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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2. 2022

너 하나만 눈감고 넘어가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쌓이며 사회는 좀먹는 것이다.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已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子曰: “果哉! 末之難矣.”
孔子께서 衛나라에서 경쇠를 치셨는데, 삼태기를 메고 孔氏의 문 앞을 지나가는 자가 듣고서 말하였다. “마음이 〈天下에〉 있구나, 경쇠를 두드림이여.” 조금 있다가 말하였다. “비루하다, 너무 확고하구나. 나(자신)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만둘 뿐이니,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야 하는 것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과감하구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      

이 장은 앞에서 공부했던 상황과 같은 비슷한 상황을 그린다. 앞 장에 등장했던 은자(隱者)에 이어 삼태기를 들고 지나가던 또 다른 은자가 등장하여 공자의 행보에 대해 풍자 어린 논평을 가한다. 그렇다고 앞의 내용과 똑같은 것을 담고 있다면 굳이 바로 이은 다음 장에 편입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이 똑같은 은자가 등장하여 공자의 행보에 대해서 풍자하는 듯한 논평을 한다는 기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전 장과 구분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자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만을 듣고 공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일화를 담아 삼태기를 메고 지나가던 이가 공자에 가까운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은자(隱者) 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과 앞장에서는 은자의 논평만으로 상황이 종료된 것과 달리, 이 장에서는 은자의 풍자 어린 논평에 공자의 일침이 담긴 대꾸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공자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만을 듣고서 공자의 마음을 읽어낸 은자(隱者)의 정체를 설명하는 주자의 해설부터 참고해보기로 하자.     


‘磬(경)’은 악기이다. ‘荷(하)’는 멤이요 ‘蕢(궤)’는 풀(짚)로 만든 그릇이니, 이 삼태기를 멘 자 또한 은사이다. 성인의 마음은 일찍이 천하를 잊지 않으셨는데, 이 사람이 경쇠 소리를 듣고 이것을 알았으니, 그렇다면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은자(隱者)가 아닌 연주하는 악기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그 연주자의 마음을 읽는 것은 앞에서 공부했던 공자가 음악을 배우면서 이르렀던 타고난(?) 경지이다. 그런 높은 수준의 학식과 수양의 정점에 오른 은자(隱者)가 진짜임을 증명하는 내용은 다음 그의 언급에서도 이어진다. 그가 공자를 논평하면서 <시경(詩經)>의 한 구절인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야 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공자가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 강조했던 <시경(詩經)>의 구절이 등장한 맥락을 풀어준다.     


‘硜硜(경경)’은 돌의 소리이니, 또한 전일하고 확고한 뜻이다. 옷을 벗어 이를 가지고 물을 건너는 것을 ‘厲(여)’라 하고, 옷을 걷고 물을 건너는 것을 ‘揭(게)’라 한다. 이 두 구는 <詩經(시경)> ‘衛風 匏有苦葉(위풍 포유고엽)’의 시이다. 공자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데도 그만두지 아니하여 얕고 깊음의 마땅함에 적합하지 못함을 조롱한 것이다.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풍자하고자 했던 내용까지 그대로 원문의 문면에 드러낸 것은 행여 그 비유만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초심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배려로 보인다. 그 행간의 의미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 도가 통하지 않을 때는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했던 처세를 지키지 못하고 사람들이 그 행보를 알아봐 주지 않는 데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주유하면서까지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불가능(?)을 끊임없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안타깝고 안쓰러우면서도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탄식이 담긴 말이다.     


이 부분의 구조와 행간의 의미는 전체 장의 구조와 교묘하게 잘 맞아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만을 듣고서도 공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삼태기를 메고 가던 이의 수준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은 공자가 처음 음악을 배우고 익히던 그 일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즉, 공자의 수준이라는 것을 문면에 보여줌과 동시에 공자와 같은 과정을 밟아 그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단계까지 이르는 것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악기를 연주해주는 공자의 모습을 그린 <행단도>

거기에 더해, 은자(隱者)가 공자의 상황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준은 다름 아닌 ‘시중(時中;때와 상황에 맞추어 운신(運身)하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늘 강조했던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원칙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 그가 공자를 논평하면서 비유한 원전은 바로 공자가 제대로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데 공부해야 할 책이라고 강조에 마지않았던 <시경(詩經)>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여기까지만 보자면, 은자(隱者)가 이른 과정과 수준은 공자가 밟아왔던 그 정 코스를 그대로 밟았음을 보여준다. 굳이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언급했던 그 과정과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의도가 있다. 공자가 천하의 목탁(木鐸)이 되겠다고 하는 행보는 공자가 배우고 익힌 기존(?) 은자(隱者)가 배우고 익힌 바대로라면 모순되는 것이 일면 타당하다는 반증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구조를 안배한 것은 바로 이 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반전을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풍자하는 논평을 전해 들은 공자는 한 마디의 감탄(?)을 남긴다.

“과감하구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     


이 마지막 공자의 감탄(?)이야말로 고수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극치를 보여주는 반전이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는 아래 주자의 주석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 은자(隱者)의 훌륭한 모습에 감탄했다는 식으로 수박 겉핥기로 무지한 초심자들을 호도(糊塗)하는 무식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연히 아니다, 그런 뜻.

