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25. 2022

나 혼자만 잘나서는 결코 조직을 먹여 살릴 수 없다.

히어로들이 결국 어벤저스로 합치는 이유를 모르는 자들에게.

子言衛靈公之無道也, 康子曰: “夫如是, 奚而不喪?” 孔子曰: “仲叔圉治賓客, 祝駝治宗廟, 王孫賈治軍旅. 夫如是, 奚其喪?”
孔子께서 衛 靈公의 無道함을 말씀하시니, 康子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데도 어찌하여 지위를 잃지 않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仲叔圉는 빈객(外交)을 다스리고 祝鮀는 宗廟를 다스리고 王孫賈는 군대를 다스린다. 이와 같으니 어찌 그 지위를 잃겠는가.”

이 장은 공자가 노(魯) 나라 애공(哀公) 11년(B.C 484년), 노나라로 다시 돌아온 이후의 기록이다. 천하 주유를 마친 공자의 말년에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季康子)와의 대화는 <논어>에 생각보다 많은 부분 눈에 보인다. ‘위정(爲政) 편’ 20장, ‘옹야(雍也) 편’ 6장, ‘안연(顏淵) 편’ 17장부터 19장까지 3장 등이 모두 계강자와 공자의 문답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전 공부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공자가 위정자들과의 문답을 하며 주로 완곡하지만 묵직한 훅을 쨉처럼 날리는 대화방식은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천하 주유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의 공자의 말하기에는 이전과는 약간 다른 공기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직접 등용되어 세상을 바로잡고 천하를 바로 세우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말년을 수긍하고 인지하면서 더 많은 올바른 제자들의 양성과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겠다는 쪽으로 맞춰지면서 준비된 선수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고문의 입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말년의 공자와 계강자(季康子)의 대화가 적지 않게 실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고국,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에게 있어 당시 위정자들의 사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계강자였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계강자(季康子)의 질문 속에서 그가 가진 생각이나 우려 등이 당대 위정자라고 하는 이들의 딱 고 정도 되는 수준이었기에 대표적으로 공자의 완성된 철학으로 일침을 가하는 가르침을 정리하듯 남겨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장에서 계강자의 입을 빌어 언급되는 위(衛) 나라의 무능한 군주, 영공(靈公)은 공식적으로는 처음 <논어>에 언급되지만, 이미 그는 물론 그와 관련된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이야기는 이제사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설명된 바 있다. 심지어 다음으로 공부할 편명이 ‘위령공(衛靈公)’이니 당시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의 사례가 얼마나 많이 언급되어 유명했는지는 새삼 살펴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중요한 것은 딱 일반인 수준 정도밖에도 미치지 못하는 계강자의 생각이다. 위령공(衛靈公)의 무도함에 대해서 지적했더니 마치 스승의 빈틈이라도 발견한 재기 발랄한 제자처럼 바로 공자에게 반문한다.


“그렇게 무도(無道)하다 하시니, 그런 자가 어떻게 군주의 자리를 잃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 질문이 갖는 의미는 공자의 지적에 모순을 발견했다는 듯이 반문하는 의미도 있을 수 있겠으나, 더 넓게 보면, 계강자(季康子)가 당시 실권자(實權者)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워하였기에 궁금했던 핵심을 물어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당시 ‘군주의 자리를 잃다.’라는 표현은 쓰는 경우는 단 한 가지, 군주가 살해당하는 경우밖에 없다. 역성혁명에 해당하는 내부 쿠데타를 통해 제거되거나 다른 나라의 침략을 통해 나라 자체가 망해버리거나 하는 것이 바로 그 경우였다.


계강자(季康子)는 군주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막후에서 군주를 가벼이 보며 권력을 전횡하고 있었다. 당연히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는 언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을 다른 이들이 노리고 찬탈하려 들지에 대해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덕(德)으로 키워나갔다면 몰라도 힘으로 누르고 자신의 권위만을 강조한 입장이라면 더더욱 언제 자신과 똑같은 탐욕을 가지고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세력과 인물이 나타날지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그는 성인(聖人) 공자가 그렇게까지 무도(無道)하다고 폄하했던 위령공(衛靈公)이 어떻게 왕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나라의 강건함을 지켜낼 수 있을지 그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도 한 켠에는 있었을 것이다.

