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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4. 2022

천리마가 명마인 것이 그 덕(德) 때문이라고?

천리마도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子曰: “驥不稱其力, 稱其德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驥馬는 그 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德을 칭찬하는 것이다.”     

원문에는 ‘驥(기)’라고 쓴 단어를 내가 ‘천리마(千里馬)’로 번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의 ‘기주(冀州)’라는 곳에서 좋은 말이 많이 나왔으므로 준마의 대명사로 명마를 ‘驥’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의역하여 사용한 ‘천리마’라는 단어는 명마(名馬)의 대명사로, 하루에 1,000리를 달린다고 전해 오는 전설의 말이다.      


한(漢) 나라 시대엔 ‘피와 같은 붉은빛이 도는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혈마(汗血馬)’라 칭한 말을 부르는 별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실제 현재 ‘한혈마(汗血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해외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된 말로, 한무제(漢武帝) 때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에 의해 중국에 알려지게 된 말로 당시에는 ‘천마(天馬)’라고도 불렸다.     


왜 글을 풀이하기 전에 뜬금없이 말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는지 조금 생뚱맞다고 생각했는가? 이 장 자체가 초심자의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이 천리마를 등장시켜 그 말을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이 잘 달리는 말의 본질적인 힘에 있지 않고 덕에 있다는, 정말로 생뚱맞은 논리를 끄집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자 역시 다소 황당한(?) 공자의 이 언급에 대해 그 행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짧은 설명으로 말이 가진 덕(德)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驥(기)’는 좋은 말의 명칭이다. ‘德(덕)’은 길이 잘 들고 성질이 양순함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의 기본적인 성향은 타고나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천리마(千里馬)라고 하면, <삼국지(三國志)>의 여포의 명마(名馬)였다가 관우의 시그니처가 된 적토마(赤兎馬)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명마(名馬)라고 하는 말의 특징은 성질이 사납기 그지없어 사람은 고사하고 주변의 말조차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거칠기 그지없는 천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가 언급한, 어감조차 어색한 ‘말(馬)의 덕(德)’이라는 것에 대해 ‘길이 잘 들어 성질이 양순함’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거칠 것 없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길들여져 온순해진 것이 말의 덕(德)이라는 설명도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쉽게 감잡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내기 위한 힌트로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공자가 인재 등용과 관련하여 말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가져와본다.     


魯(노) 나라 哀公(애공)이 공자에게 인재 선발에 대해 물어보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활은 조절이 잘되어 있으면서 멀리 날아가는 억센 것을 구하고 말은 잘 길들여져 있으면서 천리를 달리는 힘을 갖춘 말을 구하는 법입니다. 선비도 반드시 신실하면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신실하지 못하고 지식과 능력만 많은 사람은 비유하자면 이리나 승냥이처럼 흉악하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굳이 이 내용을 가져온 이유는 단순히 공자가 말을 비유의 대상으로 언급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번 ‘헌문(憲問) 편’을 공부하면서 내내 강조했지만, 이 편을 가로지르며 관통하는 주제는 ‘인재 등용’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동일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말에 인재를 비유했으니 위 내용은 ‘헌문(憲問) 편’의 내용과 맞닿아 있다고 보아 학도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내용을 참고하더라도 애매한 표현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활은 거칠고 억센 것을 구한다고 하면서 말은 잘 길들여져 있는 것을 구한단 말인가? 본래 초심자들이 어설프게 알고 보아 왔던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하자면 명마(名馬)는 거칠기 그지없는 포악한 천성을 가지고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데, 주인공이 등장하여 그 말의 기를 꺾어 길들여 자신만의 말로 길들이면서 명마(名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힘을 갖추고 있더라도 길들여 탈 수 없다면 그저 괴물일 뿐이란 말이다.     

