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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9. 2022

정말 능력을 출중하게 갖추었는데도 알아주지 않았을까?

그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안다, 남이 아니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이 장은 이미 앞서 공부했던 여러 장에서 비슷한 의미로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주자는 이 장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이와 같이 중복된 내용으로 나왔음을 지적하면서도 ‘중출(重出;동일한 내용이 중복되어 나옴)’이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이와 같은 내용이 비슷한 앞의 구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의 구절이 조금씩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한 의문을 던져준다.      


모든 章(장)에 뜻이 같고 문장도 다르지 않은 것은 한 번 말씀하였는데 거듭 나온 것이고, 뜻은 같은데 문장이 조금 다른 것은 여러 번 말씀하여 각각 나온 것이다. 이 장은 무릇 네 번 나오는데 문장이 모두 다르니, 그렇다면 성인이 이 한 가지 일에 있어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이니, 그 丁寧(정녕, 간곡)하신 뜻을 또한 볼 수 있다.     


내가 ‘묘한(?) 의문을 던진다’는 표현을 쓴 것은 주석에서처럼 단순히 이 말을 그저 강조하기 위함이 아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만하게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과 비슷한 앞 구절을 가지고 있는 내용은 ‘학이(學而) 편’의 16장, ‘이인(里仁) 편’의 14장과 뒤에 공부하게 될 ‘위령공(衛靈公) 편’의 18장 등에 보인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위의 내용은 뒷 구절에 내가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대구(對句) 형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헌문(憲問) 편’의 이 장만이 대구형인 동일한 동사 ‘知(알아주다)’를 사용하지 않고, ‘能(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이 뒷 구절인 ‘患其不能也’의 해석을 기존의 다른 글과 동일하게 ‘자기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여라.’라고 환치시켜 그대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글자 뜻을 그대로 살려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주자의 해석처럼 본래 여러 번 나왔던 것처럼 능하지 못한 것이 다른 사람을 알아주지 못함일 수도 있겠으나 굳이‘知(알아주다)’라는 동일한 대구형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能(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을 사용한 점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보면, 뒷부분의 해석은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로 해석할 수 있기에 그 뉘앙스의 미묘한 차이를 다시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를 파악하는데 가장 큰 힌트는 이 헌문(憲問) 편의 대의(大意)가 ‘인재 등용과 관련된 주제’였다는 사실에 감춰져 있다. 왜냐하면 어제 공부했던 바로 이 장의 이전 장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점에 대해 역설했던 주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 장의 내용과 다른 측면에서 또 연결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동물적인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하고 수양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강조가 방법론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서운해하고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가장 먼저 내가 나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코미디에 다름 아니라는 지극히 시니컬한 비판이다.     


무려 4번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마라.’는 내용이 전제가 된 문구가 <논어>에 잊을만하면 등장한다는 사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이고 공자의 시대에도 대부분의 배운 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자신을 등용해주지 않는 세상을,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인사권을 가진 위정자들을 원망하고 왜 자신을 높은 자리에 들어서 써주지 않는가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불만과 서운함이 가장 강했던 사람은 공자였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미 살아생전에 ‘성현(聖賢)’으로 인정받고 추앙받았음에도 정작 어느 작은 제후국에서조차 중용되지 못하고 조국을 버리고 떠나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보다 자신을 등용해주지 못하는 위정자라고 하는 것들과 그 시대를 원망함이 컸던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공자 자신의 입장이 그렇다고 구체적인 주어까지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일생에 거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던 공자의 발화이고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내가 공자보다 더 억울하고 불만이라고 입을 놀릴 수 없게 만든다.     


공자가 늘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그 가르침의 정수는 배움이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이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고 그 알량한 지식과 지위를 이용하여 더 큰 욕망을 채우는 어쭙잖은 배운 자들의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학문이란, 자고로 자신에 대해서 누구보다 먼저 가장 많이 깊이 있게 알고 파악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고, 그 핵심은 타인에 의한 나에 대한 평가에 연연해서는 진정한 배움의 길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어제 공부했던 이전 장에서, 자공(子貢)이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는 안 좋은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공자는 자신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족쇄를 풀어야 한다고 일러준 바 있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습관은 자연스럽게 자신 역시 자신을 선발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자에게 부합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스스로 만들게 된다.     

어제 언급했던 인간의 본능적인 사특함에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감정이 욕망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신경 쓰고 그것에 좌우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부분이다. 공부는 본래 가지고 있는 잘못된(?) 본능을 인간으로서 조절하고 가다듬어 보다 나은 경지에 오르기 위한 수양의 도구로 삼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 우리는 공부하였다.     


내가 선발되지 못하고, 승진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 그저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에 대해서 반성하기에 앞서, 지극히 부족하기 그지없는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기에, 내가 차지했어야 할 그 자리에 올라선 나보다 부족하고 허접해 보이는 그를 보며, 더욱 분노하고 화를 내고 환경을 탓하게 된다.     


