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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5. 2022

공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오독하는 이들에게.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無爲로(저절로) 다스리신 자는 순(舜) 임금이실 것이다.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南面하셨을 뿐이었다.”     

이 장을 처음 접한 초심자들 중에서도 인문학 관련 서적을 좀 읽었다고 초심자가 아니라고 티 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중심개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무위(無爲)’가 공자의 입을 통해 공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공자는 순임금을 사례로 하여 ‘무위(無爲)’로 다스린 그 방법에 대해 그가 ‘했던’ 행위라고는 그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한 것’뿐이라고 강조한다. 노자사상의 ‘무위(無爲)’가 튀어나와 그것이 과연 같은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원문의 구조상 뒤에 강조한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라 하겠다.     


먼저 간략하게 ‘無爲의 다스림’에 대해 정의하자면, ‘정치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만 무리 없이 실행하고 작은 계교를 일절 부리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표현으로는, ‘聖人의 성대한 德에 백성이 저절로 교화되기에 作爲(작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풀이하고 나면 노자(老子)의 無爲而化와 무엇이 크게 다른 것인지를 변별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에서 말하는 ‘無爲의 다스림’에 대해 그것이 노자의 것과 어떻게 변별되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풀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無爲(무위)로 다스렸다.’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대함에 백성이 교화되어서 作爲(작위)하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유독 순 임금만을 일컬은 것은 요 임금의 뒤를 이었고, 또 인재를 얻어 여러 직책을 맡기셨기 때문에 더욱 有爲(유위)의 자취를 볼 수 없어서이다. ‘몸을 공손히 한다.’는 것은 聖의 敬德(공경하는 덕)의 모양이니, 이미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을 뿐이다.     


여기서 ‘無爲의 다스림’이 갖는 공자의 용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노자의 사상과 변별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는 ‘순임금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각 직책을 믿고 맡겼다’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無爲’하면 떠오르는 노자사상에서의 개념부터 명확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3장의 마지막 구절에는 ‘爲無爲 則無不治(함이 없음으로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여 이 장의 ‘無爲’와 유사한 개념이 설명되어 있다. 말 그대로 노자(老子)의 ‘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조금의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며, 자연 그대로 인위를 가하지 않음을 뜻한다.      

자금성 교태전에 걸려있는 편액

그런데 주자는 위 주석의 설명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님을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에게 각 직책을 믿고 맡겼다고 하였다. 즉 공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순임금의 ‘無爲’란, ‘최종 인사권자에 해당하는 위정자, 군주가 자신이 직접 무언가 의도를 담아서 하는 행위가 없었다.’라는 특수한 의미로 한정한 것이다. 여기서 노자의 ‘無爲’와 공자의 ‘無爲’는 그 색깔이 판연히 달라진다.      


앞에서 순임금의 정치가 왜 후대에 칭송받는지를 분석하면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순임금은, 禹(우)로 하여금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고 棄(기)로 하여금, 농업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契(설)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고, 皐陶(고요)로 하여금 법을 관장하도록 ‘일임’하였다. 이러한 설명으로 인하여, 원시 유학에서 말하는 ‘無爲의 다스림’이란, 위정자가 適材(적재; 그 능력에 맞은 인재)를 適所(적소;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지위)에 배치하여 자기 직책(職責)을 다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만들어주는 정치를 하도록 하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한 ‘無爲’의 다스림이 갖는 특징에 대해서는 주자의 설명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마지막 공자의 설명으로 모두 해명되어 있음에도 아직 그만한 공부의 수준에 오르지 못한 자들이 눈앞에 읽고서도 읽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한편, 공자의 ‘無爲’는 ‘법 이전의 상식’으로도 설명이 확장된다. 굳이 법가(法家)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법(法)의 제정 취지는 사회적인 규제를 의미한다. 법(法)이 왜 생겨났는가? 상식이라고 하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어기는 자들을 통제하고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 연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위정자의 통치수단의 편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대해 그것을 어겼을 때 어디까지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법이고, 그것은 행정의 편의성을 포함하여 그 법의 제정과 실시만으로도 백성들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無爲’는 엄밀하게 규정하자면 ‘무사(無邪 ;사특함이 없다)’이다. 사특함이 없다 함은, 위정자가 각 분야의 전문가 인재들을 발탁하여 그들에게 책임과 권한 모두를 일임할 뿐, 결코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감정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거나 자신이 직접적인 의향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인재를 임명해놓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당연히 구분되는 행위이다. 먼저 인재를 등용할 때 그 자리에 권한을 주는 것에서 지나지 않고 그를 감시하는 역할은 당연히 인사권자가 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그렇게 임명받은 인재가 또 다른 사특함을 절제하지 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 여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임명권자인 군주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견제와 균형이다. 물론 그것을 담당하는 감찰기능을 가진 부서와 관리가 있긴 하지만, 그들의 보고를 듣고서 그것에 대한 진위여부를 판단하고 인사권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임명권자인 군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설사 자신의 의도에 맞게 군주의 비위를 맞추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여 직접 무언가를 시키고 행하지는 않지만 알아서 기게 하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기르는 동물조차도 자신이 어떤 행위를 보였을 때 주인이 좋아하는지를 기억하고 인지해서 자신이 위기를 처하거나 주인이 노여워했을 때 필사적으로(?) 그 행동을 취하며 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한 동물처럼 시키지 않아도 사특함을 가진 소인배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 알아서(?) 인사권자가 바라는 방향의 전횡을 저지른다. 그것이 무식하기 그지없는 소인배들에게 장착되게 되면 이른바 과잉충성을 불러일으켜 사단을 만들고야 만다.     

