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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7. 2022

겸손이란, 예의상 그런 척하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란다.

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子貢曰: “夫子自道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의 道가 셋인데 나는 능한 것이 없으니, 仁者는 근심하지 않고 智者는 의혹하지 않고 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子貢이 말하였다. “夫子께서 스스로 하신 謙辭이시다.”     

이 장에서 지인용(智仁勇)에 대한 공자의 기준을 언급한 부분은, 앞서 공부했던 ‘자한(子罕) 편’의 28장에 나온 내용을 다시 한번 원용한 것이다. 공자가 군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으로 지인용(智仁勇)을 풀이한 내용인데, 그러한 공자의 말씀에 대해 뒤이어 자공의 주석과도 같은 설명이 덧대어져 있다.      


그런데 원용된 지인용(智仁勇)에 내용만 같을 뿐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당연히 스승인 공자가 말한 내용이 맞는데, 스승께서 스스로 말한 것이라는 내용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었는지, 그리고 지인용(智仁勇)에 대한 군자로서의 설명에 대해 설마 공자가 그것을 자부하기 위해 말했다는 식의 오해를 살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을 것을 눈치챈 주자는 같은 내용이지만 형태가 한번 지인용(智仁勇)을 언급했던 ‘자한(子罕) 편’의 내용과 어떤 점에서 결이 다른 말인지를 아주 짧은 설명으로 시작한다.


자책하여 사람을 勉勵(면려) 하신 것이다.     


군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 덕목인 지인용(智仁勇)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앞서 공자는 자신이 그중에서 능한 것이 어느 하나 없다고 말한다. 현대 한국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들이 그렇지만 한문 고문(古文)에서는 그 순서가 특히 중요하다. 그 용어가 갖는 의미가 순서와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는지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군자의 도(道)가 세 가지 있다고 말한 뒤,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겸사를 취하는 어순이 아닌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능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먼저 말하고 나서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은 그 가운데 들어간 말이 단순한 겸사가 아님을 눈치채라는 힌트에 다름 아니다.     

중급자 이상이 되어야만 눈치챌 수 있는 레벨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자공(子貢)이 그것을 겸사(謙辭)라고 부연한다. 당연히 겸손을 표하기 위한 말인데 그게 무슨 대단한 차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숙한 초심자들은 다시 한번 자공(子貢)의 한 마디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보라. 그렇게 의식하고 꼼꼼히 다시 보았을 때는 무릎을 치며 깨닫길 바란다. 자공의 한 마디에서 당신이 간과하고 스윽 지나쳐버린 주요 방점은 겸사(謙辭)가 아니라 ‘스스로’에 있단 말이다.      


주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행간의 의미를 눈치채고 알아들은 이들을 위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듯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더한다.     


‘道(도)’는 말함이니, ‘自道(자도)’는 겸사란 말과 같다.     


‘도(道)’라는 단어가 고문(古文)에서 ‘말하다’라는 동사로 사용되는 것은 특이한 예외적 사례가 아닌 지극히 일반적인 용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한 것이 겸사(謙辭)라고 다시 설명한 것은 자공(子貢)의 그 한마디가 왜 이 장의 말미에 붙어 있는지를, 겸사(謙辭)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눈 크게 뜨고 다시 확인하란 외침이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말이라는 의미의 ‘겸사(謙辭)’를 자기 입으로 스스로 하지 그러면 남이 하냐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항변을 할 참람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반문해주마. 자공(子貢)과 주자(朱子)는 그보다 무식하고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해서 그것을 강조했을까? 배우는 자의 자세는 이상하고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결코 그것을 대강 넘어가거나 자기 식대로 해석해버리는 오독(誤讀)의 우(愚)를 범하지 말라 하였다.     


자공(子貢)이 ‘스스로’라는 부분을 강조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 첫 번째는 단순한 겸사를 넘어선 반성의 의미로 스승 공자가 세 가지 덕목 중에서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그것을 갖추지도 않으면서 군자인척 거들먹거리는 가식에 가득 찬 자들을 권계하는 의미이다.     

성현(聖賢)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던 공자가 군자가 갖추어야 할 도(道), 세 가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아직 자신조차 그것 중에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고 단언하는 것은, 공자 이하의 허접한 위정자들이 감히 그것을 갖춘 군자라고 나대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자 일갈에 다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누군가에게 겸양을 보이기 위한 껍데기 겸사가 아닌 공자의 자기반성이자 더 높은 곳을 향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만 한다는 스스로의 태만함을 다잡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라는 방점의 단어가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덕목인 지인용(智仁勇)과 관련하여 결국 그 판단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스승의 의도를 배우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하라는 해설에 해당하는 힌트로 강조한 것이다.     


다시 한번 원문으로 돌아가 보자. 세 가지 덕목에 대한 공자의 설명을 보다. ‘어진 사람, 지혜로운 자, 용기 있는 자는 근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판단을 누가 하는가? 대개 이 가르침에 대해 공부가 깊지 않은 자들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래 보인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쉽다.      


