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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31. 2022

소인(小人)이라 불리길 원하는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면서 소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러니는 어쩔 셈인가?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위로 통달하고, 小人은 아래로 통달한다.”     

이 장에서는 다시 군자와 소인의 극명한 비교 표현이 나왔다. 군자와 소인이 통달한 것이 다른 데 구체적인 내용을 서술하지 않은 채 그저 위와 아래라고만 설명하고 있어 과연 그 위와 아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고서는 명확하게 이 장의 의미를 해석해낼 수 없다.     


먼저 주자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군자는 천리(天理)를 따르므로 날로 高明(고명)함에 나아가고, 소인은 人慾(인욕)을 따르므로 날로 汚下(오하, 비하) 함에 이르는 것이다.     


주자의 해석은 예상했던 대로 군자가 통달했다고 하는 ‘위’를 ‘천리(天理)’로 보았고, 소인이 통달했다고 하는 ‘아래’를 ‘인욕(人慾)’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용어인 ‘고명(高明)’이란 <중용(中庸)>에서 강조에 마지않았던 인간의 숭고한 경지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이제까지 공자가 대조의 방식으로 설명해왔던 군자와 소인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기준은 명확한 듯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준을 생각해보면 중간에 해당하는 구별점이 명확하게 선처럼 갈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공자가 군자와 소인을 굳이 언급해가면서 명확한 대립점을 설정하여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산(茶山; 정약용)은 주자의 학설과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고 밝히며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군자나 소인은 처음에는 모두 중인(中人)이었지만 의(義)를 추구하는 마음과 이(利)를 쫓는 마음의 차이가 털끝만큼 가늘게 벌어져, 군자는 나날이 덕(德)으로 나아가 최상(最上)에 이르고 소인은 나날이 퇴보하여 최하(最下)에 이르게 된다.”     


배움이 높던 낮든 간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소인에 속한다고 여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군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선을 긋고 색깔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아주 잘 안다.     


공자의 가르침이 이론에 치우친 애매모호한 형이상학적인 이론만을 앞세운 것이라면 ‘말은 누가 못하나? 실제로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그러한 것이지!’라고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비난할만한 이들이 적지 않겠으나 공자는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속을 후벼 파고 그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에 일침을 가한다. 마치 ‘말로는 군자로 불리며 존경받고 싶어 하지만 하는 짓은 마냥 소인이 하는 꼴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굳이 이 유명한 장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은 설명을 한 이유는. 이 장의 내용을 너무도 뻔한 것으로 그저 범범하게 이해하는 이들이 많아 본래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행간의 의미를 너무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군자와 소인으로 딱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군자가 거의 없고 소인만이 가득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나마 군자는 없지만 군자이고 싶어 간간히(?) 노력하고자 하는 상달의 소인과 하달의 소인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장을 비롯해서 <논어>에서 그렇게 대별적인 개념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군자와 소인은 단순한 양분 논리로 인간의 부류를 단 두 가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미립자 단위까지 계산된 전체 성분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다르고 대상에 따라 다르며 시기에 따라 다른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경우의 수를 모두 따져보더라도 애매하기 그지없는 회색이 나오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 기준의 경우에 수를 읽어낸 학자들은 해석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예컨대, 조선 인조 때 이식(李植)은 <접물잠(接物箴)>이란 글에서 상달과 하달의 갈림은 타인과의 사귐에서 알 수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흰모래가 진흙 속에서 검어지고 옷에 기름때가 묻는 것처럼, 마음을 풀어놓아 함께 구렁텅이로 향하다가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와 똑같이 변할 수 있거늘, 어찌 사귀는 이를 신중히 고르지 않으랴, 오늘부터 경계하리라.”     


청나라 때의 학자 유보남(劉寶南)은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위와 아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명확한 정리한 바 있다.     


“‘위’는 뿌리이고 덕과 의를 말한다. ‘아래’란 지엽(枝葉)이고 재물과 이익을 말한다. 군자는 덕과 의에 통달하고 소인은 재물과 이익에 통달한다.”     

왜 공자의 시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청대의 학자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명확하게 재물과 이익을 바라는 것이 소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켰을까?     


