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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1. 2022

공자가 말만 잘하는 것보다 더 혐오했던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만이 불변한다.

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者與?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
微生畝가 孔子께 말하였다. “丘는 어찌하여 이리도 연연해하는가. 말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내 감히 말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固執不通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감히(?) 공자를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미생묘(微生畝)’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에 대한 기록이나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은거했던 고매한 은자(隱者)였음을 의미한다. <논어(論語)>에 가끔 등장하는 이름모를 이들이 등장하고는 한다. 그저 마을의 늙은이에서부터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고 언급되는 대개의 인물들은 이른바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은둔고수’이다.     


천하의 성현(聖賢)이라 추앙받는 공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묵직한 돌직구를, 그것도 마치 하대하듯 툭툭 던지는 ‘미생묘(微生畝)’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그 상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微生(미생)은 성이고 畝(묘)는 이름이다. 미생묘가 夫子(공자)의 이름을 부르고 말이 매우 거만하니, 아마도 年齒(연치)와 덕이 있으면서 은둔한 자인 듯하다. ‘栖栖(서서)’는 依依(의의)함이다. ‘爲佞(위녕)’은 口給(구급, 구변)을 해서 남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그릇되어 돌아가고 있어 그 세상에 쓰이지 않겠다고 등을 돌려 은둔한 고수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여전히 쓰이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일환으로 천하주유까지 했던 공자의 행동이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등용되기를 간절히 구걸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한 어주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그대는 허둥대고 안달하는데, 말재간이나 부려 세상에 쓰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     
은자에게 길을 묻는 공자와 그 제자

공자가 지극히 미워하고 혐오하는 ‘말만 잘하는 자’라는 표현을 돌직구로 그대로 공자에게 그대가 그런 자가 아니냐고 묻는 말은 이제까지 <논어(論語)>를 공부해왔던 이들이라면 그것이 공자에게 있어 얼마나 직설적인 시비에 해당하는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말만 익숙한 이들, 말만 앞세우는 이들을 권계하는 가르침과 죽비를 내리는 공자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돌직구성 비판은 일종의 양날의 검이었다. 일반인들이 쉽게 내뱉는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렇게 남을 비판하냐?’라는 역공을 받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남을 비교하며 평가하길 좋아했던 자공(子貢)에게 다른 사람을 비교하며 평가할 겨를이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고양시키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라고 일러주었던 스승 공자였기에 은둔고수, 미생묘(微生畝)의 지적이 갖는 다각적인 의미를 쉽게 무시하거나 반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소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을 정도의 돌직구에 대해 공자는 상대의 내공을 감지하고서 예의를 한껏 갖춘 겸양스러운 모습으로 그에게 완곡한 훅을 돌려주는 대신, 그 대상의 눈높이를 감안한 격조높은 대답으로 자신이 하는 언행이 그저 말만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공자는 자신이 결코 말재간을 부려 세간에 아첨할 뜻은 없지만 그렇다고 혼자만 깨끗하다고 여기는 固陋(고루)한 태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럴 따름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이 올곧지 않을 때는 은거하라는 진리에 따라 은둔하는 길을 따른 은자(隱者)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진심이 담긴 고백과도 같은 말이다.     

말로만 떠드는 이들과 역시 말로서 가르침을 설파하는 공자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본질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 공자의 자기변호가 여기에서 등장한다.     


공자는 자신이 그렇게 말과 글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질정하는 이유에 대해 사회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꾸기 위해서라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의 눈높이에 맞춰 ‘固執不通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라고 완곡하게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듯 대답한다.     


그저 자기 고집을 피우는 고집불통의 의미가 아닌 심오한 행간의 의미가 담긴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疾(질)’은 미워함이요, ‘固(고)’는 한 가지를 고집하여 변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인이 달존(達尊)에 대하여 예절이 공손하고 말씀이 곧음이 이와 같으셨으니, 그 경계함이 또한 깊다.     


주자가 주석에서 설명한, ‘한 가지를 고집하여 변통하지 못하는 것’이란 단순한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고집불통과 무엇이 다른가?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 하나만을 의미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명확할 듯 하다.     


변통(變通)은 현대어에서 말하는 ‘임시변통(臨時變通)’의 그 변통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공자의 의미가 훨씬 깊이와 폭이 깊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고문에서 공자의 변통(變通)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예를 드는 것이 ‘시중(時中)’이라는 개념이다. (이미 앞에서 몇 번이나 설명한 바 있으니 새로 보는 단어처럼 신기해한다면 이 매거진의 처음으로 돌아가 제대로 정독할 것을 강권한다.)     

‘시중(時中)’이란, 문자그대로 직역하자면, ‘때에 맞춰서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현대어로 의역하자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최적의 적용을 하는 것’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비니지스 관련 특강에서 흔히 튀어나오는 이른바 ‘TPO’를 최선의 수준에서 운용하는 것이 바로 그 개념의 핵심이다.      


덕(德)을 쌓아 인(仁)을 완성하려는 군자라면 세상이 벼슬할만하면 벼슬하고 세상이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 또한 時中(시중)의 도리이다. 그저 세상이 혼탁하다고 하여 隱居(은거)하여 지내는 것은 공자의 입장에서는 ‘獨善(독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제까지의 공자의 처세관이 담긴 말이다.     


