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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9. 2022

구차하게 저 하나 살겠다고 仁을 망치고 해칠 셈인가?

인(仁)이란,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志士와 仁人은 삶을 구하고자 仁을 해침은 없고, 자신을 죽여 仁을 이룸은 있다.”     
안중근 열사의 유묵중에서

이 장은 너무도 많이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뜻을 이해하는 자들은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고사성어의 모태가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지적부터 하냐고 반감을 가질 학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반감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먼저 자신이 그 뜻을 정확하게 아는지에 대해 자문해보라고 먼저 묻겠다. 굳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이 인(仁)을 이루는 것과 무슨 연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어야 하는 인(仁)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자기 삶을 위해 인(仁)을 해친다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이 연이은 의문들에 시원스레 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제까지 살신성인(殺身成仁)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 맞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 장에서 표본으로 등장한 지사(志士)와 仁人(인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 장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志士(지사)’는 뜻이 있는 선비요, ‘仁人(인인)’은 덕을 이룬 사람이다. 도리상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삶을 구한다면 그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을 것이니, 이는 마음의 덕을 해치는 것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죽는다면 마음이 편안하고 덕이 온전할 것이다.     


문면 그대로라면 이 주석은 약간 소름 돋는 차가움이 느껴질 수도 있는 해설이다. 도리상 마땅히 죽어야 할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죽음을 앞두고 삶을 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진대 왜 마음에 불안함이 있다고 표현했을까?   

조금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면, 본문에서 말하는, ‘삶을 구하고자 仁을 해치는 것(求生以害仁)’이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다 결국 마음이 편치 못하고 仁의 덕목을 해치게 되는 일’을 가리킨다. 예컨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사례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일제강점기의 우국 열사들이 장렬히 조국의 위태로움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며 독립을 갈구했던 결단 속에 나라를 팔고 자신의 목숨 하나 연명하고 사리사욕을 챙겼던 자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다른 나라에 짓밟혀 있을 때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거래하듯 바치라는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각오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해서라도 부조리를 바로잡겠다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여기서 철학적인 의문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식민지화시켰던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올바름이란 자신들의 대동아 정복이 미개한 한국 국민들에게 시혜(施惠)적인 입장이고 옳다고 주장할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의 논리가 난무하던 공자의 춘추전국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원시 유학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은 서로 간의 입장에 의해 옳고 그름이 뒤바뀔 정도로 다변적이지 않다. 오히려 더욱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그 시비(是非)를 구분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고 익히는 것이며 수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올바름은 시중(時中)이라는 다변성을 인정하면서도 절대불변의 절대적 기준 또한 함께 내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그에 맞춰 적용해야 한다는 시중(時中)의 개념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절대불변의 옳음에 대한 기준이 확고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공자는 아주 간명하게 그것을 나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현대에 오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주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구한 사례에 많이 언급되어 사용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공부할 내용과 같이 본래의 의미는 그렇게 직접적이며 단순한 의미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도 물론 인(仁)이라 일컬을 수 있기에 현대에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자가 본래부터 지칭하는 인(仁)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협의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이제까지 <논어(論語)>를 공부하면서 배워왔던 것처럼 인(仁)은 배우는 자들이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할 완성된 형태의 인격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장의 원문에서 말하는 살고자 한다는 묘사의 목적어는, 자신을 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함이라는 행간의 의미를 명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이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수 있는 것이 ‘인(仁)’이라면 그저 나아닌 남을 위한다는 의미인가 오해할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는 나의 사리사욕과 나의 욕구를 모두 죽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우선시 되어 지켜야 할 가치가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른 이를 위함의 첫걸음이자 전제가 된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올바름’이라는 절대 기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대의(大義)를 위해 소의(小義)를 희생한다는 말도 동일한 인(仁)의 범주안에 있더라도 크고 작은 우선순위가 있음을 설명하는 좋은 사례이다.     


수류탄을 잘못 던진 훈련병의 실수로 많은 인명이 다칠 수 있는 위기에서 자신이 온몸을 던져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한 조교의 행동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표현하는 것이 현대에서 이 장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인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무슨 짓이라고 벌이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공자의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끊임없는 발전과 진화를 통해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이번 ‘위령공(衛靈公) 편’을 시작하면서 요 며칠간 공부했던 충심 어린 간언(諫言)을 목숨 걸고 군주에게 했던 충신의 행동이 인(仁)의 일환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위함이 아닌, 작게는 위정자인 군주를 위해, 크게는 그것이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백성들을 위해 한 행동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삶을 위해,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은 이 장에서 공자가 경계한 바와 같이 인(仁)을 해치곤 한다. 가장 비근한 사례가 목숨을 바쳐 충언을 하는 이들을 가로막고 군주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구차하게 변명하지만, 결국 인(仁)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말아먹고 그 자자손손 지금까지 영화를 누리며 사리사욕을 채운 족속들은 자신들이 ‘친일파’라는 사실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지금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비난받는 것을 귀찮게 여길뿐 당시 자신들의 조상이 그런 매국행위를 한 것은 지금의 자신들이 생각해도 더 많이 배우고 선각자(?)의 입장에서 생존을 위해 취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조상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재산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 바쳐 지금의 가난하고 비루한 미래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조상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임에도 훌륭한 초대 법관이었고, 초대 경찰이었으며, 초대 장관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는 후손들이 이 시대에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있다.     