다시 한번 위에 인용된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공자의 대답은 활에서도 말에서도 서로 상치되는 모순된 개념을 전과 후로 대비하여 혼재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절이 잘 되어 있는 활이란 없다. 멀리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억세게 만들어진 활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명인이 계속해서 길을 들여 조절이 잘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말 역시 마찬가지 문법구조상의 모순을 혼재하여 설명하였다. 잘 길들여져 있으면서 천리를 달리는 힘을 갖춘 말은 이미 타고난 힘과 거친 본성을 가진 말을 노련한 조련사가 말과 교감하면서 잘 길들여야 명마(名馬)로 칭찬을 듣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이미 훌륭한 인물에 의해서 조절되고 길들여진 활과 말을 사용하라는 의미에서 다른 이에게 등용되어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중고 인재를 찾으라는 조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래서 앞서 일반적이지 않은 모순된 논리구조방식을 취한 이유를 선비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문법구조에서 ‘도치(倒置)’는 강조를 위한 아주 기본적인 방식이다. 왜 시간의 순차적 구조를 갖추지 않고 잘 조절되고 잘 길들여진 이후의 과정을 앞에 놓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활이나 말을 길들이는 것이 사람인 반면에, 사람의 덕(德)이라고 하는 것을 수양하고 가다듬는 것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구조상 딱 들어맞지 않는 논리상의 이유로 인해 공자는 사람에 있어 지식과 능력은 직접 노력해서 배울 수도 있고 천성적인 능력이 타고난 천재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저 거친 본성만을 갖추고 있는 것이기에 그대로는 등용하여 쓸 수 없는 것이라 강조한 것이다.  

그 욕망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아는 덕을 수양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결코 쉽지 않고 짧지 않은,  스스로 길들이는 과정을 통과한 자만이 등용할만한 인재라고 인정하여 쓸 수 있다고 조언한 것이다.     

이 장의 내용은 그러한 공자의 생각을 축약적으로 한 문장에 담아낸 말이기에 처음 읽는 초심자들은 도무지 감을 잡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신실(信實)’이라 표현한 내용이 덕(德)이라는 수양의 덕목으로 환치되었을 뿐이다. 공자가 “신실하지 못하고 지식과 능력만 많은 사람은 비유하자면 이리나 승냥이처럼 흉악하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 또 다른 비유는 신실함과 같은 내면의 덕이 없으면서 지식과 능력만 많은 사람이 오히려 사회에 害惡(해악)을 끼치는 당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경고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어(孔子家語)>까지 공부하여 공자가 설명하려 했던 행간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낸 윤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騎馬(기마)는 비록 힘이 있으나 칭찬함은 덕에 있으니, 사람이 재주만 있고 덕이 없다면 또한 어찌 숭상할 만하겠는가.”     


왜 순차적인 모순이 있음을 알면서 초심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위와 같은 표현을 썼을까 의아해하는 이들을 위해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자면, 실제로 공자의 설명은 순차적인 모순이 없다. 순차적인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적으로 많은 생각이 필요한 고문(古文)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앞에서 순차적 모순이 있다고 설명해놓고 무슨 엉뚱한 궤변이냐고 따지고 싶은가? 다시 잘 생각해보자. 현대인들의 논리와 언어로 생각해보더라도 본래 배우지 못해서 무식하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차리는 사람에게 ‘사람됨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거나 비판하던가? 배웠다고 스스로 우쭐하며 알량한 지식과 그렇게 해서 오른 그 얄팍한 지위를 가지고 사리사욕을 차리려는 어중간한 이들을 비판할 때 ‘그렇게 공부하고 그 지위까지 올랐다고 하는 자가 사람부터 되어야지 능력만 갖추면 뭐하나?’라고 하지 않던가?     

