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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1. 2022

남 주기 위한 공부는 결국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법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공부하는가?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다.”

이 장의 가르침은 앞에서 공부했던 ‘선진(先進) 편’의 첫 장과 맞닿아있다. 선진 편에서도 그렇고 이 장에서도 그렇고 <논어(論語)>에서 옛날과 지금을 비교했던 것은 단순히 시기적으로 오래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르침의 본의가 손상되지 않았던 시대로 ‘옛날’이라는 표현을 쓰고 상대적으로 그 가르침이 손상되고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당대의 현실을 ‘지금’이라 자조적인 표현을 써서 경계하고자 함이다.


공자가 그렇게 자조적으로 비판에 마지않던 당대의 현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 개선되기는커녕 그대로 퇴보하였거나 오히려 악화일로로 경주해나간 꼴을 보이고 있다.


크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 공부한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내실을 다진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고,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이들의 이목과 평가에 목을 매달아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으로 쓰인 표현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설명할 것이 없었던 주자는 정자(伊川(이천))의 설명을 빌어 이 간략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爲己(위기)는 〈道(도)를〉 자기 몸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요, 爲人(위인)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공자가 강조했던 배움, 실천이 궁극적인 마침표가 되어야 할 그 배움에 대한 것이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에 대한 목적의식과 동기를 잊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결국 수양의 과정임을 다시금 역설하는 것이다.


공자가 권계 하고자 했던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정자(伊川(이천))는 ‘배워서 남 주랴?’의 복합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의미를 풀이하며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끝내는 남을 이루어 줌에 이르렀고,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하여 끝내는 자신을 상실함에 이른다.”

본래 공부는 자신을 위함이다. 여기서 자신을 위함이란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고자 함이고 자신의 미숙함이 어떤 것인지를 인지하고 채우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 그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기 위한 과정을 통해 자신을 단순히 지식적인 면은 물론이고 인격적인 면에서 완성시키는 위함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고 완성에 이르게 되면서 종국에는 내 주변의 이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타의 모범이 되며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 갖는 선순환 구조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알량한 몇 줄의 지식을 더 외우고 첨가하려 들고 알량하게 몇 개 안 되는 재주라는 것을 자신만이 갖춘 듯이 가지고서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자신을 뽑아달라며 위정자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지않는 당대의 배움을 사칭한 자들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고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나라를 좀먹고 사회를 붕괴시키는데 일조하고 만다는 것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악순환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조금 깊이 들어가서 두 가지 의미가 갖는 의미의 기준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옛 주석이나 다산(茶山; 정약용)의 주석에서는, 爲己를 ‘실천해 나가는 일’이라 풀이하고, 爲人를 ‘남에게 말만 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 풀이한 바 있다. 즉,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에 대한 구별 기준으로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자(伊川(이천))의 해설을 소개한 주자는, 이 장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배우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공유해준다.


내가 상고해보니, 聖賢(성현)이 배우는 자들의 用心(용심)에 대한 잘잘못〔得失(득실)〕의 즈음을 논함에 말씀하신 것이 많다. 그러나 이 말씀과 같이 절실하고도 긴요한 것이 있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 밝게 분변하고 날마다 살핀다면 거의 따를 바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이 주석에서 주자가 말하는, ‘배우는 자들의 用心(용심)에 대한 잘잘못〔得失(득실)〕’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은, ‘배우는 자들이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그릇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배움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여 사회를 파멸시키고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것도 결국 배운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세상을 바로잡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쳐나가 백성들을 기쁘게 만드는 것 역시 배우는 자들의 배움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배우는 자들이 배우는 과정에서 삐뚤어질 가능성이 너무도 많다는 점을 먼저 배우고 가르쳤던 공자는 아주 잘 알았고 수많은 사례를 목도하고 실증하였다.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이 남의 이목을 신경 쓰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한다고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이 공자의 시대에나 나올법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 

아주 비근한 현대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논어>를 풀어 읽어주며 우리 사회를 망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법비들을 보라. 현대판 음서제라고 하는 로스쿨은 또 다른 이야기로 빠질 수 있으니 차치하더라도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사법고시’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자들과 실제로 그 시험에 합격하여 개천표 용으로 우리 사회를 분탕질했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라.


사법고시에 패스해서 사법연수원에 가면 시험 성적순으로 판사-검사로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성적과 상관없이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는 이가 몇 년에 걸쳐 드물게 특수한 상황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외일 뿐 일반적으로는 연수원에서 2년간 어쩌면 사법고시보다 더 열심히 위로 올라가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에 해당하는 마지막 발버둥은 그들의 법조인으로서의 신분을 정해주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수많은 개천에 살던 이무기들은 용이 되기 위한 유일한 동아줄로 몇 년이나 그 일에 매달렸다. 그들이 판사가 되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했는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던가 ‘아홉 명의 피의자를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배움의 과정에서 익혔던 내용들을 뼈에 새기고 실천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미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부터 그들의 비참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부모대에서 결코 바꿔줄 수 없는 그들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신분을 한 번에 역전시켜 도약시키려는 목적으로 오로지 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거머쥔 성과들로 인해 그들이 이전에 시험을 준비하던 사회적, 경제적 신분이 시험을 패스하고 난 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결코 그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시험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개천표 용이라고 나온 이들이 갖춘 것이라고는 뛰어난 머리와 시험 성적밖에 없어 시골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내세울 집안은 고사하고 나중에 팔려가는 장가를 가게 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아내 집안의 어른들과 상견례를 할 때, 부모에게 확실한 신분 차이를 넘어서 데릴사위 신고식을 하는 것은 눈을 질끈 감고 넘어가야 할 통과제의에 불과했다.