이 장의 원문 마지막에 공자가 강조했던 문장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했을 뿐이다.’라는 말은 ‘無爲’가 어떤 개념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無爲’를 ‘어떻게’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지침을 주고 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 이것은 바로 앞의 장에서 ‘덕을 아는 것’이 덕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의 덕을 알아보는 것으로 확장된 의미 확장의 과정을 다시 한번 답습한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올곧게 수양하는 것만으로도 정치는 이루어진다고 역설한 바 있다. 위정자가 덕을 좋아하고 예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배우고 익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백성들일지라도 자신의 주군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게 된다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      


그렇기에 이 장에서 공자가 강조한 ‘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닌, ‘無不爲(하지 않는 것이 없다)’로 설명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앞서 ‘헌문(憲問) 편’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제시되어 공부한 바와 같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인재들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위정자는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 설명의 확장 편이 바로 이 장의 바로 앞에 배웠던 ‘덕을 안다’는 개념의 확장 설명이었다.    

인재를 등용하여 배치하고서 자신의 의도를 반영하라고 지시하고 지시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못하냐고 눈치를 주는 저급한 행위를 거듭하는 것은 대개 인재 등용의 안목을 갖춘 자가 할 짓(?)이 아니다. 하물며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본능적인 사특함이 통제되지 않아 실수가 벌어지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과는 변별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을 면밀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아한 수면 위의 백조가 물 밑에서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는 것과 같이 게으름이 없어야만 가능하다.     

오히려 그들을 임명한 위정자인 군주가 그들이 행하는 행정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살피고 그들을 감찰하고 견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서로 더 발전해나가도록 균형을 유지해주어야만 하는 것도 시간과 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적극적으로 해야만 하는데, 어찌 그것이 ‘無爲’라고 적고 문면의 의미로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노력들 중에서도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궁극적인 행위 하나만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이 바로 '솔선수범'에 해당하는 자기 수양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행위로 꼽히는 이유는 하나이다. 법을 제정하고 만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상식을 뛰어넘어 법을 공부하고 제정하는 입장에서 누구보다 법의 사각을 잘 알고 있고 그 틈을 알고 있기에 자신은 ‘법적으로는’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미꾸라지처럼 처벌만을 피해나가며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순간, 자신이 나라를 말아먹는 선두에 서 있음을 자임하는 멘트를 내뱉었다는 것을 자신만 모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무슨 안전을 기획하려 했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으나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라는 이름을 거쳐 ‘국정원(국가정보원)’이라는 서슬 퍼런 그 조직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와 입맛에 맞춰 그들을 부린 통치권자들이 있었다. 그런 만행이 밝혀져 감옥으로 간 대통령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항명이 곧 전시에는 사형으로 이어지는 비대한 군사조직에서 지적 수준이 일관되지 못한 무지한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을 정치권으로 끌고 온 군사정권이 그런 행위를 하는 버젓이 자행했던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군사정권이 정산되었다고 여겨진 이후에도 그런 일들은 군바리 때보다도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저분하게 자행되었음을 우리는 여실히 목도한 바 있다.     


군대도 아닌데, ‘까라면 까야지’라고 해서 그 명령을 따랐던 불쌍한(?) 실무자들은 여지없이 잘 나가던 국가 공무원에서 죄수복을 입고 눈물 섞인 콩밥을 먹어야만 했다.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잘못된 명령이고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자들은 비자발적 배신자로 구분되어 역시나 잘 나가던 직장에서 잘리거나 팽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서민들의 등을 친 범죄자들의 죄명이 가득 담겨 있는 증거 중 으뜸으로 꼽히는 스마트폰을 내놓지 않으면 갖은 겁박과 회유를 서슴지 않는 또 다른 ‘조직’인 검찰에서 수십 년을 일해왔다며 장관으로 임명되기에 전문성과 심지어 영어능력까지 출중하다고 자부했던 이가, 자신이 누구보다 수사의 핵심을 잘 안다는 법의 이면을 악용하여 자신의 핸드폰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비번을 걸고 공개하지 않는 전략으로 진실을 덮었다.     


물론 법꾸라지들이 늘 말하듯이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 배우자까지 대한민국의 법관이라고 하는 법비 커플이면서 정치권에 나온 판사 출신의 정치인들은 판사가, 배가 고파 라면 5개를 훔친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서민에게 과감하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의 패거리가 빠루를 들고 국회의 한 복판에서 자신들이 만든 국회법을 위반하고서도 ‘그럴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라는 궤변을 내뱉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수백억을 횡령한 기업 총수나 서민들의 돈을 털어먹은 대형 경제범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그들만의 리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 통치권자가 솔선수범을 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죄과를 인정하고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자수하고 감옥에 들어가 앉으라는 것까지라 표현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전횡을 저지른 자들은 그럴 마음이 1도 없다. 그들에게 천벌을 내리는 하늘이 없느냐고? 하늘을 대신하는 것은 결국 늘 백성이었고 국민이었다.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감히 하늘을 탓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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