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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4. 2022

SNS에 떠들어대기 전에 실천으로 성과를 보이란 말이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子曰: “君子恥其言而過其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말을 부끄러워하고(조심하고) 행실을 말보다 더한다.”     

이 장의 내용은, 앞서 공부했던 ‘이인(里仁) 편’의 22장에 나온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내지 않은 것은 실천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라는 대의와 맥을 함께하는 가르침이다.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이나, ‘행실을 말보다 더한다.’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으로 의아할 수는 있겠으나, 그 의미는 대체로 말보다 행실(실천)이 앞서야 하는데, 실천도 하기 전에 말이 앞서는 것을 경계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주자는 ‘恥(부끄럽다)’는 표현과 ‘過(더한다)’는 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풀이를 하여 배우는 이들의 의문을 풀어준다.       


‘恥(치)’는 감히 다하지 못하는 뜻이요, ‘過(과)’는 有餘(유여)하고자 하는 말이다.     


주자는 恥其言과 過其行의 두 가지를 분리된 개념으로 나누어, 恥를 ‘감히 다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미 말로 내뱉어 공언한 바가 있어 그 약속된 바를 실천하지 못할까 늘 전전긍긍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노력을 경주한다는 뜻으로 풀이한 것이고, 過란 ‘넉넉하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중용(中庸)>에, ‘부족하기 쉬운 것인 행실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고, 넉넉하기 쉬운 것인 말은 감히 다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축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문의 글자를 그대로 살려 풀이하면, “군자는 그 말을 함부로 다 해버리지 아니하고, 그 행동을 여유롭게 남겨둔다.”는 정도의 의미로 의역을 하게 되면,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지나침을 부끄러워한다.’라는 뜻, 되시겠다.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낸 후한(後漢) 말기 왕부(王符)는 자신이 찬한 ‘잠부론(潛夫論)’에, “공자는 말이 행동보다 지나친 것을 미워했다.”라고 인용한 바 있다. <예기(禮記)>에, “군자는 말만 있고 덕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덕이 있어도 행실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한 구절 역시 이와 같은 대의(大意)와 같은 가르침을 표방한 것이다.     


수많은 <논어>를 풀이하고 해설을 표방한 현대 해설서들이 간략하고 명쾌하게 설명한 것처럼 그저 이 장의 의미를, ‘군자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였다.’라고 풀이한 것이 틀린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조금, 아주 조금만 깊이 들어가서 이 가르침을 살펴보면, 다른 장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말한 바를 지키라고 하는 것인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인지, 아니면 실천을 하는데 힘을 쏟으라는 것인지 명확하게 초점을 맞추기가 여의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주자의 입장을 풀이하면서, 주자는 이 구절을 두 행동으로 분리하여 해석하였다고 설명한 바 있다. 물론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언행(言行)’이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이루어진 가르침에 대해 주자가 놓칠 초심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하여 주자가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의문을 갖는 것이 지금 배우는 자들의 올바른 자세라 생각한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이번에는 뒤에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취해보기로 한다. 만약 말과 연관 지어 하나의 문장으로 본 것이 아닌 분리된 두 가지의 가르침이라면, 행동을 하는 데 있어 경계의 가르침을 주면서, 왜 ‘행동에 여유(여지)를 둔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      

