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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8. 2022

해야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만 할텐가?

사람도 잃고 말까지 잃는 짓을 서슴치 않는 자들에게.


子曰: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더불어 말하면 말을 잃으니,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잃지 않으며 또한 말을 잃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말이라는 단순한 행위에 대해 하나의 단어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그 한 단어는 하나의 의미만으로 통용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각기 다른 깊은 뜻을 드러내고 있다. 똑같은 단어가 복합적인 행간의 의미를 통해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단 원문의 의미를 다시 풀어 뜻을 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더불어 말할 만하다는 것은 이른바 말이 통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인데, 말이 통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수준이 높아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표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조언을 해주었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사심없이 받아들여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자라 함은,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그 행간의 의미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음은 당연하고, 그것에 더해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이야기해주었을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고칠 자질을 갖춘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수 있을까? 그 사람과 돈독한 대화를 나누어 교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모르고 저질렀으나 충분히 일러주면 고칠 수 있는 상대라면 그에게 질정함을 아끼지 말아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잃지 않고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바로 뒤에 반대 사례를 들고 있기에 더욱 명확해진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도 더불어 말하면 말을 잃게 된다’는 의미는, 잘못이나 부족함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조언하고 일깨워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머리로 알아들었을지언정 마음이 움직여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며 자신을 바로잡을 생각이 전혀 없는 이를 설명한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진심이 담긴 조언(말)이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희박하긴 하지만, ‘失言(말을 잃는다)’라는 의미는 또 다른 의미로도 해석된다. 일깨워주고 지적해주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 있음에도 굳이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지나쳐버려 종국에는 그 사람이 더 큰 잘못을 저질러 죄악에 빠져버리게 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노자는 이렇게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아름다운 바탕을 지닌 사람을 道의 영역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 ‘失人(사람을 잃는 것)’이요, 忠告의 말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失言(말을 잃는 것)’이다. 이 장의 마무리에 공자는 失人과 失言을 하지 않아야만 지혜로운 자라고 역설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장에서의 ‘말(言)’이란, 진심을 담은 조언이자 간언으로 잘못과 부족함을 깨닫고 그것을 반성하고 바꿀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한 마디를 의미한다. 원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만으로 우리가 삶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상황들을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 깊이 들어가서 사람들의 수준을 살펴보자면,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언을 해야할 상황이 오기 전에 스스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조언을 해야할 정도로 잘못하고 부족함이 드러날 정도의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조언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바꾸질 않는다.      

그렇다면 공자의 시대에도 그러한 인간의 본성과 자질을 충분히 통찰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공자는 굳이 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관계임에도 조언을 하지 않아서 그 사람을 잃지 말고, 조언을 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관계만 틀어져버리거나 그 말의 가치가 없는데 조언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을까?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공자가 그것을 제대로 하는 자만이 지혜로운 자일 수 있다고 마무리한 마지막 문장에 숨겨져 있다. 공자가 말하는 지혜로움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지(智)’와 후천적인 지식을 쌓은 ‘지(知)’가 수행에 해당하는 노력과 경험의 결과물로 완성된 형태를 총칭하는 말이다.     


어제 공부한 ‘권도(權道)’나 이전부터 강조했던 ‘시중(時中)’의 개념은 바로 그 지혜로운 자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처세술에 다름아니다. 이 장에서는 조언을 어떤 사람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되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도, 혹은 독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음을 충고하고 있다. 이 장에서 말(言)이라는 형태로 언급된 행위는, 단순히 조언을 넘어서 그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이자 그간 축적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렇기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서 정치행위에서 갖춰야할 모든 형태의 처세지침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다각화된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그 근거로 중급자 이상의 수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르침을 한 가지 제시하자면, 이 장은 소통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실상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에서의 말이 갖는 의미는 그저 발화(發話)로서의 가치로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말이 갖는 본래의 가치를 온전히 갖추기 위해서는 상호 소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즉, 상대가 들어주지 않고,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서 내 마음을 전달하여 그것이 결국 전달되지 않으면, 말은 그 가치가 없어지고, 그럴 수 있음에도 최선을 다해 소통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순간, 가장 중요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잃게 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결정에 대해 설명해야하고 설득해야하는 위정자들에게 있어 말이 갖는 가치나 그것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뼈때리는 죽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지도자가 되는 이가 이 가르침을 실천하게 된다면 사람들을 제대로 살피고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은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이 가르침을 실생활에 실천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을 제대로 사귈 수 있고 그 말을 삼갈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논어(論語)>를 성인의 글이라며 타성적으로 읽어온 껍데기 인문학 애호자라면 그저 지당한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 옳은 말이고 훌륭한 말이라면서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이 글 하나하나가 갖는 무게는 그렇게 쉽사리 페이지를 넘길만한 무게와 깊이가 아니다.


수백수천번 <논어(論語)>를 읽어도 이 장의 몇 마디 안되는 말에, 이처럼 수많은 스펙트럼의 메시지를 다양한 층위로 담아내는 말(言)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고있기에 늘 겸양해질 수밖에 없는 가르침에 마음의 옷섶을 가다듬게 된다.      


