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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8. 2022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함부로 설치지 마라.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 군자란다.

子貢方人, 子曰: “賜也賢乎哉! 夫我則不暇.”
子貢이 사람을 비교하였는데,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賜(子貢)는 어진가 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노라.”     

이 장에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의 고질적인 습관에 대해 따끔한 한 마디의 가르침을 준다.

 

자공(子貢)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습관은, 다른 사람을 늘 비교하여 비평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의 대상을 두고서 둘의 부족한 점을 분석하여 지적하기를 좋아했고, 그렇게 사람들을 분석하여 평가하는 것이 자공(子貢)의 성향이었다.     


굳이 ‘고질적인’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이 장에서 공자의 의미에서처럼 그것이 그의 학문적인 발전은 물론이고 인격적인 도야를 함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장애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주자가 공자의 이 가르침에 어떤 행간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는지 살펴보자.     


‘方(방)’은 비교함이다. ‘乎哉(호재)’는 의심하는 말이다. 인물을 비교하여 그 장단을 따지는 것은 또한 궁리(窮理)하는 일이나 오로지 이것을 함에 힘쓰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서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소홀해진다. 그러므로 자공을 칭찬하면서 그 말씀을 의심쩍게 하시고, 다시 자신을 폄하하여 깊이 억제하신 것이다.     

이 주석은 당연한 의미를 풀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가 이 장에서 짧은 두 마디를 통해 보여준 가르침의 다각적인 의미에 대해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최대한 그 하나하나에 대해 보여주기 위해 주자가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주석이다.     


가장 먼저 배우는 자들이 쉽게 간과하거나 오독할 수 있는 부분을 맨 앞에 내세워 강조하여 바로잡는다. 공자가 자공(子貢)의 고질적인 습관에 대해 지적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공(子貢)이라는 특정 인물을 지정하고 그 인물에 대해서 조언을 한 것이지 일반론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을 분석하고, 그 사람의 부족한 점이나 그 사람의 특징을 명확하게 분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이 장을 대강 읽은 자들은 공자가 자공(子貢)이 습관으로까지 몸에 배일 정도의 인물 평가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공자 자신 역시 자공과 함께 제자들을 분석하여 평가하는 대화를 직접 나누기도 했다.


자공에게 “너는 顔回(안회)와 비교해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던 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분석을 즐겨했던 자공의 눈높이에 맞춘 분석을 그대로 패러디했던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자공은 스승의 이 물음에 대해, 안회는 聞一知十(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침)하지만 자신은 聞一知二(하나를 들으면 둘을 깨침)할 뿐이라고 대답하며, 스승이 자신의 고질적인 습관이 자칫 학문 수양에 큰 도움이 되지 않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까지 감사히 받아들인 바 있다.     


현대어에서도 그렇지만, 주자가 의심하는 말투에 쓴다고 했던 주석 역시 반어(反語)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뒤에 문장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임을 주자는 놓치지 말라고 역설한다.      


“賜也賢乎哉(賜(子貢)는 어진가 보다)”     


결국 이 말은 제자의 고질적인 안 좋은 습관에 대해 비꼬거나 비판하려는 악의적 의도보다는 뒤에 바로 이어 나오는 “나는 그럴 겨를이 없노라.”라는 강한 깨우침에 방점을 박아 자공(子貢)이 그 뜻을 깨달으라고 한 말이다.     


그래서 사씨(謝良佐(사양좌))는 다음과 같이 공자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교육방식에 대해 정리한다.     


“성인이 사람을 꾸짖음에 말씀이 박절하지 않으면서도 뜻이 이미 지극함이 이와 같다.”     

자공(子貢)의 초상

“賜也賢乎哉(賜(子貢)는 어진가 보다)”라는 이 한 문장은, 완곡한 가르침의 표현방식도 그러하지만, 내용적으로도 자공(子貢)을 포함한 중급 이상되는 배우는 자들에게 다시 한번 다른 사람에 대한 비교와 평가가 갖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환기시켜준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분석하여 평가를 내리는 것은 레벨의 상하를 살펴보건대, 아래에 있는 자가 위에 있는 자에게 감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의상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智)의 측면에서 볼 때, 자신이 위에서 모든 사항에 대해 분석을 끝내고 그 사람의 수준을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학생들의 작문 숙제에 대해서 문학 선생님이 글쓰기 지도를 위해 빨간펜을 들고 고쳐주면서 표현력이 풍부하지만 창의성이 부족한 아이의 글과 창의성은 뛰어나지만 가다듬고 표현이 유려하지 못한 아이의 글과 비교하면서 서로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왜 부족한지 종국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의 글쓰기를 남김없이 분석하고 그 수준을 명확하게 읽어내고 있는 문학 선생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 러시아의 작곡가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의 <이슬라메이 (Islamey)> 악보

한 번의 실수 없이 완주(完奏;해당 곡을 끝까지 연주하는 일)하는 것조차 까다롭기 그지없는 곡을 완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곡자의 의미를 파악해냄과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더해서 연주해내는 미묘한 예술적 행간을 읽어내고 감탄하는 것은 이제 연주 연습을 하는 레슨을 받는 학생들이 연주회의 맨 앞에서 악보를 손에 들고서 듣는다고 해도 쉽사리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그 과정을 지나와 이미 완성을 이룬 사람만이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고 그 실수들을 경험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으므로 아래 단계를 거치는 이들을 비교 분석하고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賜也賢乎哉(賜(子貢)는 어진가 보다)”라는 문장은 갑자기 ‘현(賢)’이라는 한 글자를 통해 비교분석을 통한 평가가, 이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인 지(智)를 넘어 실제로는 인(仁)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행위임을 아주 살짝 보여준 것이다.     