그 사람이 근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 사람들은 늘 자기가 보이는 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근심이 없어 보이니 인자(仁者)라고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 여겨 그저 용자(勇者)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인용(智仁勇)이라는 덕목을 판단하는 기준이 상대적인 것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 공자는 지인용(智仁勇)이 어떤 개념인지를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잘못 시작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 개념은 당연히 그것을 지향하는 스스로가 판단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한참 공부가 부족한 이들이 보기에, 학문이 높고 수양이 깊었던 성현(聖賢) 공자가 전혀 근심이 없어 보이고 의혹함이 없어 보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듯해 보이지만, 그것은 아래서 자기 위를 보는 이들의 자기 판단일 뿐,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곳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며 걸어가고 있는 입장에서는 가야 할 길이 한참 먼 것이다.     


자신이 옆집에 사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좋은 집을 갖지 못한 것을 근심하고, 더 좋은 차를 사지 못하는 것에 안달 나 근심하는 자가 한 번뿐인 인생에 삐뚤어진 사회를 바로잡지 못하고 자신의 조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하는 자의 높은 이상이 보일 리 만무하다.     


바라보는 안목의 수준 자체가 다른데 그것을 설명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그것과 별개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보며 그저 질시하고 부러워하고 짜증 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군자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전의 기본적인 마음자세임을 공자는 이 짧은 스스로의 반성 형식으로 일깨워주고자 한 것이다.     


스승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까 싶어 자공(子貢)은 짧은 부연설명을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이 이해하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한편, 전술했던 바와 같이 글자 하나하나가 순서에 큰 의미 차이를 갖는다는 점에서 지인용(智仁勇)이라고 도덕 교과서에 나온 대로 내가 편의상 쓴 개념에 대해,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이 어떤 수순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까지 염두에 둔 학자도 있었다. 이 장을 보고 배우는 이들에게 군자로서의 덕목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들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깊은 뜻을 정리해준다.     


“덕을 이룸은 仁(인)을 우선으로 삼고, 배움을 진전함은 智(지)를 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夫子(부자)의 말씀에 순서가 같지 않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원문에 공자가 설명한 순서는 ‘仁-智-勇’이었다. 물론 설명방식을 보면 그것을 순서대로 단계별 설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까지 천착(穿鑿)할 필요는 없겠으나, 글자 하나 순서 하나도 의도를 가진 공자의 섬세한 가르침을 놓치지 말고 이해하라는 상세한 지침이다.    

  

공자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부연하자면, 仁者(어진 사람)가 근심하지 않는 이유는 그 마음이 병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知者(지혜로운 사람)가 의혹됨이 없는 이유는 사리(事理)에 통달해있기 때문이며, 勇者(용감한 사람)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義理(의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지인용(智仁勇) 중에서 인(仁)과 지(智)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덕을 이루는 방법으로 인(仁)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배움을 추구하되 지(智)를 우선 삼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의식과 방법을 순차적으로 익혀나가지 않는다면 역시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권계한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겸사(謙辭)를 말 그대로 정치적인 의미로서의 겸사(謙辭)로만 사용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겸사라는 것 자체가 상대가 있어 그 상대에게 자신을 낮추는 말이기에 본연의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비난할 것도 아닐 문제라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 이 장을 제대로 공부한 이들이라면, 이제 겸사(謙辭)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헌문(憲問) 편에서 몇 번이나 ‘恥(부끄러움)’이라는 개념이 자기반성의 상급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급(?) 감정임을 설명한 내용에 대해 공부한 바 있다. 이 장에서 공자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듯한 가르침의 겸사(謙辭)는 스스로 군자라고 불리고 싶어 하며 참람된 모습을 보인 이들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국제무대에 나가 자신이 가장 윗사람이니 아랫사람들만 들릴 정도로 외국인들이 가득한 공간이긴 하지만 한국어로 비속어쯤 남발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기는 후안무치한 이에게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반성하라고 부끄럽지 않느냐고 다그친들 그렇게 여기지 않는 이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일 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반성은 그들이 학교를 다닐 때 잘못해서 학생주임이나 담임에게 몽둥이로 좀 맞고 나서 형식적으로 쓰는 반성문에 다름 아니고, 그들이 평생 배우고 익힌 검찰이라는 현장에서 형량을 감형받기 위해 실제로는 그렇게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요식행위로 제출하는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정치적인 행위’라는 단어의 의미가 어느 사이엔가 그 본연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진심을 담지 않은 자기 이익을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하게 된 것은 그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수십수백 년간에 걸쳐 밟아온 행보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정치란, 자신의 결정과 국정운영에 책임을 지는 일이다. 모든 이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설 수 없기에 나 대신에 책무를 다해달라고 더 큰 권한과 권위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에게 투표의 형식으로 건네준 것이기 때문이다.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의 직무유기급 잘못에 대한 책임은 선출직으로 선발된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그 임명직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다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해야만 하는 의무인 것이다.     

정작 참사가 터지던 시기에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찰청장이 용산경찰서장과 112 신고팀을 지휘했어야 할 여자 총경을 자리에서 자르고, 직무유기 혐의로 조사 중이란다.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의 진실을 덮고 심지어 사실까지 조작하고 진실을 뭉갠 경찰관들에 대해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하자 담당 형사가 당당히 무혐의 처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거나 잘못했다고 직무유기죄가 적용된다면,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나오거나 재심으로 판사의 오판이 증명되면 그 검사나 판사도 처벌해야 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왜 경찰만 처벌받아야 하죠?”


이게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여기저기서 사회를 좀먹는 것들로 인해 국운(國運)이 다해간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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