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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6. 2022

남을 움직이고 싶다면, 내가 먼저 보여주면 된다.

‘내로남불’이 일상어가 되어버린 썩어가는 사회의 가운데에서.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 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 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子張書諸紳.     
子張이 행해짐(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어 행해질 수 있는지)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말이 忠信하고 행실이 篤敬(篤厚하고 경건함)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라도 행해질 수 있지만, 말이 忠信하지 못하고 행실이 篤敬하지 못하면 州里(자신이 사는 고향)라 하더라도 행해지겠는가? 서 있으면 그것(忠信과 篤敬)이 앞에 참예함을 볼 수 있고, 수레에 있으면 그것이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행해지는 것이다.” 子張이 (이 말씀을) 띠에 썼다.    

이 장에서는 자장(子張)이 자신에게 있어 아주 절실한 질문을 스승에게 던진다. 이제까지 <논어(論語)>를 공부하면서 언제나 공자가 질문한 이에 대해 눈높이를 맞춰 그에게 가장 적실한 대답을 해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질문을 하는 이가 왜 그와 같은 질문을 했는지를 당연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가장 먼저 살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질문이란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에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스승에게 배우고자 한다는 의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원문을 해석하면서 괄호로 풀어 설명하기는 했지만, ‘行(행해짐)’이라고만 적혀 있는 질문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장이 상대방에게 수용되어 행동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어찌 보면 정치판에 데뷔할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이랄 수 있는 부분을 묻고 있다.     


실제로, 자장(子張)은 앞서 공부했던 ‘안연(顔淵) 편’에서 스승에게 ‘어떻게 해야 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 장에서 行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의미는 達과 같은 의미로, 行은 行世(행세), 達은 通達(통달)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行이란 곧, 한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아나가 남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통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앞서 배운 내용을 참고하라며 주자는 간략히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달아두었다.     


(앞의 '顔淵(안연) 편'에서 자장이) 達(달)함을 물은 뜻과 같다.     


이에 공자는 왜 자장(子張)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의 생각과 평상시 행실까지 읽고 있었기에 그가 부족한 부분을 일깨워주기 위한 가르침을 준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말이 忠信하고 행실이 篤敬(篤厚하고 경건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생소한 한자어의 설명으로 인해, 그저 너무 당연하고 뻔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니냐고 또 기계적으로 넘어가버릴 가짜 인문학 마니아들이 수두룩한 탓이 정확하게 이 가르침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忠信’의 忠은 진심을 다함을 말하고, 信은 남을 기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篤敬’의 篤은 도탑고 신실함을, 敬은 공손하고 신중함을 의미한다. 한문의 문법적 구조상 서로 다른 개념어로 이루어진 복합어이기에 忠과 篤은 각각 뒤에 붙은 信과 敬을 수식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지만 쉽게 간과하는 부분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일깨워준다.     


자장(子張)은 뜻이 밖에서 행해짐을 얻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자신에게 돌이켜 말씀하셨으니, 干祿(간록)과 問達(문달)에 답한 뜻과 같다. ‘篤(독)’은 厚(후)함이다. ‘蠻(만)’은 南蠻(남만)이요 ‘貊(맥)’은 北狄(북적)이다. 2천5백 家(가)를 州(주)라 한다.     


주자의 설명처럼 공자는 제자 자장(子張)의 질문이 출발부터 어그러져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지금 당신이 그런 내용이 어디 있었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자장(子張)은 그러한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것 나름의 가르침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다시 곱씹어본다면, 자장(子張)의 질문은 그 해답이 외부에 있다고 여겨 찾는 것이고, 공자의 대답은 가장 먼저 자신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일이라고 대답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떠한 문제점이든 원인이나 해답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찾고 시작하는 것은 공자 가르침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말이 기본 중의 기본이지 그렇게 강조에 마지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어렵고 실천에 옮기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주자는 <白鹿洞書院學規(백록동서원학규)>에서 ‘言忠信, 行篤敬, 懲忿窒慾, 遷善改過’라는 설명으로 修身(수신)의 요점을 설명한 바 있다. 앞의 두 문장은 공자가 이 장에서 설명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고 뒤에 두 개념은 <주역(周易)>에서 원용한 것이다. 첫째, 懲忿窒慾은, ‘忿怒(분노)를 참고 私慾(사욕)을 억제함’을 의미하며, 遷善改過도 ‘선으로 옮겨가서 지난 잘못을 고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역(周易)>의 두 개념보다 앞서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한 言忠信과 行篤敬이 맨 앞에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개념을 설명하는 대신 공자가 그 마음가짐이 평상시에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서 있으면 눈앞에 그것이 늘어서 있는 듯하고, 수레를 타도 그것이 멍에에 기대고 있는 듯이 보여야 한다는 비유를 넣은 것은 그것을 의식하여 챙기고 드러내야지 하는 개념으로 여겨서는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 마지막 비유의 당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그 깊은 의미를 풀이해준다.     