주자는 주석의 글자 해석을 통해 계강자가 가장 두려워했을 부분을 완곡하게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喪(상)’은 지위를 잃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의 대답은 ‘헌문(憲問) 편’의 핵심 논리인 ‘인재 등용’에 부합하는 가르침으로 나오게 된다. 무도(無道)하고 무능(無能)했던 위령공(衛靈公)이 군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참모로 삼아 그들을 믿고 권력을 일임하여 자기 혼자서 권력을 전횡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공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세 사람의 위나라 신하들과 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설명한 이유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중숙어는 바로 孔文子(공문자)이다. 세 사람은 모두 위나라 신하이니, 비록 반드시 어질지는 못하였으나 그 재주가 쓸 만하였고, 靈公(영공)이 이들을 등용함에 또 각각 그 재주에 맞게 하였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세 사람의 신하가 그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에, 공자의 가르침이 방점을 찍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주자의 주석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은 강조하자면, 굳이 세 사람의 분야를 하나하나 열거한 것은 그 설명을 통해 계강자가 깨달음을 얻으라는 공자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필요한 분야를 대표적으로 나라밖에서 오는 손님 접대를 잘하는 외교와 종묘(宗廟)의 제자를 잘 관리하는 예(禮)와 기강을 세우는 부분과 군대를 잘 다스려 나라를 위태롭지 않게 방비하는 국방을 직접적으로 담당했던 세 인물을 들어 애매모호한 원론적인 설명을 한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을 계강자가 알아들으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이 의미를 이해한 윤씨(尹焞(윤돈))는 이 장의 가르침을 ‘헌문(憲問) 편’의 본지(本旨)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위 영공의 무도함은 마땅히 지위를 잃어야 할 것이나 이 세 사람을 등용하여 오히려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으니, 하물며 道(도)가 있는 군주가 천하의 현재(賢才)를 등용함에 있어서이겠는가. 《詩經(시경)》에 ‘人才(인재) 등용을 막강하게 하면 사방이 순종한다.’ 하였다.”


이미 우리는 앞서 9장에서 정(鄭) 나라의 세 신하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등용하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잘 이끄는 것의 절반 이상은 성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공부한 바 있다. 사람만 바뀌고 시대만 조금 바뀌었을 뿐, 결국 위(衛) 나라도 세 사람의 인재들이 각자 특화된 분야에서 외교, 내무, 국방을 제대로 건사했기에 군주인 위령공(衛靈公)이 무도(無道)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보여줌으로써 역사가 반복되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깨달음 역시 결국 위정자가 보여야 할 것 가장 우선시 되는 스스로를 다스림 외에도 올바른 인재의 등용과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이 엄청나게 뛰어난 인재라 할 수 없고, 위령공(衛靈公)이 훌륭한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그 정도만으로도 임금의 지위를 잃지 않고 나라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군주가 바로 서 나라에 도(道)가 있고, 그러한 군주가 제대로 된 인재를 발굴하여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지향한다면 천하를 제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일반인 수준보다도 조금 떨어지는 너무도 인간의 본능에 충실했던 계강자가 공자의 이러한 의도를 얼마나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공자가 천하를 주유한 끝에 얻은, 현실적이면서도 당대의 위정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부분이 인재 등용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공자가 이 대화에 앞서 계강자에게 위령공(衛靈公)의 무도(無道)함에 대해 강조한 것은 그가 군주로서 부족한 점을 지적함으로써 계강자가 반면교사를 삼으라고 한 것이지 영공(靈公)이 정말로 무능하기 그지없는 군주였는가에 대해서는 이 장의 행간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앞뒤 논리를 따져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도의를 갖추지 못한 무도(無道)한 군주가 무능한 군주라고는 볼 수 없다. 무능하기만 한 군주라면 원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세 사람의 신하를 적재적소에 우연히 혹은 운이 좋아서 배치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자가 위령공(衛靈公)의 무도(無道)함을 지적한 것은 그가 이룬 성과에 비해 부족한 부분을 권계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지 정말로 무능하기 그지없는 군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예 기본을 갖추지 못한 무능한 군주였다면 계강자의 지적처럼 이미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지 못할 역사의 뒤안길에 흘러가버렸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자질을 갖추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의 소재로도 언급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 가르침의 방점은 그렇게 부족하여 공자의 권계를 받은 위령공(衛靈公)마저도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는 행위를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나라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평균점을 겨우 넘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하고자 한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초(楚) 나라와 한(漢) 나라의 천하를 다투는 싸움에서 다시 증명된다. 모든 능력을 갖춘 한 몸에 갖춘 히어로 형 항우(項羽)와 신분에서부터 능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무능(無能)하다고까지 보일 여지가 있는 유방(劉邦)의 천하 쟁탈전은 결국 능력 있는 참모 어벤저스를 거느린 유방(劉邦)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고 유방(劉邦)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자기 집안을 단속하거나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것에서는 쉽게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가정을 건사하고 작은 마을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도 인재의 등용과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착각한다. 능력이 있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휘두르고 해결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가 뛰어난 히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분석해보면, 항우가 유방에게 패배하고 죽음을 맞게 된 것은, 히어로로서의 능력이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능력을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해서 현명하게 이해하고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조차도 객관화하여 자신조차 인재의 한 사람으로 활용했더라면, 그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그들을 믿고 조직화하여 함께 전문화 분업화하는 것을 간과하였기에 그는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인해 권토중래(捲土重來)조차 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사장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공부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자신이 배우고 익혀 안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가 인재인지 어느 분야에 특화되어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보다 더 나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런 인재를 내가 품을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수양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이들의 경우 개인의 능력과 조직의 효율성을 간혹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업무를 시키든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는 한 사람의 능력자를 갖춘 회사와 범범하지만 일사불란하게 그 범범한 이들을 지휘하는 리더십을 가진 경영인이 있는 회사의 격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결국 혼자서 회사의 모든 업무를 할 수는 없다. 그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필요한 지원업무를 해줄 적재적소의 동료가 필요하고 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인사권자의 리더십이다. 리더십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돋보이게 하는 용인술(用人術), 즉, 인재 등용의 기술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찾으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바로 그것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정한 인재의 등용은 자신을 낮출 때 이루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