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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7. 2022

직언도 들어줄 만한 이에게 하는 것이 권도(權道)이다.

자기 신념을 위한 직언은 그저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子曰: “直哉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君子哉蘧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곧다, 사어(史魚)여. 나라에 道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道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도다. 君子답다, 거백옥(蘧伯玉)이여. 나라에 道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道가 없으면 (자신의 마음과 능력을) 거두어 품어(감추어) 두는구나.”     

이 장에서 공자는 사어(史魚)라고 하는 인물과 거백옥(蘧伯玉)이라는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대신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두 사람에 대한 호평이 똑같은 문법적 구조, 즉, 나라에 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뉘어 평가하였으니 뭔가 비교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할 수도 있는데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의 입장차가 있다.     


그렇다면, 먼저 <논어(論語)>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번 등장하는 생소한 ‘사어(史魚)’라는 인물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주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史(사)’는 관명이다. 魚(어)는 위나라의 대부이니, 이름이 鰌(추)이다. ‘如矢(여시)’는 곧음을 말한다. 史魚(사어)는 스스로 어진이를 등용시키고 不肖(불초)한 이를 물리치지 못했다 하여 죽은 뒤에도 오히려 시신으로써 군주에게 간하였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그의 곧음을 칭찬하셨으니, 이 사실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인다.     


주자는 간략하게 사어(史魚)에 대한 일화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인다고 간략하게 소개했는데 그 설명만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왜 공자가 그에게 ‘곧다’라는 칭찬을 한 것인지 정확한 맥락을 알 수가 없다. 특히 초심자들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뒤에 이어져 나오는 거백옥(蘧伯玉)과의 연결고리를 이해하기 위해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곤서(困誓) 편’에 기록된 일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위(衛) 나라의 거백옥(蘧伯玉)은 어진 인재였는데 영공(靈公)은 그를 등용하지 않았고, 도리어 소인배에 해당하는 미자하(彌子瑕)를 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어(史魚)는 이것이 잘못된 결정이라 영공에게 간언했지만, 그의 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어(史魚)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사어(史魚)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긴다.      


“내가 위(衛) 나라 조정에서 거백옥(蘧伯玉)을 내세우고 미자하(彌子瑕)를 물리치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신하 노릇을 하면서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큰 죄이다. 살아서 임금을 바로잡지 못했다면 죽어서도 예법대로 장사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죽거든 시체를 창문 밑에 두고 빈소도 마련하지 말거라.”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조문객을 맞게 되었다. 임금인 영공이 장례에 조문을 하러 왔다가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상주인 사어(史魚)의 아들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사어(史魚)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그대로 영공에게 고하고 통곡하였다. 


그제야 영공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이내 빈소를 제대로 설치하여 격식에 맞는 장례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사어(史魚)의 충언대로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고 미자하(彌子瑕)를 물리쳤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부터 임금에게 간하는 자 여럿이 있었지만 죽은 뒤에는 그만이었다. 그런데 사어(史魚)는 죽어 시체가 되어서까지도 오히려 그 임금을 감동하게 했으니, 참으로 곧은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것이 후대에 이른바 ‘사어(史魚)의 시간(尸諫)’이라 칭송받는 일화의 전모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곧다’라고 한 것과 나라에 도가 없을 때나 있을 때나 한결같은 충심으로 죽어서까지 자신의 진심 어린 충언을 다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칭찬에 마지않았던 것이다.      


사실 죽어서까지 임금에게 충심 어린 간언을 전달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중국의 사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충신의 사례는 있다.      


신라시대, 진평왕(眞平王)은 사냥 때문에 정사를 소홀히 해서 병부령(兵部令) 김후직(金后稷)이 간곡히 간언 하여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김후직은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내가 죽거든 왕이 사냥 다니는 길목에 묻으라’고 그의 세 아들에게 유언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숲길의 초입에서 사냥을 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그것이 이미 세상을 떠난 김후직의 간언임을 알게 된 진평왕은 크게 뉘우쳐 이후 국사(國事)에 힘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오자. 뒤이어 공자는 바로 사어(史魚)의 간언으로 중용된 거백옥(蘧伯玉)의 출처(出處) 관에 대해 칭찬하며, 이미 출중한 능력과 잘못되어가는 시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음에도 나라에 도가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맞춰 결코 부화뇌동하지 않은 점을 군자답다고 칭찬한다. 전통적인 군자로서 보여야 할 출처(出處)의 표본으로 인정한 것이다.    

 

거백옥(蘧伯玉)을 군자로서 인정한 언급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蘧伯玉(거백옥)의 출처가 聖人(성인)의 도에 합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卷(권)’은 거둠이요 ‘懷(회)’는 감춤이니, 예컨대 孫林父(손림부)와 甯殖(영식)이 군주를 추방하고 시해하려는 모의에 (蘧伯玉(거백옥)이)  대답하지 않고 나간 것이 또한 그 (한 가지) 일이다.     


거백옥(蘧伯玉)에 대한 일화와 설명은 앞서 ‘헌문(憲問) 편’의 26장에서도 한 차례 설명한 바 있다. 공자가 노나라를 나와 위(衛) 나라에 두 번이나 방문하였을 때 거백옥의 집에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으며 머물렀고, 공자의 그릇을 알아본 거백옥(蘧伯玉)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얻어주기 위해 나름 애를 썼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영공의 부인이던 남자(南子)의 음행(淫行)이 원인이 되어 모반(謀反)까지 일어나 한참 나라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그렇게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있을 때라면 군자로서의 출처(出處)를 제대로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면서 몸을 바루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을 공자도 거백옥(蘧伯玉)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공자가 오랜 시간을 두고 가까이에서 관찰했던 거백옥(蘧伯玉)이라는 인물은 언제나 군자로서의 올바른 절도를 잃지 않았기에,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공자마저도 이와 같은 극찬을 한 것이다.      


