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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8. 2022

뒷담화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당당히 앞에서 간언하라.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간언하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子路問事君, 子曰: “勿欺也, 而犯之.”     
자로(子路)가 군주 섬기는 것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속이지 말고 顔色(얼굴)을 범하여 간쟁해야 한다.”     

‘헌문(憲問)편’의 전반 부분에서 인재 등용을 주제로 한 가르침이 모아져 있었다면,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신하로서 임금에게 간언 하는 방식과 태도, 마음가짐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임금을 섬기며 간언 하는 방법으로 ‘속이지 말고 범하여 간쟁하라’라는 가르침을 내놓는다. 속인다는 것은 표리 부동하여 자신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속인다는 의미이고, 범한다는 의미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뒤가 아닌 정면에서 직접 자신의 속마음을 간언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정확한 의미를 부연하자면, 군주가 싫어하는 안색을 짓는데도 불구하고 직간(直諫)하는 것을 뜻한다. 그 용례를 살펴보면, <사기(史記)>에서 사마천(司馬遷)이 漢나라 文帝 때 원앙(袁盎)이란 인물에 대한 전(傳)을 기록하면서 그가 ‘犯顔色’하면서까지 자신의 충심을 직간하였기에 그를 위해 쓴다고 사용한 바 있다.     

犯(범한다)의 의미가 일상적이지 않아 배우는 이들이 혹여 오독할까 싶었는지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해설한다.     


‘犯(범)’은 군주의 안색을 범하여 간쟁함을 이른다.     


여기서 다시 공자의 가르침을 새기는 몇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독법(讀法)을 환기하여보자.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가르침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를 살펴 공자의 방편 설법을 통해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나가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하냐고 물은 사람은 다혈질의 대명사 자로(子路)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방점이 얼굴을 맞대고 직접 간언 하는 것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속이지 말라’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장을 해석한 수많은 현대 해설서에서 그저 내용만을 읽고 마치 임금에게 제대로 간언 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둔 풀이를 한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독법(讀法)이 정작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간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이미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팔일(八佾) 편’의 18장과 19장, ‘이인(里仁)편’의 26장에서 살펴본 바 있고 뒤에 공부하게 될 ‘위령공(衛靈公) 편’의 37장에서도 나온다. 특히 ‘이인(里仁) 편’에서 ‘임금을 섬길 때에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게 되고, 친구 간에 자주 충고하면 멀어지게 된다.’는 권계의 내용은 이 장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실행되었을 때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원문을 풀이하면서 그것을 ‘간언(諫言)’이라고 풀이하였을 뿐, 실제 원문의 내용은 ‘직접 얼굴을 맞대라’는 의미로만 말하고 임금에게 간언 한다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단계적 학습을 통해 그 말이 들어가지 않아도 임금에게 당당하게 얼굴을 맞댈 수 있다는 단어가 충심을 담아 간언 할 때 말고는 없다는 것을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고문만의 방식인 셈이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범씨(范祖禹(범조우))는 직언(直言)의 태도로 실행되는 간언(諫言)의 의미를 담아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안색을 범하여 간쟁하는 것은 자로(子路)의 어려운 바가 아니요, 속이지 않음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속이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간쟁하는 것을 뒤에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장의 핵심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간하라’라는 내용보다 ‘속이지 말라’에 자로(子路)를 위한 맞춤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다시 재확인시켜주는 주석이다.   

  

그런데, ‘속이지 말라’에 대해 내가 풀이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의미로 풀이하여 임금이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자신의 속마음이 그것을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하의 위치에 있으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데 있어 저해되는 위험요소로 작용하지만 않는다면 자기 보신(保身)을 위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고 오히려 아부하고 그 세력에 영합하는 모습을 비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원앙(袁盎)의 경우는, 漢나라 文帝가 아우인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위세를 꺾으려고 그를 촉(蜀) 땅으로 유배 보내려 했을 때, 다음과 같이 직간(直諫)을 올리며 반대 의견을 냈다.     


“회남왕이 도중에 죽으면 폐하께서는 아우를 죽였다는 나쁜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간하였음에도 문제(文帝)가 마음을 바꾸지 않자, 회남왕은 분해서 단식을 감행하게 되고 그렇게 결국 죽음을 맞고 말았다.      


또 하루는 문제(文帝)가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신부인(愼夫人)을 황후와 나란히 앉도록 하였다. 그러자 원앙은 다시 이렇게 직간하며 잘못을 지적한다.     


“존비(尊卑)의 차서(次序)를 지키면 위아래가 화합하지만, 첩이 황후와 자리를 나란히 하면 앙화를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직간을 받아들여 잘못된 명령을 고쳤다.    


