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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2. 2022

당신이 함께 웃고 어울리는 이가 바로 당신의 민낯이다.

공자는 왜 나보다 더 나은 자와 사귀라고 하였던가?

子貢問爲仁, 子曰: “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居是邦也, 事其大夫之賢者, 友其士之仁者.”
子貢이 仁을 행함에 대해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工人(기술자)이 그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연장을 예리하게 만들어야 하니,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 大夫중에서 현명한 자를 섬기고, 이 나라 士중에서 仁한 자를 벗 삼아야 한다.”

이 장에서는 어제 공부하며 다시 전면에 등장한 인(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여 완성할 수 있는가를 자공(子貢)이 묻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은, 질문 자체가 인(仁)의 본질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爲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구체적 仁의 실천 방법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다산(茶山; 정약용)은 ‘爲仁’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어, 그 의미에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을 정리하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공은 仁(인)을 행함을 물었고 인을 물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그에게 인을 행하는 자료로써 말씀해 주셨을 뿐이다.”


仁의 실천 방법을 묻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대해 공자는 역시나 그의 눈높이에 맞춰 실천방법을 ‘인(仁)을 이루기 위한 제대로 된 도구’에 비유하며 위로는 현명한 이를 섬겨야 하며, 친구로는 어진 이를 벗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여기서 현명하다는 표현과 어질다는 표현이 다소 형이상학적인 모호한 내용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한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의도를 풀이해준다.


‘賢(현)’은 일로써 말하였고, ‘仁(인)’은 덕으로써 말하였다. 夫子(부자)께서 일찍이 자공(子貢)은 자기만 못한 자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로써 그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니, 두려워하고 切磋(절차)하는 바가 있어서 그 덕을 이루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실제로 가신이 되어 섬겨 일을 함에 있어서 인(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대부를 섬겨야 하되, 친구로 어진 이를 섬기라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심성수양을 그것을 깨닫고 함께 할 수 있는 이를 곁에 두어 정진하라는 설명이다.


지당하고 당연하기 그지없는 뻔한(?) 설명이라고 대강 읽고 넘어갈까 싶어 주자는 바로 뒤이어 공자가 왜 그런 설명을 했는지, 자공(子貢)에 대한 분석을 덧붙였다. 자기만 못한 자를 사귀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공(子貢)이 그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여 그 점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앞서 수차례 등장한 자공(子貢)이 어떤 인물이던가? ‘팔일(八佾) 편’의 17장에서 보이듯이 그는 지극히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옹야(雍也) 편’의 6장에서는 무려 ‘달(達)’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고, ‘선진(先進) 편’의 12장에서는 강직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특히 같은 편 18장에서는 그의 성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후대에 회자되는 재물을 모으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는 평가도 받은 바 있다. 그만큼 그는 현실적이자 실용적이었고 그 성향대로 재물을 모으고 효과적으로 불리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한편, 단점으로 사람을 두고 비교하며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고 ‘헌문(憲問) 편’의 31장에서 지적받는 내용도 보였다. 주자의 설명에서, 공자가 자공(子貢)을 평가하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사귀었다고 분석한 것은 그저 주자만의 추정이 아니라 근거가 있는 분석이었다. 그 근거는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육본(六本)’에, 공자가 제자들을 총평하며 자공(子貢)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내가 죽은 뒤에 상(商; 자하(子夏))은 날마다 더해갈 것이요, 사(賜; 자공(子貢))는 날마다 덜해갈 것이다.”라고 하자, 증자(曾子)가, “그것은 무엇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상(商)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놀기를 좋아하고, 사(賜)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들을 알지 못할 때는 그 아비를 봐야 하며, 잘 모르는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봐야 하며, 그 임금을 알지 못할 때는 그 신하를 봐야 하며, 그 땅을 알지 못할 때는 거기에 있는 초목을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착한 사람과 같이 거처하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잇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어 그 향기를 더 이상 맡을 수는 없어도 곧 여기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며, 착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거처하면 생선 파는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어 그 냄새를 더 이상 맡지 못하더라도 곧 여기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丹)을 감춰두면 결국은 저절로 붉어지게 마련이며, 칠(漆)을 감춰두면 결국은 저절로 검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자기가 거처하고 사귀는 데 있어 삼가야 하는 것이다.”