지혜롭고 많이 배운 자가 자신이 거쳐왔던 초급 수준의 혹은 중급조차 되지 않으면서 고급이라고 떠들어대는 가식이 점철되어 있는 자들을 비교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을 할 수는 있다. 아니, 주자의 주석처럼 어쩌면 공부하고 수양하는 과정에서 ‘궁리(窮理;이치를 궁구히하는 일)’의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공부일 수는 있다며, 그 자체를 부정적인 행위로 단정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그 과정을 넘어섰어야 할 자공(子貢)이 더 높은 위를 보고, 인(仁)의 영역을 위해 노력해서 올라가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권계를 스승은 그에게 맞춤 가르침으로 숙제처럼 일러준 것이다.     

仁者(어진 이)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智者의 단계에서 보였던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의 단계를 넘어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가리는 것이 생기게 됨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유는 바로 뒷문장의 방점을 찍은 곳에 있다. 그들의 비교분석을 하게 되는 순간, 낮은 수준을 보며 상대적으로 내가 높음을 자만하며 득의양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통해 천외천(天外天)의 세상이 있음을 깨닫고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여 인격을 도야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게 되어 다른 사람을 비교 분석하거나 평가할 겨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성인의 상급 수준 제자 맞춤형 가르침이란 말인가!     

이 가르침을 듣고 자공(子貢)이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습관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이며, 자신의 공부와 수양이 어디가 어떻게 부족한지 그리고 왜 스승의 경지까지 더 발전해 나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스승의 그 마음과 가르침에 감사의 마음이 절로 마음에 울림이 있지 않았을까 눈앞에 선하다.     


세상이 공인하고 추앙하길 마지않는 성현(聖賢) 공자도 자신이 부족하다며 늘 반성하고 채찍질하듯 공부하고 수양에 마지않느라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 평가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 말만큼 무거운 지적은 없다. 성인(聖人)도 그러할진대 아직 한참이 부족한 제자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참람되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공(子貢)이 아닌 배우는 자라면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일전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행복’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행복감이란 없다. 내가 하나도 없다고 하나가 생기면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내 옆의 사람이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방금 전까지 느끼던 만족이 상대적 빈곤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공부하고 배웠지만, 나보다 덜 가지고 나보다 덜 공부하여 똑똑하지도 못해서 어렵게 지내고 궁핍하게 지내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은 행복한 것이라고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끼며 반성하게 되는 것도 그와 같은 인간의 본능이 만들어낸 감정이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소유 개념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도 할 줄 모르던 상태에서 조금 배우고 알게 되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이들의 허술함이 나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사람의 노력하는 모습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10급 언저리 바둑 초심자들끼리의 대국이라고는 부를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바둑에 프로가 훈수를 두며 이렇네 저렇네 끼어드는 경우는 없다. 대개 고만고만한 아마추어들이 자신의 눈에는 빤히 보이는 수를 훈수랍시고 떠들어댈 뿐이다. 그 수가 정수인 경우도 드물지만, 그 모습을 보는 프로는 그저 씨익 웃으며 그들이 그렇게 바둑을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넘어간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해서든 상대적인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찌질하면서도 사특한 본능은, 사람들이 비싼 외제차를 타고 핸들을 잡고 있을 때의 모습과 오래되어 찌그러진 경차를 타고 운전을 할 때의 마음과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운전태도에서도 나오는 것이지만, 바로 뒤에서 혹은 옆에서 그 차를 보고 그 운전자를 평가해버리는 길 위의 많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제차가 빵빵거리고 불쑥 앞으로 차선을 바꾸고 들어오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다가 낡고 찌그러진 오래된 경차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때는 클락션을 누르는 것도 부족하여 윈도우를 내리고 육두문자를 내뱉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길 위에 많은 당신과 같은 군상(群像) 말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 공자는 말한다. 상대적으로 그 사람보다 조금 높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를, 그들의 과정을,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는 마음으로 비교하거나 비평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문학 선생님이 글쓰기의 수준이 높아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온통 원고지 가득 빨간색으로 피가 뚝뚝 흐르게 교정해주고 지적해주며 비교 분석하는 것은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함이지 그 학생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글쟁이인가를 확인받고자 함이 아니다.     


그 문학 선생님에게서 기본기를 탄탄히 배워 글을 잘 쓰게 되고 이후 문학 선생님의 수준을 뛰어넘어 프로 글쟁이가 된다고 해서 그 제자가 다시 문학 선생님이 이제 아래로 보인다며 폄하하고 비교하고 비평하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글쓰기의 기본을 알려준 선생님에게 더욱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글이 더욱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뿐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배우는 자가 이르고자 하는 바는 지(知)가 아니다. 그것은 인(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경찰대 출신이 경찰간부의 근간이라며 자부하고 경찰학교 출신을 비교하고 비평하고, 고시 출신 특채 경찰간부랍시고 경찰대 출신과 자신은 다르다고 그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자들이, 자신은 검사 출신이라며 경찰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데 어딜 기어오르냐며 한참을 내려다보던 자들이, 결국 국회의원과 구청장이 더 위라며 그들을 꾸짖는 스텐스를 취하던 자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위해 어떤 노력을 보였는지 위기의 순간 우리는 적나라하게 목도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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