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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3. 2022

과연 천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

천하를 다스리고 싶은 욕심만 키우고 도량을 키우지 않은 자들에게.

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顔淵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夏나라의 時(역법;책력)를 시행하며, 殷나라의 수레를 타고, 周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韶舞로 할 것이요, 鄭나라 음악을 몰아내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니, 鄭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다.”     

이 장에서는 안연(顏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묻고, 그것에 대해 공자가 적통(嫡統)이라 여기는 본보기가 되는 나라의 사례를 들어 가르침을 주는 것은 기존에도 쭉 봐왔던 자연스러운(?) 방식이라 여기고 아무런 의문 없이 별 특별한 점이 없다고 간과할 수 있는 장이다.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이 장에 간과해서는 안될 특이점이 있음을 먼저 짚어주고 다시 한번 주목하라는 설명을 하는 이유는 대단한 이유가 아니다. 너무 유명하고 누구 나 다 알고 있다는 그 흔한(?) <논어(論語)>를 읽고 공부했다고 하는 자들이 그리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90% 이상의 인문학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이 대강 그 내용을 학자 흉내만 낸 현대 해설서만 읽고서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탄하는 가장 큰 구체적인 근거로 이 장의 원문을 제대로 읽었는지를 먼저 당신 스스로에게 자문하기를 권한다. 원문에 ‘방(邦)’이라 쓴 단어는 (지금은 찾아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옥편(玉篇)에는 ‘나라’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는 그것을 ‘나라’라고 해석하지 않고 ‘천하’라 해석하였다.     


<논어(論語)>는 중국 본토에서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고문을 공부하는 수험서의 기본 중의 기본인 사서(四書)중 한 권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한자를 배워나가는 것으로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본래 그 단어가 가진 의미가 확장되거나 다른 의미로 전성되어 사용되는 사례를 파악하고 익히는 데에도 좋은 교과서가 된다.     


잔소리가 길었는데, ‘나라 방(邦)’이 ‘천하’로 해석된 이유를 파악하는 데에는 그저 암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지식과 경험치가 그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당신이 알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論語)>의 그 흔한(?) 문답 구조의 가르침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공자의 수업 특성상 질문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장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던진 사람인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였는가? 바로 안연(顏淵)이다.     


안연(顏淵)이 누구던가? 바로 안회(顔回)이다. 단사표음(簞食瓢飮;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으로 상징되는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의 대명사 아니던가?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런 인물이 뜬금없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물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공자의 대답을 보라. ‘고작’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하은주(夏殷周)의 대통(大統)까지 언급하면서 설명할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이 장의 깊은 행간 속에 오간 공자와 그 수제자(?)의 성향과 문답의 깊이를 파악하고 나면 이 장의 문답이 그저 흔한 궁금증을 묻거나 질문을 한 제자의 부족함을 파악하여 설명해주는 방식과는 분명히 변별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 당신의 눈에도 어렴풋하게나마 보일 것이다.     

이 내용을 파악한 주자는, 지금 나와 같은 의도로, 초심자들이 그 큰 뜻을 간과하고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주석의 가장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해설로 짚어 준다.     


안연은 王者(왕자)를 보좌할 만한 재질이었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를 물은 것인데,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한 것은 겸사이다.     


단 한마디. 방(邦)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겸사였다는 설명. 그것을 알고 대화를 이어나간 것은 안연과 공자, 그리고 그것을 읽어낸 고급 학습자들뿐일 것을 알기에 초심자들을 위해 일러준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안연(顏淵)의 스케일(?)에 맞게 하은주(夏殷周)의 정통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 설명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본받아야 할 夏나라의 대표적인 사례로 의 ‘時(책력)’을 시행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 간략한 사실관계만의 언급으로는 도저히 공자의 깊은 뜻을 안연(顏淵) 이외에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드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주자는 다음과 같은 상세한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夏時(하시)’란 북두성 자루가 날이 처음 어두울 때에 寅方(인방)을 가리키는 달로써 歲首(세수, 정월)를 삼는 것이다. 하늘은 子會(자회)에서 열렸고, 땅은 丑會(축회)에서 열렸고, 인물은 寅會(인회)에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북두성 자루가 이 세 방위를 가리키는 달을 모두 歲首(세수)로 삼을 수 있어서 三代(삼대)가 차례로(번갈아) 쓴 것이다. 夏(하) 나라에서는 寅月(인월)을 사용하였으니 人正(인정)이 되고, 殷(은) 나라에서는 丑月(축월)을 사용하였으니 地正(지정)이 되고, 周(주)나라에서는 子月(자월)을 사용하였으니 天正(천정)이 된다. 그러나 철로써 농사일을 하니, 그렇다면 세월은 마땅히 人正(인정)으로써 벼리(기준)를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 하나라의 때(曆法(역법))를 얻었다.” 하셨는데, 해설하는 자가 〈夏小正(하소정)〉의 등속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철의 바름과 그 令(영)(時令(시려))의 좋음을 취한 것이요, 여기에서 또 이것을 가지고 顏子(안자)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조금 복잡한 설명이긴 하지만, 핵심을 정리하면, 결국 위의 설명과 같은 이유로 農曆(농력)은 夏의 人正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풀어 말하자면, 통치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도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두 번째로 공자가 殷나라의 본받아야 할 사례로 그 수레를 타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商(상) 나라 수레는 木輅(목로)이니, ‘輅(로)’는 大車(대차)의 이름이다. 옛날에는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을 뿐이었는데, 상나라 때에 이르러 輅(로)라는 이름이 있었으니, 비로소 그 제도를 달리 한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수레를 금옥으로 꾸몄으니,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망가지기 쉬워서 상나라 輅(로)가 질박하고 튼튼하면서도 等威(등위, 신분의 등급)가 이미 분별됨만 못하였으니, 이는 질박하면서도 그 中(중)을 얻은 것이다.  