앞서 공부하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벗하려는 자들만 있다면 나와 벗해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화두를 던져 설명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그 말의 표면적인 의미만을 핥고 있다가는 그 담긴 진정한 가르침을 길어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행간의 의미를 길어 내기 전에 일단 공자의 이 가르침에는 벗과의 교유 행위 자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들이 많아지는 요즘의 세태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껍데기만 알고 지낼 뿐 진정한 교유 행위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공자의 시대에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흉금을 터놓고 교유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성을 키우기 위한 첫걸음은 시작된다. 공자가 위에서 증자(曾子)에게 가르침을 준 내용을 보면 이른바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기 마련이다.)’의 교유의 감화(感化)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명한 대부를 주군으로 섬기게 되면 명을 내림에 있어 당연히 길을 열어주는 스승과도 같이 가신들을 이끌어주는 명령으로 가르침을 줄 것이고, 단순히 교유를 하는 듯 하지만 함께 교유하다 보면 그가 읽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의 생각을 나누게 될 것이며, 그가 시간을 사용하는 법을 보고 익혀 공유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밥을 먹어도 섭생의 이치를 보고 익혀 공유하게 될 것이다.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 같지만, 혼자서 책을 읽으며 하는 것이 공부의 다가 아니기에 실생활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생활을 해나가며 어떤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가는 결국 그 사람의 전부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일부로 구성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열어보고 가슴을 열어볼 수는 없지만 그가 평상시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교유하는 벗을 보게 되면, 그를 이루고 있는 전부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유추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혼자만으로는 완성시킬 수 있는 조각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배우는 자는 당연히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하게 된다. 앞서 ‘안연(顔淵) 편’에서 曾子가 ‘以友輔仁(이우보인)’을 강조했던 의미는 바로 친구와의 사귐을 통해 내 부족함을 발견하고 채울 수 있다는 뜻과 통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풀이한 이 장의 해설에 따르면, 仁政(어진 정치)를 펼치려면 결국 그전에 자기의 내실을 먼저 튼튼히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중용(中庸)>에서, ‘아랫자리의 사람이 정치를 행하려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어야 하고 윗사람의 신임을 얻으려면 부모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한 단계적인 절차를 인지한 설명에 다름 아니다.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으나 훌륭한 스승을 만났을 때 내가 혼자서 할 수 없는 공부의 비약적인 발전과 깊이를 새로이 갖추게 된다. 훌륭한 스승은 내 공부만을 가르쳐주는 교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위에서 공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내가 늘 함께 웃으며 어울리는 친구가 그러하고,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그러하며, 내게 업무를 지시하는 상관이 그러하다. 


모두가 내 맘처럼 훌륭하고 멋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가리고 그 안에서 배우고 깨닫고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다시 자신의 역량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허구한 날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을지 일확천금을 꿈꾸는 예비 범죄자를 친구로 두고 어울리게 되면 그들의 생각과 방식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덕을 기르기 위해서든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든 현명하고 어진 이의 도움이 절실하기 마련이다. 그 절실함은 단순히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자에게 빌붙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교유와 관계를 결실로 맺게 마련이다.


공자의 이 설명은 단순히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받아내거나 영향을 받는 일방향의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교유는 쌍방향의 소통이다. 나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변화들이 상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시너지를 내는 경우는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특별한 조언을 주거나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함께 지내고 대화하고 놀기만 해도 그를 통해 자극받고 아이디어를 얻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것들의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는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된 소중한 가르침이고 교훈이며 깨달음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가르치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터여서인지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얻게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저 그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동안(童顔)을 유지하는 것은 덤이고, 그들이 요즘 가지고 있는 트렌디한 생각과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지만 통통 튀는 그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나의 지식욕을 자극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즐거움에 빠지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배우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을 가르치면서 내 생각과 그간의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보다 정련된 형태의 완성에 가까워져 간다는 확신을 늘 재확인하게 된다. 

성인(聖人)으로 불렸던 대스승 공자 역시 그 과정을 거쳤기에 이 장에서 비유로 장인의 연장이 예리해져 간다는 과정으로 비유 아닌 비유를 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본다.


정치판이라는 곳은 사리사욕을 위해 언제든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이루어지는 아사리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정치판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느냐고 한탄하며 정치야말로 신의로 맺어진 교유가 기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애초부터 ‘국민을 위해’라는 입에 발린 그들의 거짓말이 재산공개와 그들의 하루 스케줄 확인만으로도 뽀록나버리는 유구한 정치사의 현실을 살펴보면, 지금도 빨간색 파란색 가릴 것 없이 모두 하급 정치꾼이라 매도당하는 분위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전면적인 물갈이로 이루어진 인사에서 ‘내가 그 친구 잘 알아!’식으로 꽂아주기가 이루어졌던 사실을 고려해보면, 가족경영이라는 그럴싸한 구멍가게식 경영철학으로 그룹 인사를 치르며 글로벌 경영과는 전혀 유리된 길을 택해 나라를 좀먹은 한국의 기업들을 통해 정치나 경제들이 서로 뭘 보고 배워왔으며 그 몸집을 키워왔는지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음이 있다.

빠르면 20대부터 법복을 입고 법원에 들어서면 칠순 노인조차도 바짝 기립해서 목례를 해야 하고 법관은 피고, 원고 해가면서 이름을 턱턱 불러도 자신을 지칭할 때는 ‘존경하는 판사님’이라 불려 왔던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겸손을 과연 아는지, 아니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니, 사실은 그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이라는 자가 얼마나 후안무치하게 자신의 죄과 앞에서도 실실 웃어가며 기자회견을 했는지 목도한 바 있다.


역시 같은 약관이 조금 지난 나이부터 ‘영감님’ 소리를 들어가며 모두가 잠재적 범죄자이고 자신이 기소하면 바로 범죄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온 조직의 구성원이었다면, 그들 사이의 호칭처럼 애먼 사람을 잡는 데에는 정말로 ‘프로’ 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이들과 뭉쳐 허구한 날 룸살롱에서 지저분하게 놀고 뒤에서 그림을 그려 사건을 기획하고 기자들에게 대본을 써주는 일을 일삼았던 자들이 갑자기 국민을 위한 큰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당신의 어리석음을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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