공자가 거백옥(蘧伯玉)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 군자의 출처관은 앞서 ‘태백(泰伯) 편’의 13장에서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는 원시 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확하게 부합한 사례라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이(述而) 편’의 12장에서 공자가 안연(顏淵)에게 거백옥(蘧伯玉)을 설명하면서 저 유명한 ‘용행사장(用行舍藏; 세상에 쓰일 때는 나아가 자기의 도를 행하고, 쓰이지 않을 때에는 물러나 숨는 것)’이라는 사자성어가 탄생하게 된다.     


이제 앞서 살짝 운을 띄웠던 왜 두 사람의 칭찬을 하면서 같은 문법구조를 취해 서로 다른 시각의 모습을 보였는지, 그리고 당연히 동일한 문법적 구조를 취하게 되면 둘을 비교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구조를 취해 도대체 누가 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자 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차례이다.    

 

배우는 자들의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실마리로 제공하듯 양 씨(楊時(양시))는 이 장에 숨어 있는 공자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史魚(사어)의 곧음은 군자의 도를 다하지 못하였고, 蘧伯玉(거백옥)과 같이 한 뒤에야 난세에 화를 면할 수 있다. 사어(史魚)와 같이 화살처럼 곧게 한다면 비록 거두어 품고자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다.”     


위 주석에 의하면 공자가 왜 사어(史魚)와 거백옥(蘧伯玉)을 똑같은 문법구조에 두고 한 사람은 곧았다고 칭찬하였고, 또 한 사람은 군자로서의 처세를 제대로 구현했다고 칭찬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저 시종일관 곧은 모습을 유지했던 사어(史魚)의 삶도 칭찬하고, 이른바 권도(權道)로서의 처세를 보여준 거백옥(蘧伯玉)의 삶도 칭찬한 셈이지만, 위 주석의 의견은 뒤에 언급한 권도(權道)가 그저 올곧기만 하여 죽기 전까지도 잘못된 군주를 바로잡지 못했던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주석에 보이는 평가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공자 역시 마지막 주석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행간의 의미를 담아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사어(史魚)나 거백옥(蘧伯玉)이나 수준의 차이에서 누가 더 큰 그릇이었다고 비교 대조하여 결국 권도(權道)를 지켜 나설 수 있을 때 나서고 나설 수 없을 때 나서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 장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공자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권도(權道)란 공자가 몸소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보신을 위한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자기 한 몸을 보전하자고 어차피 간언해도 먹히지 않을, 도가 통하지 않는 시절이라면 그저 입 다물고 초야에 묻히는 것은, 작은 의미에서 보면 자기 보신(保身)이라고 비난받을 여지가 적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어느 누가 간해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군주의 신경만 건드려 죽임을 당할 수 있을지언정, 죽어서까지 군주를 바로잡자는 충정도 권도(權道)의 일환으로 ‘진정한 용기’라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워낙 개망나니 군주 인터라 처음부터 간언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수준인데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면서 계속해서 간언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사어(史魚)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사어(史魚)는 위령공(衛靈公)이 완전히 귀를 틀어막아 도저히 돌려놓을 수 없을 지경의 최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은 마음에서 자신의 죽음이라는 반전의 기회를 이용해서라도 군주를 일깨우고 싶어 했고, 그것이 통할 것이라 생각해서 아들에게 간절한 유언을 남긴 것이다. 죽어서까지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지 말라고 한 것이 결코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아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것 역시 넓은 범위에서의 권도(權道)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역시 그가 펼친 것도 권도(權道)이고, 완전히 초야에 틀어박혀 세상을 등지지 아니하고 현실에 계속해서 눈을 부릅뜨고 부조리를 바로잡을 생각을 보였기에 거백옥(蘧伯玉)이 뒤늦게나마 등용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거백옥(蘧伯玉)이 완전히 은자(隱者)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자의 또 다른 의미에서의 높은 평가가 추가점수로 더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언론이 권력이나 검찰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결탁하여 썩어 들어가면서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스피커를 얼마나 교묘하고 적절히 이용해야 국민(이라 쓰고 ‘개돼지’라 읽는다) 농락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언론 미디어라는 것이 없던 공자의 시대에는 최소한, 고지식하게 그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군주에게 직언을 한다거나 은자를 표방하며 뜻을 접고 초야에 은거해버리는 과감한 선택을 퍼포먼스로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언론 미디어’라는 것이 발달하고 그것이 차지하는 영향력의 비중이 어마어마하게 증대되면서 정치꾼들은 타고난 연기자로서의 특기가 필수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십수 년 전부터 새로운 미디어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SNS는 기레기들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날 것으로서의 확성기 역할마저 십분 활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수권자 한 사람이 훌륭하고도 선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거대한 정부조직과 법비들의 썩어빠진 사회 시스템을 한 번에 일소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대통령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반대로, 아무리 사리사욕에 가득하여 나라를 말아먹겠다고 작정한 자가 통수권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에 동조하는 아래부터 썩어빠진 이들의 동조가 없이 나라가 좀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나라가 이 사회가 좀 먹고 스러져가는 것에 당신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뻔뻔하게 눈만 껌뻑이는 짓은 하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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