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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5. 2022

원수를 은혜로 '어떻게' 갚으라는 말인가?

원수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나 은혜를 베풀라고 호도하는 이들에게.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혹자가 말하였다. “德(은덕)으로써 원망(원한)을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으로써 德에 갚으려는가? 정직함으로써 원망을 갚고, 德으로써 德을 갚아야 한다.”

이 장은 이제까지 누누이 강조해왔던 공자의 현실주의적 방법론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담고 있다. 막연하게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원론적인 뜬구름 잡기식 어려운 말만 내뱉는 가식으로 가득 찬 조선 성리학자들이나 현대의 정치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확연하게 선을 긋듯이 보여준다.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인 기원전에 나눈 이 대화의 내용은 은혜로서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떠냐는 성경을 떠올리는 듯한 질문으로 화두를 대신한다. 이른바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구절임과 동시에 이미 수천 년 전인 공자의 시대에도 그런 도덕적인 가르침이 성행했음을 추정하게 해 준다.


이제까지 공부했던 특정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혹자(或者)’라는 식으로 특정 인물을 지정하지 않은 것은 일단 혹자(或者)가 은둔 고수라는 점을 의심해봐야 한다. 앞에서 여러 번 설명했지만, <논어>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 등장하는 ‘누군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 올바르지 못한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있는 은둔 고수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자(或者)가 인용한 그 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혹자가 말한 것은 지금 <노자(老子)>에 보인다. ‘德(덕)’은 은혜를 이른다.

형이상학적으로 원론적인 부분을 설파하는 듯한 그 내용은, 일반인들의 논리나 감정으로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내용의 출처가 <노자(老子)>라는 점은 그것이 공자가 이전에 가르쳤던 가르침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줌과 동시에 그 구체적인 설명이 적시되어 있지 않아 그 글을 읽는 이들이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성경(聖經)>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던가 성인군자 가라사대라는 식으로 ‘원수를 은혜로 갚으라’라는 명제를 살펴보면, 이 장의 대화가 진행되었던 수천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하고 수긍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마땅히(?) 복수를 해도 시원찮을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어 통 크게(?) 용서를 해준다던가 오히려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일반인들의 감정이나 논리로는 쉽사리 실천할 수 없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나 논리적 구조가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중문학을 전공했다는 교수가 해설한 <논어> 해설서에 이 장의 해설을 하면서 “은덕도 은덕으로 갚고 원수도 은덕으로 갚는 것은 형평이 맞지 않으며, 원한이 사무쳐서 과도하게 보복을 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가 당한 것만큼만 보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쓴 해설을 보고 나서 내가 문해력이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도대체 그 해설이 정확하게 공자가 말한 어떤 부분을 설명하고자 한 것인지에 대해 도저히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공자의 의도나 설명 중에 어느 한 줄이나 그 내용이 저 설명에 부합한단 말인가? 


‘은혜(德)로서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떠냐?’는 혹자의 질문은 크게 두 가지 의도를 갖는다. 한 가지는 그 말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 말 그대로 그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풀이를 문의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조금 더 들어가서 은혜로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물은 것이다. 물론 그 명제가 이상한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전제로 했을 때 두 번째 질문은 보다 심화된 실천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공자는 대답 대신 ‘무엇으로써 德에 갚으려는가?’라는 확인성 질문부터 던져 그 명제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혹자의 생각을 정리하도록 유도하며 구체적인 과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은혜(德)로서 원수를 갚는다는 명제에 대해 그 은혜라는 것의 명확한 개념 규정부터 선행하고자 한 것인데 이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공자가 던진 전제형 질문을 해설한다.


그 원망하는 바(상대)에 이미 덕으로써 갚았다면 나에게 덕이 있는 자에게는 또 장차 무엇으로써 갚을 것인가라고 말씀한 것이다.


주석의 내용만 보자면, 원수에게 은혜(德)로 복수(?)했다면, 나에게 은혜(德)를 베풀어준 상대에게는 그 은혜(德)를 무엇으로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노자(老子)의 방식과 공자의 방식을 그 결을 달리함을 명확히 선을 긋는다. 즉, 그 은혜(德)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자고 공자식 깐깐한 현실주의의 전제를 깔고 그 설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질문은 전술한 바와 같이, 대답을 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던진 의구심을 가진 혹자(或者)에게 이 명제에 등장한 ‘은혜(德)’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뒤에 바로 이어져 나올, 그것을 구성하는 내용이 어떻게 채워져야만 하는지에 대한 강조를 위한 의도적인 배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방점이 찍힌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 한 줄로 정리된다.

‘以直報怨 以德報德(정직함으로써 원망을 갚고, 德으로써 德을 갚아야 한다.)’