만약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전재산을 바치며 모진 고문 속에서 죽음을 당한, 이름 모를 독립열사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그리고 후손들이 자신이 그런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위로 인해 가난해지고 불행해져 사회적 빈민으로 친일파 후손들의 멸시를 당하는 입장에 처한다는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을 주저하거나 철회했을까?     


공자는 이 장의 가르침을 통해 그렇다면 그것은 ‘인(仁)’을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공자가 이 장을 통해 일깨워주는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진실한 이치를 마음에 얻으면 저절로 달라지니, 진실한 이치란 옳음을 실제로 보고 그름을 실제로 보는 것이다. 옛사람은 몸을 버리고 목숨을 바친 자가 있었으니, 만일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삶이 의리보다 중하지 못하고 삶이 죽음보다 편안치 못함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루는 경우가 있는 것이니, 다만 하나의 ‘옳음’을 성취할 뿐이다.”     


인(仁)을 완성한 이들이 먼저 본 것은 이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 이해타산적인 미래가 아닌 공부와 수양을 통해 보게 된 ‘진실한 이치’였던 것이다. 뒤에 이어진 설명은 <맹자(孟子)>에서 언급한 “목숨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義(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 둘을 아울러 지닐 수 없다고 한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義는 仁과 개념상 분명히 다르지만, 이 설명에서는 그 맥락상 이 章의 뜻과 통한다. 생명은 물론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仁義이라는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인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만취한 운전자의 거대한 트럭이 아이를 덮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이를 밀어내고 아이를 먼저 살리려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다. 칼을 들고 설치는 소매치기를 보며 절규하는 여자를 위해 소매치기를 따라가거나 그들을 막아서는 자가 없는 요즘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술에 만취한 아가씨가 휘청거리며 지하철의 철로에 떨어져 휘청거릴 때 선뜻 그 아래로 뛰어들어 그 아가씨를 위로 올릴 생각을 실행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길거리에서 다짜고짜 남자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아가씨가 살려달라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도 핸드폰으로 촬영은 할지언정 112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구경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가 오늘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죽음의 위기는 고사하고 겨우 자신의 직을 걸고, 미운털이 박혀 자신이 가진 현재의 혜택을 잃게 될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발생한 부조리에 대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괜한 남의 일에 목을 들이밀었다가 손해만 볼뿐이니, 절대 다른 사람의 일에 나서지 말라는 교육 아닌 교육을 자식에게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희생하며 인(仁)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구했던 이름 모를 우국 열사들의 희생을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지금이라도 분개하여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한탄할 지경이다.     

공자가 과연 그런 간악한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하였을까? 아니. 공자는 그러한 사실을 평생에 걸친 현장 체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원문의 주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자는 志士와 仁人이라는 두 존재를 지칭하며 그들만이 이러한 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정 짓고 있다. 志士와 仁人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간군상이 아니다. 오히려 배우는 자들이 목표로 삼는 지향점에 해당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이 많았다면 굳이 공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역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유사 이래 정치꾼들의 수많은 거짓말 중에서도 가장 많이 입에 발린 소리로 등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정치를 하는 이유와 명분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 장에서 올바름에 대한 기준은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로 쉽게(?) 판별된다고 하였다. 거기에 더욱 명확한 기준을 한 가지 더하자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것으로 대의(大義)를 이루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당신이 이제까지 보아왔던 역대 정치인들 중에서 과연 정말로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하며 국민을 위한 자를 본 적이 있던가? 그 긴 군부독재를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죽을 고비를 넘겨왔고, 최연소 국회의원의 자질을 타고난 민주화 열사라면서 욕심을 거두지 않는 것으로 군부독재는 '보통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기존 군부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기어코 그렇게 다음 정권의 수장이 되고 정계은퇴까지 번복하면서 대통령이 된 그 자들이 과연 정말 존경을 받을만한 어른이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그 정치꾼들이 과연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잘 알지 못하겠다.  하물며 그들만도 못하다고 자인하는 지금의 정치꾼들은 일러 무삼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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