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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4. 2022

진정한 인재의 등용은 자신을 낮출 때 이루어진다.

자신보다 뛰어난 자는 먼저 젖혀두는 찌질이들에게.

公叔文子之臣大夫僎, 與文子同升諸公, 子聞之曰: “可以爲文矣.”
公叔文子의 家臣인 大夫 僎이 文子와 함께 公朝에 올랐는데, 孔子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시호를 文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장은 앞서 14장에서 공자에게 인정을 받았던 인물, 공문숙자(公叔文子)가 등장한다. 단순히 공문숙자(公叔文子)가 자신이 가신으로 데리고 있던 인물을 추천하여 조정의 대신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지나칠 수 있으나 그 상황을 곰곰이 뜯어보면 공자가 왜 공문숙자(公叔文子)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고 허여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그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주자의 주석을 살펴보자.     


‘臣(신)’은 가신이요 ‘公(공)’은 공조이니, 〈문자가〉 僎(선)을 천거하여 자신과 함께 나아가 공조의 신하가 됨을 이른다.     


상황을 정리하면, 공문숙자(公叔文子)는 大夫인 僎을 가신(家臣)으로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공문숙자(公叔文子)는 위나라의 가로(家老)였던 인물로 여러 가신을 두고 있던 이른바 실권자(實權者)였다. 앞에서도 몇 차례 설명한 바 있지만, 군주가 아닌 이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하 역할을 하는 인물로 가신을 두었는데, 가신(家臣)은 엄밀하게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닌 개인을 위해 고용된 인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공무원이 아닌 개인 사기업에 고용된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장에서 공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자신의 부하로 데리고 있던 大夫인 僎을 공식적으로 공무원으로 추천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집정(執政) 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도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공자의 시대는 상하 신분의 구분이 굉장히 엄격하던 시기였다. 예컨대,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던 사람이 자신이 직접 뽑아 자신의 부하직원으로 계속 데리고 있던 사람을 최고 경영자에게 추천하여 자신과 같은 임원직으로 끌어올려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신분의 구분이 명확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하로 데리고 있던 자를 동료에 해당하는 위치에 끌어올리는 것은 어지간한 대인배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 않고 “공문숙자(公叔文子)의 시호를 ‘文’이라고 할 만하다.”라는 표현으로 극찬한 것은 공자의 평상시 어법으로 보건대는 아주 큰 칭찬을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시호를 공자가 지어준 것은 아니지만, 시호에 문(文)이라는 것을 쓰는 것은 유가(儒家)의 전통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시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시호를 받을만한 인물이라고 인정(허여) 한 것이니 그야말로 극찬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文(문)이란 이치를 따라 문장을 이룸을 이르니, 諡法(시법)에 또한 이른바 ‘백성에게 작위를 내려준 것을 ’문‘이라고 한다.’는 것이 있다.     


공문숙자(公叔文子)가 인재를 추천한 방식 하나만으로 시호가 문(文)으로 내려진 것이 당연하다고 칭찬한 공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 홍씨(洪興祖(홍흥조))가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가신의 천한 신분을 끌어올려 자신과 함께 조정에 나란히 선 것은 세 가지 선이 있으니, 사람을 알아본 것이 첫째이고 자신의 귀함을 잊은 것이 둘째이고 군주를 섬긴 것이 셋째이다.”     


‘헌문(憲問) 편’에서 일관되게 인재 천거의 방식이나 진정한 인재 등용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인재는 어떻게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기준에서 보면, 이 장에서 공자가 공문숙자(公叔文子)를 허여 한 핵심 포인트는 아주 명료하다.       

진정한 인재를 천거하고 등용하는 데 있어 사심(私心)은 작용할 수 없으며, 자신보다 더 나은 인재를 자신과 동급으로 혹은 자신보다 더 높이 천거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인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두 장에 걸쳐 언급되었던 관중(管仲)이 세상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포숙아(鮑叔牙)의 천거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관중(管仲)을 처형하라고 명했던 제 나라 환공의 오른팔이었던 포숙아(鮑叔牙)는 단순히 죽마고우(竹馬故友)로서의 사심(私心)을 뛰어넘어, 단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재를 천거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상 자리를 흔쾌히 양보하여 그 자리에 관중(管仲)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친구를 죽이는 것에 차마 인정상 용납되지 않아 목숨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관중(管仲)이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인재라고 천거한 것이다. 등용은 제 나라 환공이 한 것이지만, 결국 관중(管仲)이 제2의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친구 포숙아(鮑叔牙)의 냉정한 결단과 추천으로 인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숙아의 초상

