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02. 2022

진정한 德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자신이 체행하고 갖추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진실.

子曰: “由, 知德者鮮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由야, 德을 아는 자가 드물구나!”     

이 장에서는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탄식하듯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다이다.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 이 짧은 한 마디에 참 많은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주자는, ‘위령공(衛靈公) 편’의 첫 장부터 이 장의 내용까지가 모두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던 중에 陳(진)과 蔡(채)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던, 이른바 ‘진채지액(陳蔡之厄)’의 시기에 나온 대화라고 정리하며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 바 있다.     


제1장부터 여기까지는 모두 한 때의 말씀인 듯하다. 이 장은 아마도 〈본편 1장에〉 자로가 성난 얼굴로 뵈었기 때문에 말씀한 것인 듯하다.     


앞서 살펴보았던 자로(子路)의 다소 뜬금없는 질문(“군자도 이토록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때문에 하나로 엮어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산(茶山; 정약용)은 주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모두가 동일한 상황인지는 확정할 수 없겠으나 공자가 어느 한 때라도 평온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서 만족스러웠던 시기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수년간 천하를 주유하고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의탁한 위정자를 만나지 못한 그즈음의 이야기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짧은 공자의 탄식이 갖는 의미이다. 자로(子路)가 어떤 성격을 가진 제자였고 얼마나 공자의 최측근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까지의 공부로 충분히 숙지한 바 있다. 또한, 여러 일화를 통해 공자가 제자였던 자로(子路)를 어떻게 여겼는지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살펴본 바가 있다. 그 배경지식을 토대로 공자가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에 대해서 파악해보기로 하자.     

주자는 이 장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해석을 통해 공자의 의도를 설명한다.     


由(유)는 자로의 이름을 부르고 말씀하신 것이다. ‘德(덕)’은 의리를 행하여 자기 몸에 얻은 것을 이르니, 자신이 덕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의미의 실제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먼저 ‘덕을 안다’라는 표현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면 상의 의미로는 덕(德)의 본질을 깨닫고 공자식의 가르침대로 그 덕을 실생활에 실천으로 체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범범하게 파악하기에는 그것만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라고 받아들이기가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한 대상이 자로(子路)라는 점부터 접근해보자. 앞서 주자가 이 상황이 벌어진 시기에 대해 천하를 주유하던 시기 중에서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위기, ‘진채지액(陳蔡之厄)’의 시기로 보았던 것은 그 점에서 유관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군자가 왜 곤궁해야 하냐는 그의 질문은 불만에 가까웠다. 물론 다혈질인 제자의 답답하고 짜증 나는 마음을 이해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그에게 군자란 본래 그러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스스로의 마음도 다잡았었다.     


이 장의 탄식은 그것에서 조금 더 나아간 자로(子路)를 위로하는 스승의 배려이자, 지치고 힘들어 쓰러지려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눈물 어린 자기 위로에 다름 아니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분석하는 가장 큰 근거는, 바로 원문의 뜻에 있다. ‘덕을 안다(知德)’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것을 공부하여 본질을 알되, 실천하고 체행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이의 덕을 알아볼 수 있을까?     

본래 덕(德)의 정의는, ‘자기 몸에 얻은 의리나 도리를 실천하는 바탕’이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몸을 닦는 행위를 ‘수덕(修德)’이라 한다. 그런데 이 장에서 나온 ‘지덕(知德)’이란 객관적인 본질을 아는 것, 즉 주관적인 자신의 덕을 아는 것이 아닌, 남이 지닌 덕을 아는 것까지 의미의 지평이 확대된다.      


그렇기에 지덕자(知德者)는 단순히 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넘어 자신이 체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전제에는 다른 이의 덕을 알아주는 자로 순차적인 확장을 이어나가게 된다. 막연한 개념어인 것이 구체적인 인지 행위로 변환되는 순간을 강조한 용어에 다름 아니란 뜻이다.     


덕이 무엇인지조차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수양할 수 없는 것이고, 그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수양을 거듭하여 자신의 실생활에 실천과 체행을 하는 자라면, 그 길을 걸어왔던 다른 이, 즉 수덕(修德)한 다른 이를 몰라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구조를 통해 이 짧고 간단한 탄식은 공자식 어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례로 재등장하게 된다. 먼저 덕을 갖춘 자가 드물다거나 덕을 배우려는 자가 드물다는 식의 일차적인 표현이 아닌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는 말은 복합적으로 그것을 갖춘 이가 드물고, 그것을 갖춘 이들이 드무니 다른 이들이 그것을 갖추었다고 하여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는 설명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천하를 떠돌았음에도, 성현이라고 천하에 칭송을 받고 있음에도, 군자를 완성하였음에도 공자는 자신을 알아봐 주는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였고, 그의 능력을 알아봐 주고 발탁하여 크게 등용하려는 주군(主君)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어찌 통탄하고 슬퍼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덕을 닦아 수양하여 실천하려는 자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천하가 썩어가는 꼴이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이제 자기 문하에서 조금 공부를 한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다혈질의 나이도 지긋이 먹은 제자 자로(子路)가 세상의 부조리를 제대로 읽기 시작하며 불만을 토로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개선할 수 없는 상황이니 또 어찌 탄식하며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위로에는 모든 내용까지는 아닐지언정 이제 시비를 가리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매진하는 자로(子路)에 대한 칭찬(허여)도 다분히 담겨 있다 하겠는데, 반어적으로 본다면 아직 성질만 괄괄한 자로(子路)도 이제 상황을 읽어내는데 천하에 나라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그만도 못하다는 매서운 죽비와도 같은 일갈이다.     