 

이 일화를 굳이 소개한 이유는, 본래 배운 대로의 정의가 아니면 언제나 욱하고 들이받는 자로(子路)에게 ‘속이지 말라’라는 내용만 강조하면 될 뿐인데, 알아서 직간할 성향을 가진 자로(子路)에게 굳이 ‘속이지 말고 직접 면전에서 직간(直諫)하라’는 가르침을 왜 내렸는가에 대한 공자의 의도를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의도이다.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한 직간(直諫)은, 단순히 임금의 앞에 나서서 충심 어린 바른말로 잘못된 길을 들어서는 임금을 바로 잡으라는 ‘일회성’ 퍼포먼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원앙의 사례에서 본 것과 같이 ‘범안색(犯顔色)’이란 임금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행하여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밝히겠다고 자살을 택하여 자신만의 만족감에 어린 행동은 후세의 역사에서 헛된 죽음으로 매도될 가능성이 낮지 않고 충심 어린 직간이라고 하여 그저 한번 내지르고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임금이라며 욱해서 그저 벼슬을 내던지는 것은 한심한 행동이라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공자는 공허한 이상주의자가 아닌,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다. 실질적인 실천을 통해 결과가 올바르게 도출되지 않는 자기 만족감을 위한 조선시대 정치적 도구였던 성리학과는 거리가 멀었단 의미이다. 그저 명분을 위해 펼치는 요식행위 따위는 공자에게 있어 가식이고 안 하느니 못한 어리석은 자살골과 같은 행동이었다.     


다혈질의 자로(子路)는 우직하기 그지없고 급한 성격 탓에 스승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임금의 언행을 목도하게 되면 당연히 들이받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하는가이고 결국 그 간언(諫言)을 통해 임금을 바로 잡는 것이지 임금을 비판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발견하고 책을 잡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꾸준히 간하지 않으면 인간의 본능상 그 잘못을 인정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자로(子路)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공자의 의도가 이 장의 행간에 감춰져 있다.     


그래서 ‘속이지 않는다’의 의미를,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숨기지 말라고 해석한 것은, 단순히 솔직하고 정직하라는 의미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권력자 곁에 신하 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이 옳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부하고 권세에 부합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배운 자들의 가장 큰 병폐로 생각한 것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만 익숙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들이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자신의 사리사욕에 배치되거나 자신이 부와 명예를 챙기는데 그 올바름을 위배해야 하는 상황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배움을, 그 올바름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즉, ‘속이지 말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지 말라는 메시지와 이어지는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최첨단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과 상관없이 정치행위는,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크게 진화하거나 발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아니, 엄청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기는 했는데 그 방향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혼탁해진 쪽으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배운 바의 옳은 것을 신념으로 삼아 그에 부합하지 못한 임금의 언행이 나왔을 때 자신의 속마음(양심)에 배치된다고 임금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역사에 얼마나 있었던가? 대개 그것을 행하지 못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속마음으로는 그것이 잘못이고 그 잘못을 자신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나, 그것을 결행했을 경우, 자신의 알량한 목숨과 지위를 보전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권세에 부합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자신이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질러 그 위치에 올라가게 된 터라, 임금의 잘못된 언행을 바로잡겠다고 직간을 감행하는 순간, 자신의 이제까지의 부정한 삶이 청산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유를 가진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임금의 앞에서 직간하려는 이를 폭탄으로 여겨 미연에 제거하거나 폭탄이 터져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써왔다. 공자의 시대부터 작금의 빨간당 파란당의 이름으로 혹은 무소속 혹은 전 의원 따위의 타이틀을 쓰며 정치를 업으로 삼는 자들은 그렇게 구차한 정치인생을 연명해왔다.     


사실 이 장의 핵심에서 조금 벗어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가장 큰 전제는 직간(直諫)으로 자신의 언행을 바꿀만한 자질을 갖춘 군주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 군주로서의 사명감을 자각하기는커녕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마냥 아부하고 자신의 부정(不正)을 지지해주는 자들에게만 은택(?)을 공유하는 자에게 직간(直諫)따위는 늦가을 꿀잠을 방해하는 모기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칠십여 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분석해보건대 공자는 처음부터 그렇게 삐뚤어진 군주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주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는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통찰해줄 신하를 곁에 부고, 부족한 군주가 있을지언정 올바른 신하의 직간(直諫)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있다고 여겼다. 아니, 설사 그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신하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자로(子路)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강조한 것이다.     

군주의 자질은 신하가 어떻게 만들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장의 가르침은 임금을 보필함에 있어 신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노선까지를 설명하고 있다.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을 중세 봉건주의의 사회에서도 군주의 잘못 하나만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을 공자는 이미 수천 년 전에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 당시에도 그랬는데, 최첨단의 시대를 달리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나라를 망치는 것이 어찌 통치권자 한 사람의 잘못이겠는가? 나라를 말아먹는 것이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꾼들만이라 내놓고 뒷담화만 해대며, 정작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잘못된 처사에 대해 잘못이라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시선을 내리까는 당신이 그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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