세계이다. 그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치계로 거처를 옮겼다고 갑자기 정의구현을 하고 상식과 공정을 실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개돼지로 분류되는 것이 억울하다고? 나는 그러한 당신의 논리를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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