이전에 한번 사례로 언급한 바 있지만, 내가 대학을 다닐 즈음 맥주보다는 막걸리를 즐겨마시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았던 모 대학 근처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가게 사장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로 인해 먹고살았다면서 지방에서 올라와 돈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내놓겠다며 많지는 않지만 그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해주었다. 경성제대 다음으로 사법고시 합격률이 두 번째로 높았던 그 대학은 사법고시에 목을 매고 공부하는 이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세월이 지나 그 사장의 가게가 줄어든 수입과 각박해진 상황으로 인해 가게문을 닫을 지경에 되었다는 소식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언론에서는 수년간 그렇게 장학금을 받아 지금은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검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적지 않은 이들을 수소문하여 당신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줬던 사장이 지금 너무 곤란한 처지에 놓였으니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제안 아닌 제안을 했다. 판검사가 된 그들은 그 내용을 취재진을 통해 듣고 나서 자신이 바쁘니 이런 전화받을 시간이 없다면서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돈이 없어 배가 고파 제대로 먹지 못하던 때에, 과외라고 알바를 하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집중할 수 없으니 그것조차 하지 않겠다고 올인을 하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때 많지는 않지만 당장 밥을 먹고 과외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용돈을 장학금으로 지원해주었던 사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취재진의 안쓰러워하는 얼굴을 맞대며 웃어 보였더랬다.

짐승도 덫에 걸려 있던 자신을 도와주거나 배고플 때 자신에게 먹이를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다.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고서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변해있으니 자신이 어렵고 궁핍했던 과거의 일 따위는 상기시키지 말라며 쌩까는 존재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간뿐이다.


그들이 배움이 부족하거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검찰에 검사랍시고 들어가 성매매를 단속하는 특별팀의 회식모임으로 아가씨들이 나오는 술집에 가서 부장의 지저분한 모습에, 넥타이를 머리에 묶고 탬버린을 흔들며 목청껏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자신의 출세욕을 불태웠을 것이다. 


근엄한 법복을 입고서 자신의 아버지 뻘이나 되는 노인이 억울하다고 법정에서 피의자에게 언성이라도 높일 때면 ‘원고!’ 혹은 ‘~씨’라고 되레 윽박을 지르며 정숙을 요구하고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을 보이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이 앉아 있는 실제로도 훨씬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음을 어떻게든 확인받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전직 판사였다면서 전관 변호사로 돈을 챙기는 것도 부족해 여당의 눈에 들어 정계라도 데려가 주지 않을까 싶어 방송에 얼굴을 들이미는 추악한 얼굴로, 당당하게 자신이 미국에 놀러 갔다가(이렇게 쓰고 '연수'라고 읽는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구경 갔을 때 여권을 챙기지 않아 놓고서, 버젓이 한국어로 적힌 판사 신분증을 내밀며 자신이 판사라고 강조했더니 경비원이 넙죽 고개를 숙여 통과시켜주더라,라고 떠들어대는 이에게서는 그가 가진 인생의 결핍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자의 시대 위정자의 눈에 들기 위해 그나마도 얄팍한 한 줌의 지식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만이 전부가 아니다. 시대를 거듭하며 어떻게 해서든 국가시험에 통과하여 지금의 자신의 위치에서 ‘한 번에’ 일약 도약하여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동기 자체가 그들이 그 이후에 보이는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배우지 못해서 모르면 배우면 되니 가르침을 줄 수 있지만, 배우고 나서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때리고 끌고 다니며 실천을 강요할 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겠다며 고작 한 줌도 안 되는 그 알량한 지식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가한다고 한들 그것이 와닿을 리 없다.


소년 급제를 하여 아무것도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에서 오로지 공부만으로 성적만으로 팔려가는 장가를 가서 하필이면 돈만 많고 머리가 없는 아내의 머리를 닮아 공부도 못하는 자식들에게 권력을 승계하겠다고 만든 것이 현대판 음서제 ‘로스쿨’이다. 그렇게 판검사는 바라지도 못하고 개천표 동지들끼리 자식들을 뒤섞어 서로의 로펌에 보내서 경력을 만들어주는 시대까지 와버렸다. 

당신이 로스쿨까지는 넘보지도 못할 수준이라 해당사항이 없다고? 위가 그리 혼탁하고 진흙탕에 구린내가 진동하는데 소시민이랍시고 아닌 척하는 당신이 사는 아래는 맑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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