결론부터 내놓자면, 앞에서 예를 들었던 <중용(中庸)>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행동은 늘 부족하기 쉽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인가? 바로 본래 자신이 배우고 익힌 올바른 가르침에 온전히 100% 채워지기에는 늘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교과서’와 ‘경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언제나 올곧음을 가리키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일러준다. 그런데 배우는 자들은, 그것을 머리로 배우고 익힌 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자신이 그것을 배우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그 과정을 겪고 군자의 경지와 성인의 경지에 오른 공자이기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와 같은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 여유 있게 해야 한다(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배우고 익힌 것을 120%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지를 남겨둔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고 행하여도 실제로는 100%가 되기 어려운 것이 행동(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다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은, 시간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 이미 부끄러워함이 나왔으니 말을 뱉은 다음의 상황을 가리키는 의미일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것이 옳다. ‘삼가다’라는 표현을 썼다면 일반론적인 가르침으로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말라’는 의미만으로 한정 지을 수도 있겠으나 이 장에서 사용한 ‘恥(부끄럽다)’는 단어의 강조점은 이미 말한 부분에 대해서 부끄러워한다는 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앞에 공부하면서 ‘恥(부끄럽다)’는 단어의 표현이 갖는 의미가 현대어의 의미와 얼마나 결이 다른 용어인지에 대해서는 누차 강조한 바 있다. 특히, 이 장의 주어는 군자(君子)이다. ‘恥(부끄럽다)’는 행위는 뉘우칠 줄 아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고급 감정이고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는 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상대의 강요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서가 아닌 스스로가 돌아보았을 때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야 할 세월이 한참이 남아 있는 어린 생명들이 졸지에 한 장소에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참사가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현장에서 상관에게 상관을 통해 윗 부서에 그리고 대통령에게까지 이른바 체계적인 시스템에 의해 보고체계라는 것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 이 나라가 정상이 아니라는 반증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행여 자신들에게 책임추궁이 쏟아질세라 바짝 엎드려 눈치만 살피며 제 살길을 찾으려 숨만 쌕쌕거리며 내쉬고 눈알만 희번덕거리고 있다.     

그 와중에도 외신기자들 앞에서 총리라는 정치적 지위조차 망각하고 농담을 했다고 말하는 자부터, 그 옆에서 자신도 할 말이 있다면서 ‘경찰병력이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망언을 스스럼없이 내뱉고 궁지에 몰리고 몰려서 마지못해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라는 정말로 정치꾼다운 멘트를 날리는 행안부 장관도 있었다.     


검찰과 경찰은 격이 다르다며 매번 선을 긋고 경찰국을 신설하여 경찰을 행안부 지휘 아래 두어는 검찰공화국의 선두에 있는 법무부 장관은 자신들의 지휘가 잘못되었다고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고를 했음에도 제대로 출동과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찰을 조져야 한다면서 후안무치한 얼굴을 내밀며 당당히 인터뷰에 대고 떠든다.      


사건 당시 진보단체들의 대통령실의 시위를 막는 최전방 지휘를 한다고 그곳에 나가 있던 용산경찰서장은 졸지에 일선 책임자라는 멍에를 지고 대기발령을 받아 경질되어 잘려나갔다. 대통령실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최전방에 나가 있다가 잘린 그는 과연 억울하지 않을까?      


경찰청 본청에서 갑자기 손절하고 꼬리 자르기로 자신들의 목을 누군가 잘라버리기 전에 움직이겠다며 나선 압수수색 등에 발끈하여 이태원 파출소의 직원이 경찰청 게시판에 대놓고 ‘우리가 상위청에 기동 병력을 요청했는데, 서울청과 경찰청은 응하지 않아 놓고서 우리만 턴단 말인가?’라고 억울하다고 고개를 버쩍 쳐들어 보였다.      

백성들을 남겨두고 남한산성까지 도망친 왕을 곁에 두고서도 서로 간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눈치만 살피며 그 와중에도 정쟁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왜구가 쳐들어와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아녀자들까지 내 식구들을 지키겠다고 전쟁의 최전선에 나섰을 때도 후방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글깨나 읽은 작자들이 벌인 정쟁이 그러하였으며, 일본과 러시아, 중국, 서구 열강까지 버젓이 궁까지 짓밟고 들어와 왕을 능멸하고, 일본 낭인들이 칼을 들고 들어와 국모(國母)를 죽이는 일이 벌어져 나라가 없어지는 지경을 맞을 때도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그 사특한 세 치 혀만을 놀려대며 자신들의 지위를 잃을까 자신들의 부와 명예가 무너져버릴까만을 걱정했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꾼들과 과거 부끄러운 역사의 모습이 그 어느 하나 한치 다른 구석이 있어 보이는가?      


검찰 공화국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장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의의 다른 기준을 논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1년 안에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질거라고 하다가 일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장받겠다며 그 줄 뒤에 냉큼 선 이가, 이제까지 어디에서 무얼 하다가 지금 나타난 히어로인 양 SNS에다 대고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을 경질해서 공무원사회에 공무원들이 잘못을 해서도 정치적인 스텐스를 취하는 것이 먹힌다는 사인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로만 떠든다.     

