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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5. 2022

백성을 공경하지 않는 이를 군자라며 따를 바보는 없다.

군자라 불리고 싶다며 정반대로만 행동하는 소인배들에게.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人.” 曰: “如斯而已乎?” 曰: “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子路가 君子에 대하여 물으니, 孔子께서 “敬으로써 자신을 닦는 것이다.” 하셨다. 〈子路가〉 “이와 같을 뿐입니까?” 하고 묻자, “자신을 닦아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하셨다. 다시 “이와 같을 뿐입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신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자신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함은 堯舜께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이 장에서는 군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특이한 점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세 번이나 거듭하고 있고, 그때마다 다른 듯 하지만 형태의 변화가 아닌 깊이의 변화를 통해 성격 급한 일반인을 대변하는 자로(子路)의 눈높이에 맞춰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로(子路)의 질문에 공자는 자기 수양을 강조하면서 ‘경(敬)’이라는 방법론을 끄집어낸다. 군자를 지향점으로 목표 삼았던 자로(子路)는 그야말로 우직하게 자신이 군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니 공자는 당연히 그의 눈높이에 맞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으로 ‘경(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자로(子路)의 입장에서는 그 대답이 영 시원찮게 들렸던 듯하다. 그도 그러할 것이 공자의 원시 유학에서 ‘경(敬)’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가 자로(子路)에게 구체적으로 와닿기 만무하였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공자는 자로(子路)가 원하는 형식을 갖춰주되, ‘경(敬)’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제대로 익히고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던 듯싶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자로(子路)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방법론 말고 뭔가 더 구체적인 것은 없느냐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자신이 유도한 흐름에 만족하며 다시 조금 깊이 들어가 ‘자신을 닦아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며 ‘경(敬)’을 쉽게 풀어준다.     

그렇게 다시 설명해주었음에도 스승의 의도나 앞서 언급했던 ‘경(敬)’의 개념이 군자가 되는 핵심임을 깨닫지 못한 자로(子路)는 다시 한번 재확인하듯 정말로 특별한 방법이랄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공자는 자신을 수양하되 결국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경(敬)’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에게, 쉽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는 그 수양 방식을 저 요순 임금조차도 어려워했다며 죽비를 내려친다.     


이 장에서 공자가 한 3단계 가르침의 행간에 담긴 의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해준다.


‘敬(경)으로써 자신을 닦는다.’는 夫子(부자)의 말씀이 지극하고 다하였는데, 자로(子路)가 이것을 하찮게 여겼으므로, 充積(충적)함이 盛(성)하여 자연히 남에게 미치는 것을 가지고 다시 말씀해 주셨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人(인, 남)’이란 자기와 상대하여 말한 것이요, ‘백성’은 남을 다한 것이다. ‘요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는 것은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음을 말씀한 것이니, 자로를 억제해서 가까운 것에서 돌이켜 찾게 하신 것이다. 聖人(성인)의 마음이 무궁하시니, 세상이 비록 지극히 잘 다스려지더라도 어찌 반드시 四海(사해) 안에 과연 한 물건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음을 알겠는가.(장담하겠는가.) 그러므로 요순도 오히려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부족하게 여기신 것이다. 만약 나의 다스림이 이미 만족하다고 한다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堯舜께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堯舜其猶病諸!)’라는 마지막 내용은 설명이 아니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에 대한 꾸짖음의 표현으로 상투 어구처럼 사용된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양화(陽貨) 편’의 28장에도 똑같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 장에서는 목적어가, 이 장에서와 같은 군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닌,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 요순 임금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며 어려워했다는 것은 일반인들은 결코 함부로 쉽다고 입에 올릴 수 없음을 반어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인 셈이다.      


그 상투 어구를 듣고 그제야 스승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깨우친 자로(子路)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로(子路)가 바로 ‘경(敬)’에 대한 개념과 스승의 의도를 읽어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군자가 되기 위한 자기 수양을 하되 ‘경(敬)’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깨달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어려운 사실을 깨쳤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공자를 스승으로 두고 곁에서 공부해온 자로(子路)도 그러한데, 아침마다 고작 논어 1장씩을 읽기만 한 당신이 이해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일러주고자 했던 ‘경(敬)’의 개념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한다.     

사실 이 장에서는 중간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경(敬)’은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과 동시에 지향점으로, 자기 수양을 하는 방법이 아닌 자기 수양을 완성시킨 이후 그 완성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리킨 것이다.     


‘경(敬)’이란 개념에 대해 송나라 유학자들은 ‘主一無適(주일무적; 자기 자신을 오로지 하여 다른 데로 분산시키지 않는 상태)’이라 정의 내린 바 있다. ‘경(敬)’이라고 하면 현대인들은 가장 먼저 ‘공경하다’를 떠올린다.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제 살펴보았던 예(禮)와 마찬가지로  ‘경(敬)’의 개념 역시 현대어가 갖는 협의(狹義)만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행여 배우는 자들이 ‘공경한다’는 협의(狹義)만으로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던, 다산(茶山;정약용)은, ‘경(敬)’이란 하늘을 공경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과 같이 구체적 대상을 공경하는 일을 뜻한다고 해설하여, 공경하되 그 대상이 어느 하나에 한정된 것이 아님에 방점을 찍었다.   

  

이러한 ‘경(敬)’을 설명하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로(子路)의 연이은 질문에 공자가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것’에 방점을 찍어 이해시키고자 했던 것은 ‘공경한다’만으로 ‘경(敬)’을 이해했던 사람은 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어려운 높은 벽을 느껴지게 만든다.