이 장에서의 표현이 본래부터 당시 있었던 것인지 공자의 언급을 통해 공식화된 상투 어구가 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문(古文)에서 ‘덕을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단순한 지기(知己)를 포함하여 인재를 보고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수준을 갖춘 위정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덕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라는 말은 곧 세상에 아직도 크게 쓰이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는 어구로 많이 사용된다.      


그렇게 보면, 어디 덕(德)만 그러한가? 그 흔한 베스트셀러 관련 비화들만 들어보더라도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 흐름을 타면서 대박신화를 연출해내기도 한다. 예컨대,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비롯하여 초대박을 친 베스트셀러들은 하나같이 처음엔 아무도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고, 여러 출판사에 외면을 당하다가 기적적인 계기를 통해 출판되고 세상에 빛을 얻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베스트셀러가 초대박을 치는 이유는 수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열광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원고가 유명 작가의 원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자신이 몇 장 읽어봤는데 끌리지 않는다는 이유 등의 다양한 사연으로 출판 거절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처음 접하고 거절했던 편집장을 비롯한 출판 관계자들은 바보이거나 눈에 뭐가 씌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이 내쳤던 그 원고가 성을 사고도 남을 초대박을 쳤다는 사실에 그들은 복통으로 이미 사망하지 않았을까?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강조하고 커리어를 강조하는 편집장들도 그것이 별 주목받을 작품이 아니라면서 걷어차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방송에 첫 무대를 가졌을 때 그 방송을 보면서 내가 들었던 생각은, 저 훌륭하고 파격적인 아티스트의 음악에 감히?라는 생각까지는 아니었어도, 어떻게 작곡가나 음악 전문가라는 이들의 저 오만한 태도가 면밀한 분석도 아닌 그저 얄팍한 자신의 주관을 툭툭 던지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탄식했더랬다.     

물론, 시대가 힙합의 문을 열 때였고, 힙합이라고는 전혀 무관한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쳤던 친구가 그야말로 핀잔을 들을 역발상의 상품이 X세대의 니즈에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읽는 것도 노력과 투자가 없이는 얻기 쉬운 능력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노력하고 투자하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란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베스트셀러와 시대를 여는 뮤지션을 알아보는 정도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작가와 뮤지션의 단계를 이미 거쳤거나 그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보아왔던 내공을 갖춘 사람만이 간파하고 읽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글이 그러하고 음악이 그러하며 문화가 그러할진대, 덕(德)은 사람이 갖춰야 할 근본 자질이 아니던가? 당연히 그 자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익힌 자가 그것을 수양하는데 매진하여 완성에 이르러야 내가 걸어온 길을 비슷하게 걷기 시작한 이들이나 나보다 조금 앞선 이들의 노력과 성과를 알 수 있다.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 그저 정선된, 혹은 잘 팔리는 책을 읽기만 하는 것에 익숙한 자는 창작의 고통을 직접 겪고 이해하는 자와는 적지 않은 수준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구상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상당한 내공을 갖춘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본 자만이 그에 준하는 결과물을 보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뼈를 깎는 고통이 담겨 있는지를 깨닫고 탄복하게 된다.     


방송에 나와 그저 몇 분 소개되는 연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거나 작가나 기자들이 써준 스크립트를 마치 자신의 생각인양 읽어 내려가는 것으로 인지도라는 것을 쌓은 이들이 실제로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여 정치신인으로 발탁하고 스카우트하는 이들은 없다.     

새로운 얼굴이라며 경찰 출신, 소방관 출신, 아나운서 출신, 기자 출신, 검사 출신, 운동선수 출신, 판사 출신 등등이 정치판에 데뷔하는 것은 이제 이상할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당연한 통과제의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들을 발탁(?)하는 이른바 그 당의 수뇌부라고 하는 고인물에서부터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며 계속해서 정치 신인을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실무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과연 정말로 덕을 알고서 그들을 선수로 등판시키자고 하는 것일까?     


빨간당과 파란당의 스피커 역할을 꾸준히 하며 아예 편 가르기를 하고 구색을 맞춰 온갖 잡다한 케이블 방송에 나와 떠드는 자들을 보면, 현역 의원이라는 자들을 포함하여 이제 곧 다가올 총선을 의식해도 너무 의식한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두른 보이지 않는 색깔의 띠에 대고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할 수 있는 쓴소리를 던지며 사회가 잘못되어 있으니 바뀌어야 한다고 당색(黨色)과 무관하게 자기 있는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자를 본 적이 있는지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경찰과 검사가 나쁜 놈들을 잡아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기자가 사회의 부조리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 민낯을 국민들에게 알려 잘못된 자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판사들이 재판에 회부된 정치꾼들이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다른 죄인들과 똑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그들의 위치에서 해야만 할 사회적 소임이자 책무이다. 

하지만, 그 소임을 하지 않은 채, 어디에 줄을 댈지 자신의 자리를 이용하여 간택받기 위한 스피커 역할을 자청하고 나대는 자들만이 그득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덕을 아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사리사욕만 아는 자들을 구별해내어 그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세상을 조금은 더 바로잡을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관성을 갖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헤아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