‘그것〔其(기)〕’이란 忠信(충신)과 篤敬(독경)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參(참)’은 ‘가서 끼어들지 말라.〔毋往參焉(무왕 참언)〕’는 參(참)과 같이 읽으니, 나와 서로 참예함을 말한다. ‘衡(형)’은 멍에이다. 충신과 독경에 있어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아서 있는 곳에 따라 항상 〈눈앞에〉 보이는 듯하여, 비록 잠시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어야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모두 저절로 충신과 독경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해질 수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스승의 말을 듣고 子張(자장)은 그 자리에서 스승의 말씀을 띠에 썼다고 하고 마무리짓는다. 이 마무리의 내용을 굳이 묘사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왜 적었는지 이상하지 않는가? 그 이유에 대해 주자는 교과서대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紳(신)’은 大帶(대대)의 아래로 드리워진 부분이다. 이 말씀을 여기에 쓴 것은 잊지 않고자 해서이다.     


물론 스승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평상시에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기 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장(子張)이 이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이나 그의 성향, 그리고 그가 보여준 행동을 종합해본다면 이 마지막 구절이 갖는 시니컬한 편집장의 의도는 매운맛에 해당한다.     

나만의 삐딱한 시선 탓 아니냐며 오해할까 싶어 그 근거를 제시해준다. 자신의 이름으로 장식된, ‘자장(子張) 편’의 15장과 16장을 보게 되면, 자유(子遊)와 증자(曾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자장(子張)은 인(仁) 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인(仁)을 함께 하기는 어렵겠다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어(論語)>를 편집한 이들은 자장(子張)이 이 장에서 던진 질문과 그의 평소 행실에 대해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떻게 앞으로 노력해나가야 할 지에 대해 죽비를 내리는 공자의 대답을 통해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가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배우는 자들이 진정으로 깨닫는 바가 있기를 의도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추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가르침을 받고 백번 그것을 종이에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고 띠에 적어 머리에 감고 있는다 한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깨닫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가르침이고 다른 사람의 것일 뿐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이 장의 질문 자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바대로 설득하여 행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갈고닦아야 한다는 선문답(禪問答) 같은 가르침이 나온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자장(子張)을 필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이 ‘위령공(衛靈公) 편’에서는 위정자의 수신(修身), 즉 솔선수범에 대한 화두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장의 내용 역시 다른 사람을 움직이고자 한다면 화려한 말솜씨나 치장보다는 진솔된 자신의 언행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수신(修身)을 통해서만이 우러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백번을 공책에 그 내용을 받아 적고 띠에 적어 몸에 간직한다고 한들, 그것을 이해하고 마음이 움직여 내가 실천해 보이고 그것이 내 일상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장(子張)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경계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明道(명도))는 공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진정한 배움이 어떤 것인지가 이 장에 담겨 있음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학문은 내면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자기 몸에 붙기를 요할 뿐이다.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며, 말이 충신 하고 행실이 독경하여, 서 있으면 그것이 앞에 참예함을 볼 수 있고 수레에 있으면 그것이 멍에에 기대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자질이 아름다운 자는 밝히기를 다하여 찌꺼기가 다 없어져서(완전히 변화하여) 천지와 同體(동체)가 될 수 있고, 그다음은 莊敬(장경)하여 지키고 길러야 하니, 그 지극한 데 이르면 똑같다.”     


자장(子張)이 자신의 띠에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 적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들을 적은 것들이 모아졌기에 지금 우리는 <논어(論語)>라는 형태의 성인의 말씀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전해 들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변화하고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것이 우선이 아님을 당시 적어 내려 갔던 이들도 당연히 알 것이다.     


수업에서 노트필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생님의 헛기침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노트필기를 잘하는 학생이 과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좀 더 나아가, 법전을 달달 외우고 답안에 써넣을 내용들을 노트필기로 외워 익혀 법비가 된 자들은 분명히 공부를 잘하는 이들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주석에서 강조하다시피, 옛날 성인들이 공부를 잘한다 함은, 경전을 줄줄 외우고 시를 막힘 없이 지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이 최첨단의 과학이 번뜩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살상력이 뛰어난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나 학술적인 영역에서는 훌륭한 발전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의 문제이다. 그래서 과학은 인문학이 전제되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저 위험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똑같이 날이 시퍼렇게 잘 든 칼은 회를 뜨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서 빛을 발하고 맛있는 요리를 하는데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을 들고 사람을 위협하여 돈을 강탈하고 사람을 해하는 일에 쓰게 된다면 같은 도구임에도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게 된다.      

과학자들이 자신은 그저 연구를 했을 뿐이라며 살상력이 훨씬 뛰어난 무기를 만들어내거나 그 기술을 만들어내고서는 어떻게 쓰일지까지 내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순간 그는 훌륭한 과학자에서 무식하기 그지없는 상식 없는 기술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그 기술에 자신과 미래마저 잡아먹히게 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국민을 위한답시고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혹은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만 잘살겠다며 법망을 피해 가고 권력을 이용하여 죄가 되는 것을 죄가 아닌 것처럼 당당히 고개를 쳐드는 사회가, 그 국가가 오래 존속될 것이라 여길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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