공자의 이 마지막 한 마디는 공자가 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그 정점에 올랐으면서도 그들 은자(隱者)와 변별되는지 그리고 진정한 군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고급 수준에 오른 이들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떤 마음가짐과 처세를 해야 하는지를 공자가 몸소 보여주고 있음을 반증하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果(과감하구나!)’라는 내용은 이른바, ‘세상을 과감하게 잊고 은둔하는 것’을 지칭하는 ‘果忘(과망)’이라는 내용의 의미로 뜬금없이 과감하다는 동사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즉, 세상을 과감하게 잊는다는 것은 부와 명예를 버리고 사리사욕에 대한 욕구를 버리는 ‘1단계’를 이루었기에 ‘과감하다’라는 표현을 써 칭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칭찬은 이제 막 고급자 수준에 오른 이에게는 칭찬일지 모르겠으나 더 높은 군자의 경지를 목표로 삼는 이라면 칭찬이 아니라 꾸지람이고 죽비로 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이어진 공자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라는 탄식 때문이다.     

먼저 문면만을 그대로 읽어 오독의 여지를 만들 수도 있었던 주자의 주석을 통해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궁구 해보기로 하자.      


‘果哉(과재)’는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함을 탄식한 것이다. ‘末(말)’은 없음이다. 성인은 마음이 천지와 같아서 천하를 보기를 한 집안과 같이 하고 중국을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하여 하루도 잊지 못한다. 그러므로 삼태기를 멘 자의 말을 듣고서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함을 탄식하신 것이다. 또 사람의 출처(出處)를 만일 다만 이와 같이 한다면 또한 어려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앞서 ‘果忘(과망)’이 세상에 나서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에 대한 사리사욕을 버리는 1단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니 칭찬일 수 있다는 설명은 주자가 위 주석에서 ‘과감함을 탄식했다’라는 표현에서 칭찬과 비난의 양측면을 모두 암시해준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린 것은 1차적으로 칭찬할만한 처세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러한 은자(隱者)의 처세는 자신이 세상을 지저분한 꼴을 보고 듣지 않겠다고 하는 이기적인 행위임에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1단계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세상에 나서서 자신의 사리사욕은 챙기겠다는 마음을 버리되, 2단계로 나아가 설사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 혼탁하기 그지없더라도 배운 자로서의 소임을 온몸을 다해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군자가 해야만 할 책무(責務)이자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이 공자의 마지막 탄식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고 한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은, 그저 사리사욕만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는 것은 자기 마음 수양 하나만 다스리면 되는 것이니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으로, 거기까지도 가기 어려워 이른 자들이 많지 않지만, 그 정도까지 이른 자라면 더 높은 실천의 궁극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은자(隱者)들에 대한 외침이자 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자기변호에 다름 아닌 바이다.        


그래서 은자(隱者)의 처세에도 레벨이 있음을 정리해주는 이러한 가르침을 오롯이 정리한 다음과 같은 명구절이 있다.     

“작은 은자는 산림에 숨고, 중간 은자는 저잣거리에 숨으며, 큰 은자는 조정에 숨는다.(小隱隱于林, 中隱隱于市, 大隱隱于朝)”      

이 가르침을 공감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진(晉) 나라 왕강거(王康琚)의 시 <반초은(反招隱)>에 “작은 은자는 산림에 숨고, 큰 은자는 저자 속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라는 명구(名句)가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처세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 지난한 삶을 걸었던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부도 자신보다 부족하고, 그렇다고 본래부터 갖춘 총기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더 높고 더 크게 쓰이는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공자에게는 평생이 그러했다.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서 능력을 갖추고 노력을 하여 위에 올라간 이를 그저 술안주 감으로 삼는 저열한 소인배들도 분명히 적지 않다.      


하지만, 정말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능력까지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저열한 이들의 스크럼에 간택(?)되지 못하여 변방에 머물거나 그 뜻을 펼치지 못한 이들을 아주 드물지만 간혹 보기도 한다. 이전에도 경성제대의 교수들이 대한민국 초고수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실체적인 진실을 근거로 제시하며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배움을 기본으로 하는 상아탑에서 그런 복마전은 가장 명확하게 확인하곤 한다.      


결국 그 복마전을 만든 이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소인배들이다. 세상이 그렇고 그런 자들이 득세하여 주요 보직을 차지하였다고 하여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모두 마다하고 그 바닥을 떠나 초야에 묻혀 지내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을 아는 이들만이 아는 진실이다. 심지어 소인배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쥐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지금 있는 자리를 통해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성공을 이루었고 그 성공을 세상에 인정받았다고 으스대고 다니기까지 한다.      


그들의 얕은 수준 내공을 보며 코웃음 치며 그 천박한 행보를 언론을 통해 접하면서 그저 어이없이 웃으며 내가 이미 뛰어나온 지저분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서 이미 국운이 다 되어간다는 실감을 하며 이 나라를 완전히 떠나야 할지를 고민하는 지금의 내 마음도 그 은자(隱者)의 고뇌를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현역 목사의 아동학대 사건에 대해 경찰에서 수사 비리를 덮겠다고 한 불송치 사건에 대해 검찰에서 일선 검사라는 자가 이미 불기소 도장을 기계적으로 찍어줬는데, 검찰의 연금과도 같은 의미의 전관을 고용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우직하게 항소를 하고, 그들의 바로 윗 선배인 부장검사급이 당연히(?) 기각해버린 사건에 대해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도 어렵다는 법원의 재정신청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검찰의 재항고(현행법상 고발사건은 고소사건이 아니기에 재정신청조차 할 수 없게 되어있다.)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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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세상이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니까 그들이 당신들을 거리낌 없이 ‘개돼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을 목도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문제인 것을 아직도 알지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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