공약(公約; 공식적으로 하는 약속)이 공약(空約; 허망한 약속)이 되어온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선거판에서 아무말이나 내뱉어도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 헛소리에 해당하는 약속도 아닌 아무말 대잔치가 계속되었기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정치꾼들의 공약을, 그 약속을, 말을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말이다. 당신들이 마치 정치꾼들이 별나라 세계인냥 말하면서도 지금 당신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아무말대잔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런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대개 정치꾼(고위공무원,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등등 시정잡배들)은 저 혼자 자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보좌관이 있고, 비서관이 있으며, 동료가 있고, 그들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친지가 있으며, 지연과 학연을 통해 맺어진 친구들이 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느냐고 묻고 싶은가?      


가만히 생각해보라. 아들을 통해 버젓이 비자금 50억을 받고서 아들이 알아서 받은 보너스를 왜 나한테 물어보냐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드러난 아들이 있을 것이고 그 아들과 아비를 보좌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이들이 있었을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그 사실을 알게된 친지들과 주변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     


그나마 사법고시가 있던 시절에는 어찌되었든 국가고시라는 시험을 치러야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기에 요식행위로라도 시험에 패스를 해야 2대째 법조인이네 뭐네 으스대며 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시쳇말로 절반에 가까운 자들을 편법으로 뽑아주어 2대째 외교관집안이라고 떠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불법채용비리를 저질러 장관이 잘려나가고 그렇게 뽑혀 이미 외교관이 된 자들을 다시 자를 수 없다며 곤욕스러워하던 일이 벌어진 지 불과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10년전 외교부의 채용비리가 그렇게 폭탄처럼 터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려 장관의 딸을 불법부당한 방법으로 채용하려했다는 점때문이었고, 이미 그렇게 채용된 고위 외교관의 자녀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던 흙수저출신 외교관들이 너도나도 내부고발을 하겠다고 기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히 훌륭한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양한 비리와 사고로 뉴스를 타고올랐던 KT나 LH가, 아니, 정작 그 홍역을 치렀던 외교부가 지금은 그러한 문제가 말끔하게 일소되어 다시 전수조사를 하더라도 그런 비리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는가?     


1년전 여름, 특성화고 졸업예정자로 부산시교육청 시설직 공무원 임용시험에 응시했던 19살의 젊은이가 합격이었다고 했다가 불합격으로 결과가 번복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다.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식의 넋이라도 풀어주겠다고 부모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채용비리 의혹을 제기했고 경찰에 고소까지 했다.     

http://cms.media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33

국가고시도 아니고 인문계도 아닌 특성화고 출신의 고졸 건축관련 시설직 공무원을 뽑는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채용비리까지 이루어졌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경찰은 고소장을 접수받고 무려 1년 2개월여에 걸쳐 모두 13건의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이들의 사무실·자택 등을 압수수색하였고, 상호 간 통화내역 등 통신자료를 분석하여 공모관계를 밝혀냈다.     


청탁을 한 이는 전 교육지원청장 출신의 시교육청 소속 고위공무원이었고 그는 자기 사위를 뽑아달라며 청탁을 한 사실이 수사결과 밝혀져 청탁을 받고 면접점수를 조작한 이들까지 모두가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주범과 공범이 아니었다. 재판이 시작되고나서 증인이라고 나왔던, 함께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부산시청 소속 공무원과 문제의 주범과 같은 팀에서 근무하는 시교육청 직원 등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건축직 응시 면접이 끝난 쉬는 시간에 피고인 A씨가 응시생 둘을 지칭하며 한 명은 발표를 잘하더라고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대기업 출신이라 뽑아 쓰면 일을 잘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검사가 “블라인드 면접이었는데 대기업 출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B씨는 “피고인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대기업 출신으로 언급된 응시생은 전 교육지원청장의 사위로 채용 청탁 의혹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2111016063563879

왜 말에 대한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채용비리에 대한 이야기로 새느냐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들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애궂은 젊은이가 스스로 자괴감과 억울함에 목숨을 끊을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 당신의 눈에는 이 장의 가르침과 연결되지 않는가? 경찰이 1년 2개월이나 질질 수사를 한답시고 푸닥거리를 하지 않았더라도 증인으로 나온 이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이미 이 부정한 일에 대해서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그들을 제외한 시교육청에 남아 있는 이들이 양심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당신은, 아니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여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이 쓰레기 종편에서 정치쇼를 하는 작자들을 욕하면서도 당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벌이는 그 행동들이, 그리고 그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내가 정작 피해보는 것은 아니니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넘기는 짓은 그들의 부정한 행위에 공조한 공범을 넘어 모두가 함께 먹는 우물에 독을 푸는 행위임을 알라는 말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가 죽기전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겠는가? 그때 묵살된 민원이 수사로 진실이 밝혀지기 위해 그 아이의 목숨이 불소시개로 쓰여야만 했을까?

당신의 올곧은 말 한마디가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 허망하게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하는 비극적인 미래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장을 공부하며 당신의 양심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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