‘말로만 떠든다’함은 그가 말로 떠드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을 실행하였고 그 실행이 어떤 성과로 도출되어 국민들을 대변하고 도왔는지를 묻고자 함이다. 수해가 났는데 정치에 끈을 놓지 못해 안달난 ‘전(前)’ 여자 국회의원의 지역에 달려가 비가 좀 내려서 그림이 잘나왔을면 좋겠다는 망언이 낄낄거리며 오간 현장에도 그 역시 있었지만 그는 수줍은 탓이었는지 어떤 일침도 일갈도 날리지 않았다.      


파란당에서 잠시 임시 대표직으로 꼭대기에서 비행기를 탔던 지방대 출신 여자아이는, 자신이 잊히는 것이 두렵고 안타까운 나머지 SNS로 내내 자신을 잊지 말라며 여전히 비행기 끝자락의 줄을 놓고 싶지 않아 징징거린다. 처음 학교 과제하듯 성범죄를 치열하게 파고들어 취재하는 초심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계속해서 파헤쳐 취재자료를 빼박 증거로 내놓는 것이 SNS에 기존 정치인들처럼 떠들어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조언은 이제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파란당의 3선 여자 국회의원실에, 당신 지역구의 경찰서에서 현역 목사가 돌 갓 지난 아기를 던지려고 했던 아동학대를 은폐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바로잡아 달라고 했을 때 제보자를 정신병자라고 취급했던 보좌관을 보유한 그 의원실은 당시 무려 국회 행안위원장의 직위를 가진 곳이었다. 파란당 내에 제보해도 이런 일에 자기 정치적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인지 경찰에게 모종의 아킬레스 건을 잡힌 탓인지, 그 사실을 당시 비대위 대표를 맡고 있던 지방대 출신 여자아이에게 알렸다.     


새벽에 보낸 메일을 아침 7시가 조금 넘어 확인한 그 여자아이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었다. 어제 공부한 내용과 같이 자신의 위치(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책무만을 제대로, 온전히 수행하기만 하더라도 사회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굴러가며 국운(國運)이 다했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국민들에게 회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의 그 위치에서 영수회담을 해라마라할 위치가 안됨을 누가 그녀에게 일러줘야 깨달을까?    


현역목사 아동학대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연락한 지인에게, 매일아침 음모론을 목놓아 부르짖는 털보가 '지금은 파란당의 입장에서 경찰이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걸 묵과해줘야 하는 상황인데 경찰의 부정부패를 밝히면 곤란한 타이밍이야'라고 대꾸하며 모른 척을 했다.


여당의 3선 위원씩이나 되는 행안위원장이라 불리던 여자 국회의원도, 비대위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2030을 대변하여 젊은 정치를 표방하겠다고 으쓱거리던 여자아이도 만약 그 위치에서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지금처럼 SNS에 매달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를 목놓아 부르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그때 그러했다면 지금은 다른가?     


책임자들에 대한 추궁과 반성보다 이 참사의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먼저라며 세 치 혀를 놀려대는 정치꾼들의 후안무치함은 이제 모럴해저드 현상을 넘어 인간성의 마비를 의심하게 만들 지경에 접어들었다. 여당이랍시고 불똥이 어디까지 어떻게 튈지 모른다며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을지 자신은 소신 있고 양심이 있는 자들처럼 SNS에 되나 가나 적어대고 카메라 앞에서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정의의 화신인 양 인터뷰를 한다.     

정치권의 번호표 하나 받을 요량으로 케이블에 나와 패널을 자처한 정신줄을 놓은 작자가 하는 말에 기도 차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지적하면서 책임을 지라고 하세요!”

정인이 사건 때 졸지에 양천경찰서장에서 잘린 총경은 자신이 수사한 사건이라서, 자신이 금품 향응을 제공받았기에 책임을 졌던가? 용산경찰서장은 책임을 지고 자르는 건 당연하다면서 대통령이 무슨 책임을 왜 져야 하냐고 부르짖는 자가 과연 정상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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