왜 갑자기 ‘直(정직)’이라는 개념이 나왔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인 담론이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 또 다른 새로운 개념이 나온다는 것은 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설명을 위해 사용되는 개념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간단명료한 설명이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번 공자의 설명처럼, 그 방법론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개념어를 도출시킬 때는 그것이 앞선 은혜를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과 방식에 대한 설명이기에 본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개념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자가 방법론으로 가져온 ‘直(정직)’에 대해 주자는 배우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상세한 해설을 곁들여 혼란을 정리해준다.  


원망이 있는 자에게는 사랑하고 미워함과 취하고 버림을 한결같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하는 것이 이른바 정직이란 것이다. 德(덕)을 입은 자에게는 반드시 덕으로써 갚고 잊지 않아야 한다.


공자가 가져온 ‘정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읽고 나서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초심자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원망하는 원수에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과 취하고 버림을 한결같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으로써 하는 것이 정직이라면, 복수를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원한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오히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지게 하는 설명이 되어버렸다.

배우는 자들 중에서도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초심자들이 겪을 이 황당함이 우려가 되었는지 전체적으로 이 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혹자의 말은 후덕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면 有意(유의)의 私心(사심)에서 나와 원망과 덕에 대한 갚음이 모두 공평함을 얻지 못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반드시 夫子(부자)의 말씀과 같이 한 뒤에야 두 가지의 갚음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원망을 원수로 여기지 않고 덕을 갚지 않음이 없으면 또 후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장의 말씀은 명백하고 간략하면서도 그 뜻은 곡절이 있고 반복하여 마치 造化(조화)의 簡易(간이)가 알기 쉽지만 미묘한 진리가 무궁한 것과 같으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자세히 완미 해야 할 것이다.


먼저 혹자의 말이 후덕하다는 표현은 칭찬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노자(老子)>에 인용된 그 <성경(聖經)>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만드는 그 주절을 인용한 혹자(或者)의 방식이 일반론적이지도 않은, 덕이 넘쳐흘렀다는 풍자의 의미가 ‘후덕(厚德)’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세상만사 모든 사물에 대해 공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이 모든 사단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덕(德)이라는 개념 역시 무조건적으로 후하게만 한다고 마땅히 숭앙받아야만 할 개념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권계한 것이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까지 은혜를 베풀며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많은 일반인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위화감을 조성할 뿐 실제적인 실천을 권장하거나 교육할 수 없음을 경계하라 가르친다.

게다가, 정말로 그럴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면, 내게 원한을 사게 만든 이나 나에게 은혜로 덕을 베풀어준 이에게나 똑같아져 버리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라고 공자는 지극힌 현실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면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에게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더 덕을 베풀어야만 하냐는 공평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 때문에 앞서 지적했던 현대 해설서에서는 원수는 원한을 쌓은 만큼 갚으라는 둥 황당한 궤변을 끄집어내어 정직을 이해했다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그 기괴한 궤변의 분위기에서 읽었겠지만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원한이 있으면 그 원한을 정직하게(?) 갚아주고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를 갚으라고 손익대차대조표를 작성하여 이행하라는 설명이 아니다.


공자는 감정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여기서 굳이 ‘정직’이라는 개념까지 가져와 설명한 이유는, 감정이 울컥 솟아오르는 대로 제멋대로 굴라는 것과는 다르다. 공자는 그 수많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바로 이 공평함으로 설명되는 ‘정직’을 통해 설명한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에게 잘해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과 나에게 원망을 산 상대에게 해주는 것이 똑같다면 그것이야말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그저 작위적으로 성인군자 인척 가식을 떠는 것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임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공자의 행간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진전시켜 원수를 사랑하는 은혜를 베푸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잘못된 자들에 대한 처벌을 개개인이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무법천지를 만든다. 자기 부모를 해하여 죽인 원수를 똑같이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고 용인해준다면 원한은 원한을 낳고 상대방의 부모를 죽이는 살인 연쇄 구도를 만들 뿐이다. 그런 비극의 연쇄 고리를 끊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공자는 상대를 죽여서 내 속 편하자고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피눈물을 흘려 반성하게 만들 합법적이면서도 더 파급효과가 큰 복수 계획을 실행하라고 말한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자들에게 최고의 형벌은 그들이 지은 죄과를 평생 곱씹으며 후회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사회적 제한이라고 만들어놓은 형사제도에 의한 형벌은 그들이 적당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다시 동일한 범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질러도 그뿐이다. 


공자가 말하는 공평한 정직은, 배운 자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처벌이지, 단순한 함무라비 법전식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다. 그래서 법에 정통한 법비들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낄낄거리며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그들을 벌하는 것은 그들이 누리며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공평한 정직이라 나는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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