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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6. 2022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며, 자신만의 길을 가라.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子貢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까?”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     

적지 않은 <논어> 현대 해설서에서는 이 장에서 공자가 자신이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한 좌절과 진솔한 고백을 담아내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시작은 그렇다. 크게 탄식하며 ‘하늘도 사람들도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구나!’라고 하니 그렇게 여길 만도 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른바 학명지탄(鶴鳴之嘆;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탄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이 장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아래 주자의 주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장의 핵심은 공자의 넋두리 따위가 아니다.      


夫子(부자)께서 스스로 탄식하여 자공의 질문을 유발하신 것이다.     


공자는 힘들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그 탄식에 담은 것이 아니라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자공에게 평생을 걸어온 자신만의 실천을 가르침으로 남기기 위해 일부러 제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도록 상황을 만든 것이다.  

    

스승이 슬쩍 짜 놓은 상황에 대해 굳이 의아함을 가질 겨를도 없는 고지식한(?) 자공(子貢)은 당연히(?) 스승의 의도대로 세상을 탄식하는 스승에게, 평소대로라면 가슴 뜨끔했을 질문을 던진다.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까?” 

평소대로라면 가슴 뜨끔했을 것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국을 버리고 천하를 주유하면서까지 자신을 품을 주군을 찾아 헤매던 공자는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조롱을 받으며 결국 누구 하나 제대로 자신을 알아봐 주고 등용할 그릇을 찾지 못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길고 긴 70여 년의 일생을 마감하고 만다.     


물론 다른 측면으로 자공의 질문을 해석할 수도 있다. 자공(子貢)의 입장에서는 단지 등용되어 크게 쓰이지 못하였을 뿐 스승 공자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성현 아니던가? 그런데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니 어찌 그리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라며 반문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느 쪽으로든, 냉정한 사실관계만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손수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슴 미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컨대 이 장에서 벌어진 상황은 정말로 비참했던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공자는 능력을 출중하였지만 반평생 이상을 자신의 곁에서 배우고 따랐던 고지식한 자공(子貢)에게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였음에도 어떻게 인생을 완주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 유명한 ‘하학 상달(下學上達)’로 귀결되는, 도저히 일반인으로서는 자부할 수조차 없는 경지를 자신이 완성했노라고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실 것이다.”     


저 유명한 ‘하학 상달(下學上達)’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표면적인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면 이 장의 핵심 내용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늘에게 〈좋은 시운을〉 얻지 못하여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에게 합하지 못하여도 사람을 탓하지 않고, 다만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고 자연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함만 알 뿐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다만 자기 몸에 돌이켜 스스로 닦아서 순서를 따라 점점 나아갈 뿐이요 남과 매우 다르게 하여 알아줌을 이루게 함이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성인(聖人)이라 추앙받던 공자조차도 어느 누구에게 등용되어 높이 쓰이지 못하고 천하를 주유하며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순간마저 겪게 되면 그야말로 하늘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어찌 운명이 그리도 모질게 힘겹게 상황을 꼬이게 하며 도무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사람을 원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수준이 그렇게 낮고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챙기겠다고 이렇게 능력을 갖춘 군자(君子)를 몰라보고서 등용하지 못하여 상황을 악화시키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공자는 과연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탓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아래로는 人間의 일을 배우면서(下學)’, ‘위로 天理를 통달한다(上達)’라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하학 상달(下學上達)’이라는 개념이다. 본래 ‘하학 상달(下學上達)’은 통일한 단일 개념이 아니었다. 대개 소인은 하학(下學)하고 군자는 상달(上達) 하기 때문에 분리된 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었다.      

일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공자의 원시 유학의 특징은 단계적 과정을 통한 승급(昇級)을 중요시한다. ‘하학 상달(下學上達)’이란 처음 아무것도 모르던 단계에서 배움을 시작하여 형이하학에 해당하는 배움을 익혀 지식적인 부분을 채우는 것에서 시작하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체득되어 배우고 익힌 것들이 실생활에 자연스럽게 실천으로 배어 나오는 형이상학의 부분의 경지로 업그레이드되는 단계까지를 단락(短絡) 없이 완성함을 이른다.     