현대인에게 있어 공경이란, 결국 자신보다 윗사람이나 힘 있는 자에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윗사람으로서 공경받을만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 아닌가 하는 오독도 할 수 있겠다 싶었는지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준다.     


“군자가 자신을 닦아서 백성을 편안히 하고 공경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해지니, 오직 上下(상하)가 공경에 한결같으면 천지가 스스로 자리를 잡고 만물이 스스로 생육되어 기운이 화평하지 않음이 없어서 四靈(사령)이 모두 이르게 된다. 이는 信을 體行(체행)하고 순리를 통달하는 방법이다. 聰明睿智(총명예지)가 모두 이(공경)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     


주석이 오히려 더 심오해져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꼈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왜냐하면 그나마 공자의 설명을 이해하여 쉽게 설명한다고 해설한 것이 이 정도 수준이니 원래의 의미를 어설프게 공부한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이 장에 대한 현대 해설서들의 설명을 살펴보면, 이 장의 정수(精髓)를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경(敬)’과 ‘편안하다’는 개념에 대해서 그 흐름을 연계하여 제대로 설명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로(子路)가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것을 물으며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 여겨 스승에게 계속 물었던 이유는, 자로(子路)가 이해하고 있던 군자(君子)란 최소한(?) 세상의 부조리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존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제자가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당연히(?) 파악했던 공자였기에 공자는 ‘경(敬)’을 설명하면서 다른 사람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 더 확장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해준 것인데 그 핵심을 자로(子路)가 지금의 당신처럼 연결 지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경(敬)’이라는 지향점이 없이 자기 수양만을 완성한 존재가 군자(君子)라면 앞서 우리가 공부했던 자기만 모든 것을 알고 깨달았지만 세상을 혼자서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순간 초야에 숨어버리는 은자(隱者)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누차 강조했지만 공자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다. 세상의 목탁이 되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완성된 수양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공부와 수양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엄중히 꾸짖던 존재였단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수양이 완성된 이후, 지향점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목표로 ‘경(敬)’을 제시한 것은 바로 다산(茶山)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무엇을 위해? 결국 그것을 배워 깨치지 못한 내 주변의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백성들이 올바른 쪽으로 변화해 나아가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바로 개혁이다. 본래대로라면 배움에서 시작하여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기 수양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겠으나 모든 백성이 그렇게 할 수 없음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변모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배우고 익혀 그것을 실생활에 실천함으로써 올바름을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은 백성들이 감화하고 공감하여 따르고 익히게 만드는 것은 말 그대로 개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소 거칠게 들리는 ‘개혁’이라는 용어는 실질적인 공효(功效)를 거두기 위해서는 거칠고 험악한 방식의 추진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개혁의 성공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강건한 방식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 다수인 백성들이 스스로 동화되고 감화되어 개혁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개혁하려는 주체인 군자(君子)가 모든 것을 공경하고 받들어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향점에 대해, 모든 백성들이 공감하고 편안하게 여길 때에서야 비로소 개혁은 완성된다. 개혁인 급진적인 것이고 강압적인 것이며 기존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는 것이라고만 여긴 덜 배운 자들에게 공자는, 진정한 개혁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다혈질의 성격 급한 자로(子路)를 통해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 것만 같았던 ‘편안하다’와 ‘공경’의 개념은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소명을 이뤄야 할 군자(君子)의 설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진정으로 자신들을 공경해주지 않는 위정자를 누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라 여길 것이며 따를 것인가?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입으로만 공허하게 백성을 위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라며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떠들어대는 정치꾼들을 누가 지지할 것인가 말이다.     


판사가 되어 순환근무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지 못하고 특정 지방을 벗어난 적이 없이 그저 그 지역에서 쭉 토착 법조 세력(?)이 된 자를 ‘향판(鄕判)’이라 한다. 대한민국이라고 보편성을 담고 있다고 부르기 참 묘한 지역에서 향판을 지낸 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배경을 등에 업고 정치인이 되어, 재산을 불리겠다며 강남 한복판의 수십 년이 지난 재건축 예정인 아파트를 사두고 정작 자신은 그 돈으로 신축 주상복합에 살면서 당당히 ‘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에 대해 기쁠 거 하나도 없다. 난 기쁘지 않다. 이전 정권이 부동산 정책 망쳐서 이 꼴 된 것뿐이니 난 결코 기쁘지 않다.’라고 카메라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멀쩡한 TV를 부술 뻔했더랬다.     

그가 다시 엊그제 국정 예산안에 야당이 협조한다는 전제로 예산안을 확정 짓고 나서 이태원 국정조사에 합의하기로 했다면서 또 더 하지 말아야 할 말로 자신을 치장했다. ‘더 이상 정쟁이 없어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여당이 양보한 거란다. 그럼 여태 지들 이익 챙기겠다고 밥그릇 앞에서 으르렁거린 것이며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을 정말 국민들이 모를 거라 생각한단 말인가?     


아무리 대놓고 국민들을 개돼지라 여기며, 노인들에게 용돈 쥐어주며 태극기 들고 광화문에서 소리 질러달라는 일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국민이 절반도 채 안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인지하지 못한다.

 

버젓이 자신이 살지 않으며 투자가치를 위해 쥐고 있는 재건축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이전 정부를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후안무치한 자가 공경을 알 리가 없으며 그런 그의 가치관을 편안하게 여길 백성은, 그에게서 떨어지는 이익을 주워 먹는 개돼지 말고는 없다는 점을 과연 그들만 모르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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