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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8. 2022

중용되고자 하는 것이 사욕 때문이라면 지금 그만둬라.

올바름을 찾고자 한다면 과감히 사욕을 버릴 줄도 알란 말이다.

子曰: “賢者辟世, 其次辟地, 其次辟色, 其次辟言.” 子曰: “作者七人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賢者는 세상을 피하고, 그 다음은 지역을 피하고, 그 다음은 容色을 〈보고〉 피하고, 그 다음은 말을 〈어기면〉 피한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 은둔한 자가 일곱 사람이다.”     

이 장에서는 인재라 발탁되고 등용되고자 배우고 익히고 수양하는 이들이 어떻게 세상의 도에 따라 처세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도가 시행될 경우는 발탁되어 등용되는 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 되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세상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 공직에서 물러나라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세속을 아예 떠나라고 이른다. 첫 번째 지침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부연한다.     


천하에 道(도)가 없으면 은둔하는 것이니, 백이(伯夷)와 태공(太公) 같은 분이 바로 이 경우이다.    

백이와 숙제

둘째, 한 나라나 한 지역이 혼란스러우면 한정된 그곳을 떠나라고 한다. 두 번째 지침에 대해 주자는 천하가 어지러운 것보다는 나은 것이지 한정된 문제지역을 벗어나라는 내용을 파악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 다스려지는 나라로 가는 것이다.     


셋째, 군주의 용모나 태도가 예의를 벗어나면 그 군주의 곁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얼굴빛이 변한다는 것은 신하가 간언 할 때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얼굴빛을 달리하는 경우라고 주자는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부연하였다.      


(군주의) 禮貌(예모)가 쇠하면 떠나는 것이다.     


후대의 또 다른 학자는 여기서 말하는 색(色)을 여색(女色)으로 해석하여 여자를 가까이하여 정치가 올바르게 가지 못하게 될 경우를 경계하라는 조언으로도 보았는데, 전체적인 맥락의 흐름으로 보건대 앞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참고로만 소개한다.     

넷째, 군주에게 諫言(간언)을 해도 군주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군주의 조정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앞서 세 번째와 연계하여 살펴보자면, 신하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내심 마뜩잖은 부분이 얼굴빛에 드러나는 단계에 비해 이 네 번째 단계의 상황은 아예 대놓고 그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거부하는 경우이니 노골적이면서도 아예 고칠 수 없는 지경을 의미한다.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충언(忠言)을 거부하는 주군에 더 붙어있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부와 지위와 명예를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주자는 세 번째의 기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하더라도 네 번째의 노골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주저 없이 그 군주의 조정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을 어김이 있은 뒤에 떠나는 것이다.     


이 네 단계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규모의 순서대로 열거했다고도 평가하고, 상황의 차이를 병렬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도 평가된다. 그래서 정자(明道(명도))는 그 기준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이 네 가지는 비록 크고 작은 차례로써 말씀하였으나 優劣(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당한 바가 같지 않았을 뿐이다.”     

기준이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 기준보다는 어느 한 가지라도 어진 이(賢者)가 용납할 수 없다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 네 가지 상황은 공자가 이 장에서 정리한 이후로, 등용되기 전의 이들의 처세는 물론이거니와 이미 등용이 된 처지라 하더라도 벽세(辟世)의 변(辯)으로 공식적인 사유로 사용되게 된다. 즉,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초야로 돌아가면서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사퇴의 사유로 내세우게 되는 순간 그 나라나 그 군주는 형편없는 평가의 낙인을 역으로 받게 되는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확연히, 능력이 되지 않아 등용되고 싶어 했으나 뽑히지 못하고 그저 세상을 탓하는 自暴自棄(자포자기)나 厭世(염세)의 태도와 구분되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늘 자신의 부족한 능력과 상관없이 등용되기를 바라는 소인(小人)의 경우에는 언제 누구라도 자신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맨발로 달려갈 것이나, 이 장에서 공자가 정리한 사유로 인해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는 벽세(辟世)라면 그의 사직과 은둔은 정당하고 그 태도가 決然(결연)하다고 평가받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어지는 공자가 말했다는 “일어나 은둔한 자가 일곱 사람이다.”라는 글이 묘하게 위화감을 갖게 만든다. 이 장은 대개 별개의 장으로 분리되어 이 장과는 다른 내용이라고 주석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용이 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않는다고 은둔한 이들, 7인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이기에 내용상 바로 붙여 이해하는 것에도 무리가 되지는 않는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몇몇 학자들은 이 문장이 뒤에 공부하게 될 ‘미자편(微子篇)’의 8장 맨 앞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잘못 편집되어 이 장에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뒤에 공부하면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그 장의 내용에 등장하는 7명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은둔한 대표적인 그 일곱 명이라 지칭된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 장에서 첫 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등장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그리고 앞서 ‘태백(泰伯) 편’의 첫 번째 장에 등장했던 우중(虞仲), 그리고 ‘미자 편(微子篇)’의 8장에 등장하는 이일(夷逸)과 주장(朱張), ‘위령공(衛靈公) 편’의 13장과 ‘미자 편(微子篇)’에서도 두 번이나 등장하는 유하혜(柳下惠), 또 ‘미자 편(微子篇)’의 8장에 등장하는 소련(少連)과 같은 편 6장에 등장하는 장저(長沮), 걸익(桀溺), 7장에 등장하는 장인(丈人), 그리고 이번 ‘헌문(憲問) 편’에 41장에 나오는 하궤(荷簣), ‘팔일(八佾) 편’의 24장에 나오는 의봉인(儀封人),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자 편(微子篇)’의 5장에 등장하는 접여(接輿)까지를 말한다.     