활을 무생물이다. 사람이 본래 가진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길들이냐에 따라 같은 재료임에도 완전히 다른 도구로 탄생하게 된다. 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생물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고 배우며 수양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은 그야말로 ‘본능만을 가진 동물’이다.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큰 그림의 의도를 가진 공자의 비유법이 무생물인 활에서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재료 선택에서부터 도구로서의 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들이는 과정을 말한 것이고, 더 나아가 같은 생물이지만 본성만을 가진 말의 경우, 아무리 타고난 천성이 뛰어나더라도 훌륭한 조련사에 의해 조련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가치를 갖추지 못해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초심자에서부터 고급 수준에 이른 자에 이르기까지 아는 만큼, 깨닫는 만큼 읽어내고 얻을 수 있는 공자의 화려한 프리즘식 가르침이다. 대다수의 현대 해설서에서 이 다양한 색을 내고 있는 프리즘의 깊이를 해설하지 않고 원문의 내용만을 반복하여 읽어주는 방식을 취하니 그 책을 읽은 초심자들이 공자의 말이 당연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꽝하는 감동과 함께 와닿지 못하는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이란, 모두 좋은 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이 온전한 내 것이 되어 내게 깨달음을 주고 나로 하여금 곱씹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진정한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나 글이 더 훌륭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도하고 그려낸 그 큰 그림을 내가 어디까지 읽어내고 실천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장에서 공자는 인재 등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위정자들이 그것이 중요한 줄은 알면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을 당대의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제대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것의 주안점이 어디에 가 있어야만 하는지를 일러준다.     


공자의 당시 사람들은 才能과 力量만을 가장 우선시하여 德을 輕視(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세 번째 영국을 이끄는 여성 총리로 임명되었던 엘리자베스 트러스는 의욕만이 앞서 자신에게 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최단기간에 총리직에서 내려온 총리’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영국의 보수들이 선택한 총리는 역시 능력과 패기를 갖춘 심지어 이민세대를 대표하는 인도계의 40대이기는 하지만, 재력과 인맥을 갖춘 재벌 처가를 뒷배로 둔 리시 수낵이었다. 보수우익이 득세하여 자국우선주의가 강해지는 세계적 흐름이 영국만의 일은 아니겠으나 전 세계의 흐름이 그렇게 흐른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러한 분위기가 분명히 인류의 발전보다는 퇴화하는 것이라는 학자들의 우려와 지적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율사(律士)의 나라로 전락하다 못해 이젠 검찰 출신의 검사가 대통령의 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정치인들의 절대다수에 율사(律士)들이 포진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해설은 법리로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상 그것을 이해하고 업무를 빠르게 숙지하여 합리적으로 운용하는데 특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사회 규제의 마지노선이 법률로 제한되어 있어 그 법률을 공부한 전문가들이 아슬아슬한 레드라인을 넘지 않거나 넘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꼼수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은 아닌가? 결국 궁극적으로 사리사욕을 형사처벌을 받지 않으며 채울 수 있는 최적의 전문가로서 적합하다는 불명예스러운 특장점 해설은 아닌가 말이다.     

배 안에 있던 멀쩡한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을 바다에 생매장해놓고서 책임을 규명한다며 해경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물론, 해경 자체를 해체해버리겠다고 홍보성 생쇼를 하던 대통령은 그 쇼가 막을 내리기도 전에 국정농단으로 국민들의 분노에 청와대에서 끌려 나와 감옥으로 직행하였다. 해경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 수장인 해경청장은 뜬금없이 한 정권을 건너뛰고 이전 정권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려다가 사살당했다는 공무원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또' 구속되는 코미디를 찍었다.     


'자칭' 기자 출신이라며 정권의 대변인으로 들어가 그것도 권력이라고 대기업의 전관으로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다가 기어코 국회의원 배지를 달더니 자신의 능력도 망각한 채 경기도지사까지 달리겠다고 나섰다가 떨어진 후 다시 홍보수석이라는 자리까지 꿰찼다.

이미 ‘내가 그 사람, 잘 알아.’라는 식으로 사람을 쓰는, 검사 출신 임명권자의 주먹구구식 등용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마는 명마는 고사하고 당근 먹겠다고 달리는 노새를 말이라 우길 셈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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