은자(隱者)의 눈으로 보면, 자신의 조국까지 떠나 섬길 주군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의 행동은 군자로서 취해야할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들의 생각이나 처세가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할 것까지는 아니겠으나 공자는 그것이 무책임한 것이라고 보았다. 더 배우고 더 익혀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을 넘어 그것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이나 알량한 배움으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이들로부터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며 위정자의 결정에 휘둘리는 백성들을 지키고 이끌어야만 하는 소명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문에서 단순히 고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심오하다는 의미는 공자 특유의 설명방식을 통해 수준이 되는 이들의 눈높이만큼 읽힌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자는 ‘바꾼다’는 말자체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변화를 거부한다. 그저 자신이 위정자 자리에 있는 그대로 무언가 변화하길 바라지 않는다. 변화의 궁극적인 종착점에 자신도 갈릴 것이라는 짐작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더라도 이전의 잘못된 것들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반성하며 수정해간 위정자들은 역사의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저 작은 것 하나라도 변화하고 바꾸자는 말이 나올까 전전긍긍했던 자들은 그의 우려처럼(?) 억지로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거나 비난에 아까운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그 개념은 정치행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지난 공부에서 상대적 개념을 통해 행복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 행복이라는 것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이라면,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이들은 행복하기가 어렵다. 마음의 안정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는 이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금 부자라고 일컬어지는 자들은 지금 자신의 자산에 만족하며 평생을 까먹고 살아도 될 재산을 가지고 유유자적 살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한다. 설사 지금까지 모아둔 자산이 그 도전으로 인해 없어지고 날아갈 수 있는 리스크를 수반하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단순히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때문이라는 단순화 논리에 함몰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만약 그런 우를 범했다면, 당신은, 초기 자신이 창업했던 기업을 팔아 수십 혹은 수백억의 수익을 20대 혹은 30대 초반에 이룬 이들이 그 돈으로도 평생 유유자적 즐기며 살 수 있음에도 왜 새로운 도전을 하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돈 때문이라고? 실제로 그들이 소박한(?) 당신의 생각처럼 매일같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고 수천만원이나 되는 술을 매일밤 날리고 달러를 하늘에 뿌리며 부자임을 즐기며 살 것이라 생각하나?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하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위해 그리고 그 부를 더 의미있는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용처(用處)를 고민한다.       


지금 은자(隱者) 미생묘(微生畝)에게 자조적 비판을 들은 공자를 보라. 수천년이 지난 지금 공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일신의 공명을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고 노력하고 수양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저서를 집필하였다고 오해하는 바보는 그리 많지 않다. 공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옛 도를 널리 물어 배우려 하여, 마치 구하다 얻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둥댔다고 한다.     


끊임없는 배움과 실천을 통해 성현(聖賢)의 경지에 오른 공자가 무슨 더한 욕망이 있어 겨를이 없다고 하면서 더 배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죽는 그 순간까지 노력하고 노력했을까? 고작 오역 투성이의 현대 해설서를 베스트셀러라며 한번 읽은 당신이 <논어(論語)>를 읽었다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당신의 머리와 도량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이 끄는 수레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자들만 있었다면 자동차나 기차의 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이 탄 짚차의 뒤꽁무니는 쫓아다니며 ‘기브미 쪼꼬렛!’을 외치던 시기에서 다른 나라를 도울 여유까지 생겼으니 적당히 인생을 누리고 살아야 한다는 이들 뿐이었다면 대한민국은 거듭된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 딱 좋고, 더 바랄 나위가 없다며 그 자리에 안주하는 이들은 소확행인지 뭔지를 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삶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고양(高揚)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힘들다. 수레대신 자동차를 꿈꾸며 개발하는 자는 그 개발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만 하는 수많은 시행착오라 불리는 실패를 맛봐야만 한다. 지금 자리에서 만년 철밥그릇으로 버티겠다며 말단에 늙어서까지 버티는 자가 행복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더 위로 올라가겠다고 승진시험을 준비하고 더 넓은 세계에 가서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을 더 배우고 싶다고 유학을 준비하는 이의 삶이 고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발전은 그리고 진화는 그렇게 노력하는 자들만이 쟁취했고 그런 이들을 통해 사회는 더 나아갔다. 조직의 잘못된 관계를 보고서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고 찍히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의 공조는 자연스레 그것을 관례라는 이름으로 뒤바꾸어 조직을 잠식해갔다.      


고작(?) 총경달고 서장이 되었답시고 거들먹거리며 관용차를 타고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면 걸어서 이동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가 있기에 그 곁에서 보좌하는 정보과장이나 경비과장이 구두가 벗겨져라 튀어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사종결권을 가지고 온 경찰이 검찰의 검사와 검찰수사관들이 거들먹거리며 콩고물을 챙기던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그 악습을 답습하며 ‘검사는 기소로 명예를 챙기고, 불기소로 부를 챙긴다’라는 문구에서 ‘검사’를 ‘경찰’로 바꾸어 ‘경찰은 송치로 인사고과를 챙기고, 불송치로 뒷주머니를 채운다.’로 변질시켜 지들끼리 키득거리며 행복해한다.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는 궤변이 마치 올바른 수순인냥 외치는 자들은, 결국 비번임에도 현장에 달려간 소방서장을 입건시키고 지들이 형사처벌당할 증거나 근거를 모두 지우고 난뒤에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말한다. 그들에게 메모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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