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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1. 2022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려는 자를 누가 감히 욕하는가

이미 안된다며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려는 자들에게.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子路가 石門에서 유숙하였는데, 신문(晨門)이 묻기를 “어디에서 왔는가?” 하자, 子路가 “孔氏에게서 왔소.”라고 대답하니, “바로 不可한 줄을 알면서도 하는 자인가?” 하였다.     

장에서는 다시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은둔 고수가 등장한다. 원문에서 ‘신문(晨門)’이라고 지칭된 인물이 바로 그 인물이다. 여기서 ‘신문(晨門)’은 그의 이름이 아니다. 먼저 주자의 주석을 통해 자로(子路)가 우연히(?) 만나게 된 이 은둔 고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石門(석문)은 지명이다. ‘晨門(신문)’은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는 일을 맡은 자이니, 아마도 현자로서 관문을 지키는〔抱關(포관)〕 일에 은둔한 자인 듯하다. ‘自(자)’는 부터이니,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를 물은 것이다.     


결국 ‘신문(晨門)’은 문지기 정도의 직업을 가리키는 말로, 그의 이름이나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저 그가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이유로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은사(隱士)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누구인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등장하면 모두 은둔 고수냐는 어이없는 오독을 하여 생뚱맞은 반문을 던질 이가 있을 듯하여 ‘굳이’, ‘부러’ 그 근거를 다시 알려주기로 한다.  

    

그가 군자인지 소인인지에 대해서는 그의 언행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장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그의 발언이 바로 그가 은자(隱者) 임을 명확하게 확인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되시겠다.     

“바로 不可한 줄을 알면서도 하는 자인가?”     

누가 감히 천하의 성현(聖賢)이라 존숭 받는 공자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 발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은둔 고수가 공자를 비판하는 의도로 풍자했다는 입장과 오히려 자신은 은둔하였지만 그렇게까지 비난을 감수하고 노력하는 공자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전자(前者)의 입장에서 보는 대다수의 학자들을 대표하는 호씨(胡寅(호인))는 ‘신문(晨門)’의 그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여 설명해준다.     


“신문(晨門)은 세상의 불가함을 알고 하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이 말로써 孔子(공자)를 기롱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볼 적에 할 수 없는 때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전 장에서도 공부하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정 정도 수준 이상의 레벨에 오른 고수라면 세상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 대개 어차피 자신의 노력과 열정으로 바꾸지 못할 세상이라면 그저 외면해버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쪽을 선택한다.


아예 그쪽을 돌아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스트레스받지 않고 그 부정한 권력에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택하는 쪽은 더더군다나 택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이기적인(?) 선택이라 하였다.     


그런 이의 입장에서라면 공자가 벌이는 그 처절한(?) 노력과 열정이 진정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기롱(비아냥)할 수도 있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이는 두 가지 경우, 아니, 실제로는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는 것을 은자들은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 자리에 연연하며 세상에 도가 행해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정말로 오로지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만을 위해 부정한 권력에 아부하며 결탁하여 그 영화를 누리려는 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수준의 배움을 넘어 실천과 수양이 고수의 수준에 이른 이라면 굳이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 끊임없이 올바름에 대해 설파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꿔나가겠다고 노력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너무도 상식적인(?) 그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공자는 신기한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 맞았다.     


때문에 나는 앞서 설명했던 후자(後者)의 해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공자의 문도들이 <논어(論語)>를 편집하면서 자신의 원조 스승을 비아냥거리는 내용을 굳이 담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서 후자의 해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자신은 이미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판단 내리고 초야에 은둔하여 자신의 능력을 당대의 부정한 위정자를 위해 쓰지 않겠다는 것으로 엄중한 시대의 판정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의미의 자기 보신(保身)의 다른 자기변명일 수밖에 없다. ‘소극적’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것은,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이 진정한 학자(學者)로서의 적극적인 소명을 부정하고 결국 자신 한 사람의 화를 피하고자 하며, 세상을 더 악화시키는데 힘을 보태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행간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보면, 그의 발언에 이미 자신이 갖는 생각과 실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공자가 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표현이다. 즉, 공자는 불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고, 어려운 일이고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다고 행하는 것임을 그 역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 그 판단이라는 것을 제각기 내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판단은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긋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라는 명제를 두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람은 비행기를 발명했고 그 명제를 실현해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이 달이나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은 말 그대로 꿈이었고 공상과학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치부했었지만 지금은 이미 가시화된 계획이 되어버렸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는 있겠지만, 부정한 권력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세상은 잘 돌아가고 도가 행해진다고 우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제대로’ 배우고 익혀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입장의 군자라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여겼을 때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 소명이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공자의 변함없는 가르침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고 숙명이며 당연한 소임이었다. ‘불가능’이라는 전제를 근거로 한 ‘신문(晨門)’의 설명에 따르자면,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이 드는 순간, ‘그저 초야에 묻혀 그 권력의 녹을 먹지 않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질문을 은자(隱者)에게 던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혼탁한 진흙탕에서 절대다수에 속하는 자들과 맞서 잘못을 바로 잡고, 백성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설파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어려운 일이다. 힘든 일이고 절대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행하는 공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저 그것을 비아냥(기롱)거리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을까?     