당연히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대표적인 인물들인데 그들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고 다양하고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원시 유학에서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언제나 등장하는 것은 세상에 나서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역사를 이룬 인물들에 대한 부분만큼이나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 여겨 초야에 묻혀 일생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을 숭앙한다.     


이유는 하나이다. 중건 봉건제의 입장에서 왕이 실정(失政)을 한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당연하게(?) 쿠데타로 잘못된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 정부를 옹립하는 것은 쉽사리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조정, 잘못된 군주에 대해서 신하 된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입장은 그의 조정에 서지 않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의사의 표명이다.      


그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굳이 등용되기를 바라기 전에 등용되기 전에, 그리고 등용되고 나서도 언제든 적극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양심에 비추어 올바른 처세를 해야만 한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담고 있다. 내가 굳이 ‘현실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이유는 공자가 평생을 보아왔던 가식에 둘러싸여 제대로 된 처세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 없던 그 환경과 군상들에 있음을 행간에서 길어낸 것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급기야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힘의 논리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묵과하고 세상에 은둔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은둔한 강직한 선배 세대의 모습을 숭앙하되 자신은 그 모습을 따르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도 공자는 몸소 실천을 통해 자신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도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으니 초야에 숨어 한평생을 보내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나만 시비 구분을 명확하게 할 정도로 잘 알고 세상에 도가 없음을 한탄하기보다는 이 꼴 저 꼴 보고 싶지 않으니 그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듣지 않는 초야에 묻혀 자신의 공부를 하며 일생을 유유자적 보내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조그만 벼슬이라도 그렇게 해서 주변에 떵떵거리며 변죽을 울리고 허풍을 떨며 살고 싶어 하는 소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기주의의 형태이기는 하다. 하지만 부와 명예 사리사욕에 대한 욕심이 없는 고수의 입장에서는 굳이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도 않는데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올바르지도 않은 군주의 곁에서 알랑거리며 지내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테니 그저 자기 마음만 편하게 지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장수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어차피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이나 사리사욕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도 없거니와 실제로 돈이 있다 하더라도 사치를 부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사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 고수의 입장에서는 고민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칠순이 되기 전까지 강에서 구부러지지도 않은 낚싯바늘로 세월을 낚으며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세상을 구할 조력을 구할 군주를 기다렸던 강태공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강남에 빌딩을 가지고 있지 않고 3억 이상되는 외제차를 굴리지 못한다며 구시렁거리고 남편을 버리고 집에서 나가버린 그의 아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강태공의 고사(古事)를 들으면서 세상 사람들은 결국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식의 해석을 제멋대로 하기도 한다. 물론 배움이 짧고 얕아 그렇겠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공자나 강태공 같은 인물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그 능력이 만렙이었다. 다만 그 능력을 언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쓸 것인지를 살피고 있었을 뿐이다.     


일곱 명의 은자가 일어나 떠났다는 문장을, 이 장에 뒤에 붙여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생뚱맞은 내용이 아닌지라 이 장에 붙여 설명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이 씨(李郁(이욱))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作(작)’은 일어남이니, 일어나 은둔하려고 떠나간 자가 지금 일곱 사람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니, 굳이 그 사람들을 찾아서 채우려 한다면 穿鑿(천착)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어린 40대 여성 총리가 내각을 꾸렸을 때, 몇몇 장관직에 오른 인물 중 몇몇은 그녀와 함께 갈 수 없다며 사직의 의향을 표명한 바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치사 중에서 이미 장관직에 지명되어 장관을 하면서도 혹은 총리를 하면서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철학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말이 달라졌다며 사직을 표한 이들이 있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최근에 벌어진 일을 우선적으로 기억하자면, 한직에 쫓겨나 방송 카메라에 대고 감정을 드러내며 ‘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충성한다’며 졸지에 검찰의 조폭화를 커밍아웃했던 검사가 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까지 승승장구할 때는 머리 넙죽거리며 숙였다가 정치적인 지지가 당시 정부의 반감보다 커졌다고 생각하자 반대쪽으로 폴짝 뛰며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경우나 강직한 판사 출신이랍시고 착각(?)하고 감사원장직에 뽑아줬더니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대신, 국민의 반감이 훨씬 더 커진 정부의 반대쪽에 폴짝 뛰어올라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차선으로 국회의원 보선에 나와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가 떠오른다.     

결국 최초의 검찰총장 출신으로 이전 정부의 반감을 기가 막히게 편승하는 서핑 실력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는 자신이 공언했던 대로 검찰 조직에 대한 한결같은 인사권을 통해 자기 사람들과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곁에 붙어 한 자리하겠다고 웽웽거리는 자들은 수두룩하게 매일같이 케이블에 등장하건만, 먼저 국민들이 등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바른 소리를 하며 이런 자리 필요 없다며 박차고 나오는 자는 왜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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