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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4. 2022

예(禮)를 좋아하려면 일단 제대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알면서도, 예(禮)를 지키려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子曰: “上好禮, 則民易使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윗사람이 禮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 쉽다.”  

이 장은 오랜만에 여덟 자의 짧은 가르침만을 전한다. 짧으면 더욱 긴장해서 그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주력하여야 한다고 일러준 바 있다. 어설프게 해설한 현대 해설서들의 내용에서처럼 뜬금없이 등장한 예(禮)를 말 그대로 ‘예의(禮儀)’정도로 파악하고 그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강 이 장을 겉만 훑고 지나가서는 <논어(論語)>를 백번 읽었다고 해봐야 가슴은 고사하고 머리에 남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원시 유학에서 말하는 ‘예(禮)’는 현대인이 현대어에서 대강 파악하는 에티켓 정도의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원시 유학을 오염시켜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면서 오히려 신분의 차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대전제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장을 통해 당신이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예(禮)’에 대해 도대체 그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장의 내용이 굳이 주석이 필요하지 않았던 ‘예(禮)’에 대한 의미가 상식이던 시기의 주자는 자신이 뭔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 사씨(謝良佐(사양좌))의 의견을 대신 편집하는 것으로 배우는 이들이 혹 실수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배려하였다.     


“禮(예)가 통행되어 분수가 정해지므로 백성을 부리기가 쉬운 것이다.”     

이 주석의 핵심은 ‘예(禮)’가 제대로 교육되어 통용하게 되면 ‘분수가 정해진다’는 명제이다. 행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분수를 알게 된다는 내용의 뒷절에 이어지는 백성을 부리기 쉬워진다는 개념과 연관 지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운운했던 신분의 명확한 구분을 넘나들지 말라는 경고 따위로 이해하는 어리석은 헛발질을 하지 않길 바란다.  

    

짧은 가르침은 풀어서 길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삽질(?)을 하게 만들 여지가 큰 것도 사실이다. 하여, 이 장과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가 이미 앞서 ‘자로(子路) 편’의 4장에 배웠던 다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기로 한다.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의로움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고,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길게 설명한 위 내용을 보게 되면 이 장에서 말하는 ‘백성을 부리다’라는 명제 때문에 오독을 할 여지가 줄어든다. 왜냐하면 윗사람 역시 또 윗사람이 있는 것인지, 만약 천자라면 그리고 황제라면 윗사람이 없으니 ‘예(禮)’라는 것을 몰라도 되는데 ‘예(禮)를 좋아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예의범절의 협의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초심자로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오해의 여지는 이미 공자와 논어를 짓밟던 중국의 문화 대혁명 때 趙紀彬(조기빈)에 의해 이 내용이 공자의 계급주의적 한계를 보이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논어>에는 민중 억압의 사상이 가득하다고 평가절하하는 부분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봉건제의 옹고한 신분제도 자체나 정치사상 자체가 공산주의의 만민 평등주의에도 위배된다고 내리 깎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라. 물론 공자의 시대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위정자가 백성을 군사나 토목의 일에 멋대로 강제 동원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기에 ‘백성을 부린다’는 표현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유린하고 이용하는 것으로 오독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공자가 정말로 백성을 개돼지로 여겨 그들을 부리는데 예의범절이 필요하고 그 밑의 개돼지들이 감히 예의범절을 제대로 알지 못해 상전에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통치철학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짖어댔던 썩은 조선 정치꾼들과 수준이 똑같았다고 여기는가?     


만약 그 정도 이해 수준밖에 되지 않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네 어쩌네 하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라면 앞의 1장부터 돌아가 공부할 필요가 없이 그냥 지금 먹고사는 기술(?)로 그렇게 먹고만 살다가 조용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권한다.     


벌써 아침마다 한 장씩 2021년 5월 말부터 <논어>를 읽으며 공부해온지 1년 반이 넘었고, <논어>의 3분의 2 능선을 넘어온 시점에 아직까지 공자가 사용하는 ‘예(禮)’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제까지의 공부는 헛공부였고, 그저 배운 척하고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척만 하고 싶었던 허세일뿐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공자에게 백성들은 무지하기 그지없으나 결코 개돼지가 아니었다. 공자에게 있어 백성은 도덕적 주체임을 우리는 여러 가르침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앞서 공부했던 ‘태백(泰伯) 편’의 “군자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후덕하면 백성들은 仁의 마음을 일으키고, 옛 친구를 잊지 않으면 백성들은 경박하게 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그중 하나이다. 오늘 이 장의 원문에서도 공자는 결코 지배층이라고 하는 위정자의 권력에 대해 말하지 않고 윗사람이 예를 좋아해야 한다고 전제를 명확히 하고 있다.     


위 주석에서 살펴보았던 핵심 개념 ‘분수’는 바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禮達而分定’이라는 명제를 풀이한 것이다. 즉, 예가 위아래에 시행되어 사람마다 職分(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의 선순환이자 그 지향하는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茶山;정약용) 역시 이 장을 풀이하면서 使民을, ‘부린다’의 의미인 ‘백성을 征役(정역)으로 내몬다’는 의미로 풀지 아니하고, ‘백성을 善(선)하게 만든다’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 궁금증이 생긴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신분의 엄중한 선긋기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의 ‘분수’는 분명히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분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다.