나는 이 장에서 ‘신문(晨門)’이 한 말은, 그 두 가지의 양가치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처세로 선택한 은자(隱者)들의 입장에서는 공자의 행보가 안쓰럽고 딱해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마음이 두 가지 양가치를 모두 드러내며 비판하는 듯 표면적으로는 보이지만 여기에는 존경과 애정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장을 읽을 때마다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고는 한다. 다른 의미에서 나 역시 늘 듣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는 내가 공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에도 왜 내가 자꾸 그런 소리를 듣는가 하는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몇 가지 사례에 대해서 아래 매거진에 공개한 바도 있지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는 늘 앵그리버드처럼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냐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아무에게나 화를 내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쓸데없는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https://brunch.co.kr/magazine/ahura1


위 매거진에 추후 연재를 하려고 준비 중인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한 가지 사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남 한복판은 수년 전부터 재건축 열풍으로 온통 소음과 분진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워낙 대단위로 하는 공사들이 진행 중이었던 터라 기존의 아파트들은 그 소음과 분진에 대해 피해를 오롯이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코로나 정국으로 학생들까지 집에 머물게 되면서 그 기간에 시도 때도 없이 두두두두 땅과 시멘트를 두들겨대고 대형 크레인이나 차량이 내는 거슬리는 공사 소음은 온라인 수업을 하는 학생들은 물론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늘어난 이들에게는 고역이었다.     

그런데 대개 강남 한복판에서 공사권을 따낸 대형 건설사들은 주변 아파트 세대들에게 그 소음 보상을 최소화하는 것에 양아치 같은 방식을 구사하기에 스스럼이 없었다. 강남구청에 소음 신고와 민원이 들어가 공사가 중단될 위기를 넘기기 위해 보상을 위해 본사의 승인이 필요하니 그때까지는 절대 소음 관련 민원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으름장에서부터, 당신들이 사는 아파트도 언젠가는 재건축을 하게 될 텐데 그때 똑같은 복수를 금전적으로 당하게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블러핑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수법이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한 짓거리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길가에 맞닿은 동에 대해 찔끔 보상을 하면서 한 아파트 동을 심지어 케이크 자르듯이 일부만 인정된다는 식으로 합의하며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이 살고 있는 동만 쏙 넣어 보상하고서는 전체 동이 합의했다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꼼수를 대형 건설사의 현장 담당자라는 녀석이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바로 환경부에 정식 민원을 제기하였고, 그 과정에서 재건축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이른바 폭파 시공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강남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폭파 시공은 특수한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소음과 분진의 수치를 환경부에 기록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공부하여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이 사는 동을 포함하되 케이크 자르듯 한 동의 일부 라인만을 자르는 꼼수까지 써가며 회사의 돈을 절약한 현장 담당자라는 작자가 환경부 재정회의에 건설사 대표로 참석하여 후안무치한 대표로 이렇게 말하더라.     


“이미 공사는 준공되었고, 저 교수님 말고는 그렇다 할 민원이 쇄도한 것도 아니고, 해당 아파트의 보상받지 못한 주민들도 따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아무 문제없이 끝난 공사에 왜 저 교수님만 혼자만 저러시는지 참으로 유감입니다.”     


대형 건설사에서 얼마나 약을 쳐댔는지 재정위원들은 물론이고 담당 조사관이라는 자들이 지자체에서부터 환경부 담당에 이르기까지 그냥 민원을 취하하면 안 되겠느냐는 노골적인 설득은 물론이고 어차피 보상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압박이 함께 가해졌다.     


6개월간에 걸친 긴 폭파 시공으로 인해 발생한 소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만약 보상받지 못한 세대들이 보상을 신청하게 된다면, 수억의 보상금이 발생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단 재정회의를 주재하는 건축학과 교수인 위원장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저 대단한 대형 건설사에 제안하였다. 지금이라도 저 교수님이 일을 더 크게 벌여 다른 세대들에게 이 꿀정보를 알려서 더 큰 손해배상을 토해내는 일이 없도록 미리 수습할 생각이 없느냐고.


그 무식하고 후안무치한 현장직 담당자는 그럴 마음도 없고, 회사 방침도 그러하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고?

피해를 입고도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던 세대들이 로펌을 통해 수억 원의 피해보상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모두 그저 안일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귀찮고 불가능한 일을 설마 누가 벌이려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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