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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7. 2022

왜 공자는 군사를 일으켜 주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나라가 어찌 되든 자기 사리사욕만 차리는 이들에게.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입조하여 애공께 “진항(陳恒)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다. 애공이 “저 세 사람에게 말하시오.”라고 했다. 공자께서 “제가 대부의 말석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인데 임금님께서는 저들 세 사람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군요.” 하시고 세 사람에게 가서 알렸더니 안 된다고 했다. 공자께서 “제가 대부의 말석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영화 <공자>중에서

이 장의 상황은 공자가 죽기 바로 1년을 앞둔 시점이던 B.C. 481년, 애공 14년에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상세하기 기록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제(齊) 나라는 산동의 대국(大國)으로 진 씨 가문은 하남성 회양에 도읍을 두고 있던 진(陳) 나라 왕족인 진경중(陳敬仲)이 제 나라에 망명 와서 자리 잡게 된 일종의 귀화 귀족 가문이었다. 진중경은 제환공을 잘 보필하여 총애를 얻었는데 그 후손들이 제 나라에서 점점 발호하여 군주의 자리를 넘보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황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成子(성자)는 제나라의 대부이니 이름이 恒(항)이고, 簡公(간공)은 제나라의 군주이니 이름이 壬(임)이다. 이 일은 <春秋左傳(춘추좌전)> 애공 14년조에 나와 있다.     


진성자는 제 나라의 대부였는데 전성자(田成子)라고도 불렸던 인물로, 그가 난을 일으켰을 때 공자의 제자였던 재여(宰予)가 대부의 신분으로 그 난을 함께 가세하여 그 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어서 스승인 공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는 기록이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의 재여(宰予)의 기사에 전한다.     

같은 책의 자공(子貢)에 대한 기사에 보면, ‘제나라 대부 전상은 제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제나라에서 세력이 가장 컸던 거족(巨族)이던 고씨(高氏), 국씨(國氏), 포씨(鮑氏), 안씨(顔氏) 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군대를 합쳐 노나라를 치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그 소식을 듣고 난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나라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우리 부모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가 이처럼 위태로운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라를 구하러 나서지 않는가?”     


이 말에 자로(子路), 자장(子張), 자석(子石) 등이 나서기를 청했지만 스승은 그들의 자원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스승의 간택을 받아 현장에 파견된 인물이 바로 자공(子貢)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 현장에 파견된 자공(子貢)은 제 나라의 전상,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 진(晉) 나라의 왕 정공(定公) 등을 만나며 스승의 믿음에 부응하는 지략을 발휘하면서 노나라가 전장(戰場)이 되는 위기를 뒤바꾸게 된다.     


자공(子貢)의 활약에 힘입어 제 나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고, 오나라는 망해버렸으며 진나라는 신흥 강국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 나라로 만든다. 자공(子貢), 한 사람의 지략으로 각 나라에 혼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났고 노나라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그 혼란의 소용돌이를 피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멋진 자공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조금 명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후대 고증학자들의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원문의 진성자(陳成子)라고 하는 ‘전상’이 난을 일으켰던 것이 B.C. 481년이고, 공자가 세상을 뜬 것이 B.C. 479년이고,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가 목숨을 끊은 것이 B.C. 473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자가 세상을 뜨기 불과 2~3년 만에 자공(子貢)이 그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 대단한 외교 지략을 발휘했다고 봐야 하는데 시간상의 모순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자공은 다른 제자들과 3년상을 치르고 나서도 혼자서 3년을 더 시묘살이를 하며 6년간 상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그 모든 역사를 이루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역사 서술이 후대 고증학자들의 지적처럼 다소 논리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당시 역사적인 사실을 다시 고증해보기로 하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상은 제나라에서 난을 일으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지략을 발휘하여 노나라를 치려 준비를 하게 된다. 당시 위나라에 있던 공자는 그러한 소식을 듣고 제자들 중 누군가를 파견하여 그의 음모를 분쇄하기를 권한다. 이에 자공이 나섰고, 발군의 지략을 발휘하여 노나라의 안녕을 꾀함과 동시에 여러 나라에 혼란의 소용돌이를 선사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오나라는 진(晉) 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게 되고 그 전투에서 오히려 진나라가 승리하며 강국의 대열에 들어선다. 


그 사이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게 되고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그렇게 월나라는 패왕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고, 오나라를 물리쳤던 진나라는 신흥강국으로 올라서게 되었고 노나라는 제나라로부터 아무런 침공이나 피해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오나라에 패한 뒤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졌던 전상이 군주였던 간공을 시해하고 기어코 난을 일으키게 된 것이고, 이에 천하 주유를 마치고 노 나라로 돌아와 있던 공자가 애공에게 본래 진상이 가지고 있던 야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며 제 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 장의 상황이다.     

이 상황을 굳이 간략하게나마 상술한 이유는, 원문이나 아래 주자의 주석만 보게 되면 왜 공자가 갑자기 노나라 군주에게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난에 대해 그 나라를 토벌해야 한다며 전쟁을 권하는지 선뜻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결국 전상의 과욕이 자공이 노력했던 그 시기부터 조금 늦춰지기만 했을 뿐, 노나라의 침공으로 이어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당시의 상황에 왜 공자가 주벌을 권하였는지에 대한 의도를 다음과 설명하여 참고가 된다.     