능력은 없으면서 금수저라는 이유로 부모의 경제력과 권력의 네트워크를 타고 노력했던 나를 뒤로 젖혀버리고 그 자리에 앉은 이를 무조건 증오하고 비난하며, 그러한 선발이 이루어지는 세상과 사회를 탓하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노력했음에도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한 현실에 대해 좌절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공자는 이 장을 통해 그렇게 억울하다고 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정말로 현실이 그러했는가? 정말로 당신이 압도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당신이 아닌 능력도 없고 자질이라고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인간이 선발되고 승승장구 승진한다고 정말로 생각하는가?라고 말이다. 당신이 공자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공자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린 것이다. 공자는 당신이 망상에 사로잡혀 능력도 없으면서 왜 늘 세상을 원망하고 불만만 토로하냐고 죽비를 내려치는 꼰대가 아니다.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이자 당신이 깨달았으면 하는 부분은 세상이 그랬던 것은 공자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그런 것 때문에 일일이 좌절하고 분노하는 대신에 당신이 무엇이 더 부족하여 그러한 잘못을 압도적으로 박살 내지 못했는지, 지금의 분노가 다른 이들을 향해서가 아닌 자신을 좀 더 단단하고 예리하게 가다듬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노력하는 에너지로 전환하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의 그 가르침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당신이 감히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그가 성인(聖人)이기 때문이 아니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공자 자신이 누구보다 더 노력하고 완성에 가깝다는 세평(世評)을 들었음에도 등용되지 못하고 승진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었기에 그의 말에 절대적인 힘이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사회가 썩어빠진 부분은 도처에 사회를 좀먹는 것들로 인해 한없이 구린 냄새가 나는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다. 10여 년 전 외교부 장관이 자신의 능력 없는 딸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외교부에 특채하려던 비리가 드러나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외교부 고위직의 자녀들이 공공연하게 능력도 없으면서 특채라는 이름으로 2대째 외교관이 되는 채용비리가 자행되었음이 밝혀졌다.      


해당 사건이 제보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된 과정에서부터 외교부 자체에서 꾸려진 특별조사팀에 의해 그 구린내 나는 지저분한 진실이 밝혀지는데 불과 보름이 걸리지 않았다. 언론의 기레기가 갑자기 양심과 사명감을 가진 기자로 변신하고 외교부에서 이제까지 몰랐던 수십 년간에 걸친 전통과도 같은 공공연한 비리가 일시에 일소된 사건이라고 착각하는 개돼지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외교부에서 전통적으로 ‘음서제’라고 하는 자조적인 용어로 포장된 썩은 외교부 고위공무원들의 비행으로 인해 발생한 정말로 시험을 통해 아무런 끈도 없이 들어와 지방대 출신이라며 그들 자녀들 대신에 허드렛일을 현장에서 입 닥치고 했어야만 하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분노와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내부고발‘자’가 아닌 ‘단체’ 내부 폭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기레기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 폭탄 중에서도 심지어 외교부의 수장이라는 자의 딸이 대놓고 특채가 되는 상황까지 제보를 받았으니 주목받을 스쿠프라고 해서 터트린 것이지 수십 년에 걸쳐 자행되어왔던 외교부의 음서제에 대해 모르고 있던 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도 지금도 ‘언론인’이 아니라 ‘기레기’라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무원이, 그것도 대외적으로 세계에 보여지는 외교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다른 공무원들이나 하물며 사기업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심각하게 벌어지고 이어지는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외교부가 10여 년 전 그런 폭탄 같은 해프닝을 겪고서 자정(自淨)의 길을 걸었을까? 아니. 불과 4,5년 전에 뜬금없이 해외 공관에서 재외국민에 대한 지원과 조력이 부족하다는 한결같은 지적에 그들은 ‘사건 전담 영사’라는 직책을 새롭게 선발하겠다고 국민의 혈세로 그 인력을 충원하여 해외공관에 파견하겠다는 사업(?)을 벌였다.      

경찰이 해외공관에 외유나가고 싶어하는 징징거리는 밑밥기사

졸지에 마약범으로 제대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지도 못하고 외딴 나라의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여인의 실화를 영화화한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을 필두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전화했더니 새벽에 전화질 하지 말라고 응대했던 타이완 공관의 정신 나간 응대에, 남미에서 자신이 외교관임을 강조하며 한국어를 가르쳐주겠다며 미성년자에게 몹쓸 짓을 했던 작자까지 터져 나오는 상황에 외교부는 사건 전담 영사가 더 필요하다며 뽑은 것이 ‘보도자료’의 내용이었다.     


실상은, 10여 년 전에 내부 반란을 일으켰던 정상적으로 시험을 보고 외교관이 되었던 찌질한 평민들이 음서제로 들어온 윗분들의 2세들을 떠받들며, 외교관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해외공관 업무에 나가서도 잡일이나 민원 대응 업무를 모두 처리해야만 한다는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정식 외교관 시험이 아닌 ‘사건 전담 영사’라는 듣보잡 새로운 보직을 위한 경력직 시험을 통해 사건 관련 민원 대응 업무를 할 머슴을 아예 대놓고 뽑아, 음서제로 들어와 일도 못하지만 곱게 자라서 민원인들의 악다구니를 듣기 끔찍해하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현장에 내몰 수는 없는 것이 가장 기본 이유였다.      


그렇다고 단체 내부 폭로라는 죽창을 들고 이제까지 현장에서 그 허드렛일을 해왔던 정상적인 시험을 보고 들어온 이들에게 그 일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지저분하고 힘만 빠지면서 공은 되지 않는 일을 맡아줄 ‘머슴’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 ‘사건 전담 영사’의 선발의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말한다. 세상이 썩어 돌아간다는 것은 공자의 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어온 현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과 그들을 핑계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자들은 결국 그들에게 편승하고 말더라는 것이다. 진정 배우는 자라면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자신이 향한 길을 걸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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