공자의 시대에서 청나라 대를 거쳐 최첨단의 과학시대인 현대에까지 인간이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를 살펴보게 되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재물과 이익을 바라는 소인들이 많아지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굳이 사회학적인 이론이나 역사학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본성이 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서 당연히 농업을 위주로 한 고대사회보다 상업을 위주로 한 발전된 사회로 진보하면서부터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농사를 지어 자신들이 먹고살아야 할 농작물을 키워 자급자족하던 시대에는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땀을 흘리고 일군 노력만큼 내 손에 떨어지는 결과를 두고 누군가를 속이거나 기만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자급자족을 넘어 그것을 팔아 다른 사람의 것과 바꾸고, 화폐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재부(財富)를 쌓고 상대적인 빈부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행복을 돈과 결부시켰고 그것은 어느 사이엔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농사를 지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할 때는 속일 필요도 이유도 없던 상황에서 그만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 더 큰 성과를 갖고 싶어 하는 사특함이 인간의 본능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게 되면 실제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더 큰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사특한 본능이 도덕성을 아무렇지도 않고 저 깊숙하고 어두운 방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다른 이들을 기만하거나 더 큰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이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배운 도덕성과 공부가 그들의 사특한 인간의 본성을 ‘현실’이라 부르며 자기 합리화를 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회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거나 폭파한다고 하지 않고 ‘사회를 좀먹어간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좀먹는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는 사회적인 풍토가 무너져버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보이고 그렇게 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자들이 사회지도층이라 불리고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조금씩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고 자신들 한 명 한 명이 저지르는 일로 인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고 키득거리며 그 역겨움 삶의 목표를 오직 사리사욕에 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앞에서, 심지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 부모와 자식 앞에서는 그렇게 군자인 척을 하고는 싶지만 정작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아무런 고민 없이 후안무치한 행보를 거듭하며 다른 이들을 비난할 때는 군자의 기준을 내세우다가 자신의 삐뚤어진 파행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기는커녕, 남들도 다 그러는데 왜 자신만 가지고 뭐라고 하냐고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원문을 읽으며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 기대하고 싶다. 긍정적인 의미인 ‘통달하다’를 라임처럼 사용하여 굳이 소인이 통달했다는 표현이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던가? 굳이 소인이 이익에 통달한다는 표현을 쓴 것이 그저 앞서 군자가 통달한다는 표현에 똑같은 의미를 쓰거나 그저 소인에게 그런 표현을 써서 우회적으로 완곡한 비난을 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대강 넘어갔는가?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의문이 가는 지점이 생기면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생겼는지를 궁구(窮究)하고 그것의 의미를 파악해내기 위해 생각의 힘을 길러 알아내고자 노력해야만 발전이 있는 것이다.     


통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 뒤에 공부하게 될 내용 중에 ‘하학상달(下學上達; 낮고 쉬운 것부터 배워서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달음)’이라는 고사성어의 기본이 되는 내용이 나올 때 다시 상술하겠지만 이 장의 내용과 연관 지어 많이 언급되곤 하는 내용인데, 여기서 배우고 익힌다는 내용에는 공자 특유의 개념인 ‘실천’이 당연히 포함된다. 즉, 통달한다는 것은 그것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통틀어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회성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눈치챘는가? 맞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통달한다는 것은 그 과정을 군자가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과 같이 장기간에 걸쳐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들이 배우고 익힌 것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적용하고 응용하며 실행한다는 사실이 군자가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히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과 절차로 이루어짐을 역설하기 위해 공자가 일부러 그 단어를 박아 넣은 것이다.     

공자가 가장 혐오하는 것. 


배우지 못해서 몰라서 사특한 본성에 따라 과오를 저지르는 것을 넘어 자신이 배우고 익힌 바를 토대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적극 활용하고 그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그 욕심의 끝 가는 곳을 모르고 같은 목적을 하는 자들과 무리를 이루어 그들의 기름진 배를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채워가면서 입으로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표면상으로는 군자인척 하면서 존경과 박수까지 바라는 말만 익숙한 자들의 표리부동함이었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수많은 말만 익숙한 소인들은 군자는 현실상 존재할 수 없다며, 공자의 현실 철학을 비아냥거린다. 그럴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며 비웃기까지 한다.      


그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하고 배움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무식한 변명들이 생겨난다. 공자가 설명하는 진정한 군자는 자신의 이익을 도외시하는 것으로 군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이 자신을 넘어 공공의 이익으로 확장되고 공유되는 방향으로 이익을 추구하며, 더 큰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자신의 작은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경우에 한한 것일 뿐이다.     

소인은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조만을 일시적으로 유지하는 듯할 뿐,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자신에게 피해가 된다 싶으면 언제든 의리나 도덕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던진다. 심한 경우 공동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자신만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떻게 해서든 자신만이 그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모색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군자가 자기희생만을 앞세운 이상주의자라는 착각은 자신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무식한 소인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정말로 큰 군자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공공의 이익이나 사회적 목표와 그 궤를 함께 하는 방향을 찾으려 노력한다. 소인들은 늘 말한다. ‘너도 나도 함께 잘 살 수는 없다.’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영원히 소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이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까지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소인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혀 통달하는 지경까지 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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