    

분수는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물론 그 위치는 봉건제에서 말하는 신분의 위치만으로 한정되는 협의(狹義)의 의미가 아니다. 분수는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만 할 소임을 깨닫고 그것을 온전히 실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위에 있다고 하는 임금이자 천자인 위정자는 그가 해야 할 소임이 백성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리석은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받들어져야 할 권리가 높고 신분이 높아진다고 여길뿐,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이 더 크다고 깨닫지 못한다. 공자가 예(禮)를 바로 알고 좋아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분수를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법(禮法)이 엄중한 이유에 대해서 강조했던 것은 조선시대 정치논리로 들여온 성리학에서 오염시켜 변질되어버린 것처럼 본질적인 의미는 상실해버린 채 격식만을 강조하여 신분제의 차별을 옹고히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기 분수를 알게 되면 자신이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낮게 있는 자, 특히 자신이 보살피고 챙겨줘야 할 이들에 대한 책무가 더 많아지고 무거워져야만 한다는 것이 예의 본질이고 공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가르침이다. 돈이 없는 자와 돈이 있는 자가 함께 밥을 먹었는데, 돈이 없는 자가 그 밥값을 내겠다고 주머니를 탈탈 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힘이 훨씬 강한 자라면 자신의 힘을 엄한 곳에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힘을 가지고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을 목도하고서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데 그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분수를 자각한 예의 본질이란 말이다. 본질이란 본디 알기도 어려우나 행하기는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예(禮)가 고리타분한 것이고 그저 격식만을 추구하는 예의범절이라고만 이해했던 이들에게, 이 장에서 공자는 진정한 사회적 책무와 소임을 분수라는 이름으로 깨닫는 위정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이 그 본보기를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함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주입식 교육도 아니고 공포로 억압하여 따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유치원에서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졌을 때 손을 들고 건너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그냥 손을 잡아끌며 차가 있는지 없는지 대강 살피고 무단횡단을 해 버릇한다면 그 아이는 더 이상 길을 건널 때 횡단보도에서 손을 들고 길을 건너려 하지 않는단 말이다.     


뒤에 공부하게 될 ‘양화(陽貨) 편’의 4장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라는 내용이나 같은 편 6장에서 ‘은혜로우면 사람을 부리기에 족하다’라고 하는 것의 ‘사(使;부리다)’는 피지배층을 부린다는 개념이 아닌 그 사람을 가르쳐 동화시키고 공감시켜 마음과 행동에 변화를 올바름으로 이끄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설명은 이 장의 선순환 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 장에서의 가르침이 우려하는 악순환을 지속하고 있어 ‘이 나라의 국운(國運)이 다했구나!’라는 섬뜩한 탄식들이 스스럼없이 나오게 만들고 있다.       


범죄자들에게 윽박지르고 함부로 육두문자를 쓰던 일개 검사라 하더라도 거친 언행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그런 평소의 언행이 평생 몸에 밴 자가 나라의 통수권자가 되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해외에 나가 외국인들은  한국어를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겨 평소 하던 대로 말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그가 있던 위치와 자리가 달라졌듯이 그가 지는 소임과 책무가 달라졌음을 깨닫기는커녕, 인지하지도 못한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높은 자리에 있었던 시간보다 험한 언행으로 지내왔던 평생이 더 길었으니까 실수였다고 잘못했다고 더 삼가고 조심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고쳐나갔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것이 ‘자백’이라는 형태로 유죄의 증거로 법정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그가 평생을 지내온 그 바닥의 습성대로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잘못된 그 직업을 가진 자들의 습성이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를 그 자리에 올리며 같이 호가호위(狐假虎威)했던 수많은 정치꾼들은 그에게 일러줬어야만 했다. 정치란 당신이 있었던 ‘조직’과는 다른 곳이고 지금 당신은 평생을 해왔던 칼잡이가 아닌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 예의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평생 정치판에서 굴러왔다고 하는 자들은 그의 곁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할 뿐 그의 잘못을 최대한 빨리 교정하는 현명한 선택을 권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았다. 이미 대선 이전에 나이 어린 당대표에게 똑같은 육두문자를 쓴 사실이 불거졌을 때부터 그의 인성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 역시 똑같이 칼잡이 조직과 같은 육두문자가 입에 배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언론인 출신이라는 인지도를 등에 없고, 청와대 대변인에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국회의원으로, 홍보수석 자리까지 오른 이나 함께 대동했던 외교부 장관이나 여당이라고 간판을 바꿔단 정치꾼들은 버젓이 들리는 한국어 듣기 평가를 강제로 수행한 국민들에게 단체로 집단최면을 건 것이라며 자막을 먼저 달아 방송한 방송사를 고소하고 대놓고 억압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워딩이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자백’이고 ‘유죄의 증거’라 여기는 조직의 문화에 찌들어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국정농단으로 감옥으로 직행했던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예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국운(國運)이 다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그의 주변에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바른말을 해서 잘못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주변에 그런 이가 있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처음 지적한 방송사를 억압하고 비행기 같이 안태워준다는 듣도 보도 못한 코미디만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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