이 장에서 공문숙자(公叔文子)의 행동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자신의 부하였던 자가 군주의 눈에 우연하게 들어서 자신과 동급이 되어 최고 관리직에 올라 조정에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불쾌한 일일 수 있다.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기에 자신의 부하였던 이가 어느 순간 올라와 자신과 동급이라고 언행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고개를 끄덕일 이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문숙자(公叔文子)는 그 어려운 일을 스스로 군주에게 추천하여 함께 조정에 올라 나라를 위해 이 인재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결단한 것이니 공자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넘어 그것을 결행하는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공문숙자(公叔文子)를 통해 역설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자가 ‘헌문(憲問) 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가르침은 그가 천하 주유를 하며 몸소 부대껴야만 했던 편협한 찌질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통해 본 경험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성인(聖人)이라고 칭송받는 공자를 자신의 나라에서 수용하겠다고 여러 군주들이 침을 흘리는 듯했지만, 실상은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중용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공자를 품는 나라가 공자의 지원에 힘입어 천하를 제패하게 될 것을 우려한 여러 책사들의 이간질과 책략이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 나라의 군주가 공자를 중용하게 될 경우 지금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지위가 당연히 공자의 밑으로 귀속될 것을 우려한 찌질한 당대 권력자들의 얄팍한 계산방식이 반영된 이유가 가장 컸다는 것을 공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냉정하게 사실관계만 놓고 판단해보면 그럴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문제 해결 능력이 더 뛰어난 이가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전쟁을 잘하는 이가 장군의 자리에 올라야 하고, 외교문서를 잘 작성하고 외교능력을 발휘하는데 특화된 이가 사신으로 가서 군주를 대신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들 모두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능력이 안되면서 적당히 지연, 학연, 혈연을 매달려 겨우겨우 연명하는 자들은 능력 있는 자들을 폄하하며 늘 이렇게 구시렁거리곤 한다.


“능력이 출중하면 뭐해? 인간부터 되어야지, 인성이 안되니 그렇지.”     

당신의 입에서도 나왔을지 모르는 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도 부메랑처럼 적용된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의 논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간적으로 턱없이 부족하여 중용되지 못하였고, 자신은 반대로 인간관계가 무난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은 공자의 시대, 공자를 질시하며 자신의 밥그릇이 날아가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던 이들이 논리와 맞닿아 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들은 노력을 해서 능력을 갖추는 것을 택하기보다는 자신이 부족한 현재의 상태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부족한 바닥을 드러내도록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두려워하다 못해 공포까지 느낀다. 그릇이 작고 찌질한 자들이면서 그에 맞지 않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일수록 그런 행태는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다.     


함께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동문이 되었을 때 함께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격차라는 것이 벌어지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사람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이유로 질투를 느끼고 상대를 질시하게 된다.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은 찌질하기 그지없는 본성의 바닥을 드러낸다.     

같이 배움을 시작한 이들도 그러하지만, 엄청난 자질을 가진 이를 가르치는 스승의 경우에도 그런 딜레마는 똑같이 겪게 된다. 처음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몰랐었는데 그 그릇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스승은 확실하게 알게 된다. 그렇다면 천하의 인재를 얻어 처음 가르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어느 정도 기본기를 갖추고 더 크게 만들어줄 스승을 찾아 제자를 소개하고 더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데 대개의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들은 그저 직업으로 가르칠 뿐, 천하의 영재를 알아볼 안목을 갖추고 있지도 못할뿐더러 행여 그런가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그 제자를 질시하거나 그 제자가 자신을 버리고 더 큰 스승을 찾아가지 못하게 자신이 그 영욕을 누리겠다고 몽니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은 공자의 시대에서 수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듯하다. 회사라는 조직에서도 그러하고, 배우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상아탑의 학계가 그러하며, 지저분 너저분한 정치계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고, 천재들이 출몰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예술계통에서도 일상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내 후임을 뽑거나 내 부하를 뽑을 때, 당연히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그 자리에 요구되는 능력이 될 것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먼저 되어있어야 하니 인성을 봐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자신보다 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거나 자신의 부정비리에 대해서 밝혀버릴 수 있는 사람을 미연에 제거(?) 하기 위해 자기 사람이라는 이를 뽑기 위해 혈연, 지연, 학연을 끌어들이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 수천 년 전 공자의 시대보다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증거인 셈이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명했지만, 본능이 우선시 되는 동물마저도 합리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도태된다. 인간이 둘 이상 모여 조직이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위계가 생기고 권력을 위한 줄 서기가 벌어진다. 능력도 없으면서 사회와 조직을 좀먹는 찌질한 인간들이 늘 말하는 것이 어차피 능력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오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든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궤변이다.     


정말로 그런가? 위에서부터 내가 능력이 있는 이를 인재라고 표현하였지만, 찌질한 이들이 그렇게 궤변에 적용하기 좋아하는 인재가 갖춰야 할 인성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공자가 그렇게 강조에 마지않았던 ‘도의(道義)’를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우선시하는 자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때 그것을 목도하고서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자질이 가장 중요한 인성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인성을 빙자하며 양심의 목소리를 내려는 자들을 뽑으면 자신이 곤란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자신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사람을 가려내려는 자들이 우리 사회와 조직을 좀먹는 자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단죄해야 할 경찰, 검찰 조직을 필두로 그들의 처벌을 결정해야 할 법원 조직에 이르기까지 결국 자기 일신의 영화(榮華)를 유지하겠다며 그 지저분한 세치 혀를 놀리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대한민국의 작금의 현실은, 나라를 말아먹든 뭐하든 사욕(私慾)을 채우겠다고만 살아가는 몇몇 정치인들이 망쳐버린 것이 아니라 그 아래 소시민을 빙자하며 사회 전반을 갉아먹는 당신과 당신 주변에서 자신은 아니라는 듯 두리번거리는 그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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