이때에 공자께서 치사하고 노나라에 계셨다. 목욕재계하고 군주에게 아뢴 것은 이 일을 중히 여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신 것이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함은 인륜의 큰 변고여서 천리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니, 사람마다 모두 그를 주벌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웃나라이겠는가.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비록 이미 告老(고로)하셨으나 오히려 애공에게 토벌하기를 청하신 것이다.     


노나라를 노리던 사욕에 가득한 전상의 불의(不義)에 대해 정통성을 가진 나라로서의 노나라가 행보해야 한다는 간언(諫言)이 공자가 죽음을 앞둔 노년의 심정으로 힘이 없지만 그래도 고국의 군주라는 위치에 있던 애공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힘없는 허울뿐인 군주는 너무도 당당하게 그 말을 자신에게 하지 말고 실권자였던 삼환씨들에게 해보라고 말한다.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三子(삼자)’는 三家(삼가)이니, 이때 정권이 삼가에게 있어서 애공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공자로 하여금 말씀하게 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노년의 공자가 정말로 큰 마음을 먹고 했던 간언은 이렇게 허망한 대답으로 돌아온다. 공자가 그나마 고대했던 마지막 희망과 기대가 무너져버린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자께서 밖으로 나와 스스로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다. 공자의 뜻은 ‘군주를 시해한 역적은 법에 반드시 토벌해야 할 것이요, 大夫(대부)는 국사를 도모하니 의리상 마땅히 아뢰어야 하는데, 군주께서 마침내 직접 三家(삼가)에게 명령하지 못하시고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공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만 할 도리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삼환 씨에게 가서 똑같은 간언을 올린다. 그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들이 왜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켜야 하냐며 공자의 간언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단순히 자신들이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는 내용을 넘어 복잡한 권력의 결탁과 역학관계가 있었던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군주의 명령으로 가서 말씀하였으나 三子(삼자, 삼가)는 노나라의 강성한 신하로 본래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 실로 제나라의 진씨와 성세가 서로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그 계책을 저지하였는데, 夫子(부자)께서 다시 이 말씀으로 응하셨으니, 경계하심이 깊다.     

이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진성자(陳成子)가 간공을 시해했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100년이 지나고 난 뒤 그의 증손자 전화가 제나라를 완전히 강탈하여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는 일까지는 벌이지 못했던 문명의 시대로서의 ‘춘추시대’를 종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인식된다. 이후 오로지 무력(武力)과 패도만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대되는 ‘전국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한 패러다임의 변화 기미를 읽었기에 공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연로한 나이였음에도 이와 같은 과격한 간언(諫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자공(子貢)의 활약으로 겨우 제나라의 침공을 피해 갔던 노나라가 언감생심 제나라를 칠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이 공자에게 안 되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허울뿐인 군주 애공이 삼환 씨들에게 강하게 명을 내려 제 나라를 칠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을 공자가 몰랐을 리가 없다.     

워낙 연로하여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져 대의명분만을 중시하며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언행을 보였다는 어리석은 현대 해설도 있는데, 그것은 공자를 모독하는 심각한 오독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삶의 끝에 끝까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누구보다 천하의 변화에 민감했으며 그랬기에 이와 같은 파격적인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미 제나라의 민심이 진성자(陳成子)의 난을 비난하고 그로부터 유리되고 있음을 포착하고 그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제안을 한 것이었다. 즉, 노나라만의 힘이 아닌 대의명분의 기치(旗幟)를 올려 선두에 군사를 일으켜 발의하게 되는 역할을 노나라가 하기만 하면 제나라의 백성들은 물론 주변국에서도 그 명분 있는 토벌에 힘을 더해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에서 배우는 이들이 간과해서는 안될 이와 같은 공자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해준다.     


“左氏(좌씨)가 공자의 말씀을 기록하기를 ‘진항이 그 군주를 시해함에 제나라 백성들 중에 편들지 않는 자가 반이나 되니, 노나라의 무리(병력)에다가 제나라의 반을 보태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말씀이 아니다. 만일 이 말과 같다면 이는 힘으로 한 것이요 의리로 한 것이 아니다. 공자의 뜻으로 말하면 반드시 장차 그 죄를 바로 지칭하여 위로는 천자에게 아뢰고 아래로는 方伯(방백, 패권국)에게 말씀해서 與國(여국, 동맹국)을 거느리고 토벌하셨을 것이니, 제나라를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공자의 餘事(여사, 부차적인 일)이니, 어찌 노나라 사람(군대)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셨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천하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로잡았으면 주나라 왕실이 다시 부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나라의 군신들이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미 칠순이 넘어 천하를 바로잡겠다는 현실참여정치에 대한 의지마저 내려놓고 제자들을 육성하고 저술을 정리하는데 마지막 생을 불살랐던 공자가 죽음을 1년 앞둔 시점에 이와 같은 강고한 간언을 했던 것은 자신의 사후 고국이 처하게 될 위기가 걱정되었던 것이고, 천하를 주유하고서 돌아온 고국의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반전시켜야만 한다는 절절한 마음이 투영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절절함이 당신의 마음에도 울림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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