하늘만이 알아줄, 그 어려운 일을 공자 자신은 해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제자 자공(子貢)에게 자신을 증거로 앞으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히 공자가 자기 자랑에 빠져 세상에 쓰이지 못해 놓고서는 그저 스스로 자만하며 자위하는 내용으로 폄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자가 어떤 의도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러나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보면 이 가운데에 진실로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하늘만이 홀로 아는 오묘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공자의 문하에서 오직 자공의 지혜만이 거의 여기에 미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특별히 말씀하여 誘發(유발)하셨으니, 애석하다. 자공도 오히려 통달하지 못한 바가 있음이여. 

    

이 장의 내용은 자칫 현대 해설서가 범한 실수에서와 같이 그저 세상에 쓰이지 못한 천재이자 성현이었던 공자의 늘그막에 내뱉는 탄식 따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배우는 자들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여도 그것이 결코 배움과 실천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무엇보다 그저 배우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되며 끊임없는 노력으로 실천이 체득화된 삶을 경주해나가야 한다는 먼저 걸어간 대선배의 뼈 때리는 조언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겁기 그지없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 程子(明道)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은 道理(도리)에 있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알아들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선문답 같은 한 마디도 덧붙인다.     

“下學上達(하학 상달)은 뜻이 말 밖에 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배우는 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학문의 요점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을 우려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일러준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하학 상달의 말씀을 지켜야 하니, 이것이 바로 학문의 요점이다. 무릇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 곧 위로 천리를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일을〉 익히기만 하고 〈그 이치를〉 살피지 않으면 또한 위로 통달할 수 없다.”     


여기서 그저 대강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간과하기 쉬운 핵심이 마지막에 담겨 있다. 배우고 익히기만 하고 그 이치를 살피지 않으면 상달(上達)할 수 없다고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상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의 방법론으로 ‘이치(天理)를 살핀다’라는 과정을 제시한 것은 배우는 자들이 곰곰이 곱씹어 그 의미를 파악해야만 할 내용이다.     


그 천리(天理)라 부르는 이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찌 살필 것인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장을 제대로 공부하고 익히려는 이의 바른 자세라 할 것이다.     


공자는 이미 자신의 평생을 통해 이 장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배우는 자로서의 태도를 입증해 보였다. 사실관계부터 재확인하자면, 공자는 결코 세상이 나를 써주지 않는다고 自嘆(자탄)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들을 원망한 사실이 없다. 그가 한탄하고 탄식했던 것은 오로지 올바른 도리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였을 뿐이지, 자신이 크게 쓰이지 않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탄했다면 당대는 물론이고 수천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인으로 숭앙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배우고 익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알게 되었음에도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시류(時流)에 맞지 못해 발탁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하고 기운이 빠지기 마련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올라 세상을 바로잡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그 자리에 나보다 능력이 더 떨어지고 그야말로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지저분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은 실망을 넘어 좌절로 이어지게 된다.     


공자가 이 장에서 일러주는 가르침은 그다음의 문제이자 궁극적인 목적의식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다. 배우고 익혔던 이유와 목적이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세상에 쓰이지 못한 것 때문에 좌절한다면 그 목적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부수적으로(?) 누리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옳지 못하여 정도(正道)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하는 이들이 중용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겠다고 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 썩은 세상에 올바름을 실천하겠다고 나서려는 이가 견제를 받고 방해받는 것은 오히려 당한 것인데, 세상이 바르지 못한 것은 제대로 분석하면서 자신을 써주지 않는 세상과 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는 것 자체가 배움도 수양도 부족하다는 따끔한 일침인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시기가 나를 알아봐 주지 못하는 상황이고 나를 알아봐 주고 써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 부족한 자신을 채우고 그 어떤 경우에도 앞으로 나아감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공자는 강조한다.     

열기방장한 스물이 되어 경성제대에 들어가 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삐뚤어짐을 바로잡겠다고 화염병을 손에 들고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여 썩어빠진 군부독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외쳤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변절(?)하여 일신의 영욕을 누리겠다며 노망난 늙은이처럼 머리와 가슴에 빨간 띠를 두르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지 우리는 가장 앞자리 1열에서 목도하고 있다.     


아예 민주화운동이라고는 상관없이 도서관에 처박혀 판검사인 법비나 정치꾼이 된 자들은 일러 말할 나위도 없고, 운동권이랍시고 그것을 훈장 삼아 여의도에 진출하여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그것을 자기 자식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든 넘겨주어 대를 이어 그 알량한 영욕을 이어나가겠다는 추악한 자들의 연기(?)를 보며, 그들이 감히 그 지저분한 입에 정의와 국민을 담는 행위가 얼마나 참람된 일인가를 당신의 모습에 비추어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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