   

후대인 주나라의 수레로 넘어가면서 치장을 금옥으로 한 것이 오히려 그 효율성을 해치고 본질을 잊은 것이라 지적하면서, 질박하면서도 그 본질과 의도에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조점을 둔 가르침이다. 

    

그리고 周나라의 본받아야 할 사례로 ‘면류관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주나라의 면류관은 다섯 종류가 있으니, 祭服(제복)에 쓰는 冠(관)이다. 관 위에는 덮개가 있고 앞뒤에는 술이 있으니, 黃帝氏(황제씨) 이래로 이미 있었으나 제도와 儀等(의등, 의식의 등급)이 주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다. 그러나 그 물건 됨이 작으면서 모든 몸의 위에 얹는다. 그러므로 비록 화려하더라도 사치함이 되지 않고 비록 허비하더라도 사치함에 미치지 않으니, 夫子(부자)께서 이것을 취하심은 또한 문채 나면서도 그 中(중)을 얻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치장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지나칠 수 있는 면류관의 장식에 대한 부분이 갖는 의미를 주나라에는 완성하였다는 평가로 이해하면서, 단순히 화려한 치장이라고 하여 그것을 배격할 것만이 아니라 그 본질과 의도를 분명히 하면서, 사치스러운 부분으로까지 넘치지 않는 선을 유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안연(顏淵)의 질문이 나라가 아닌 천하에 해당한다는 무엇보다 명확한 근거. 상급자 수준만이 이해한다는 음악에 대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공자는 韶舞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고급자 수준에 맞춰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설명하였다.     


그 盡善盡美(진선진미)함을 취하신 것이다.     


행여, 안연(顏淵) 이외에도 그 대화를 듣고 가르침을 삼을 제자들을 위해 공자가 직접 이 장에서 강조하는 가르침의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鄭나라 음악과 말재주 있는 사람의 반대 사례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상세한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사전적인 주석을 덧붙인다.     


‘放(방)’은 금하여 끊음을 이른다. ‘鄭聲(정성)’은 정나라의 음악이요, ‘佞人(녕인)’은 몸을 낮추고 아첨하며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殆(태)’는 위태로움이다.     

이 간단한 사전적 주석에서도 이제까지 당신이 어렴풋하게 오해하고 있던, ‘말 잘하는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들어있음을 놓쳐선 안된다. 공자가 그토록 ‘말 잘하는 이’에 대해 보였던 경계와 비난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그저 달변(達辯)인 사람이 아니라. ‘몸을 낮추고 아첨하기 위한 말’만 잘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가르침을 담고 있는 행간의 깊이와 크기에 감탄한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내용을 정리한다.     


“政事(정사)를 물은 것이 많으나 오직 안연에게 이로써 말씀해 주셨다. 삼대의 제도가 모두 때에 따라 損益(손익, 加減(가감))하였으나, 그 오램에 이르러는 폐단이 없지 못하였다. 주나라가 쇠함에 聖人(성인)이 나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선왕의 예를 참작하여 만세에 항상 시행할 수 있는 도를 세우시어, 이것을 말씀하여 그 兆(조, 단서)로 삼으셨으니, 이것을 말미암아 찾는다면 나머지도 모두 상고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마지막 주의사항에 대해 혹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있을까 싶었던지 장자(張橫渠(장횡거))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예악은 다스림(정치)의 법이니, 정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함은 법 밖의 뜻이다. 하루라도 이것을 삼가지 않으면 법이 무너지니, 虞(우, 舜(순))나라와 夏(하, 禹(우))나라의 군신들이 돌아가면서 서로 경계하고 신칙한 것은 뜻이 이와 같다.” 또 말씀하였다. “법이 확립되고 이것을 잘 지키면 덕이 오래갈 수 있고 업이 커질 수 있다. 정나라 음악과 말재주 있는 사람은 人君(인군)으로 하여금 지키는 바를 상실하게 하기 때문에 이것을 추방하고 멀리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씨(尹焞(윤돈))는 이 장의 가르침이 결국 공자가 <춘추(春秋)>를 집필하게 된 의도와도 맞닿아 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이른바 ‘百王(백왕)이 바꿀 수 없는 大法(대법)’이란 것이니, 공자께서 《春秋(춘추)》를 지으신 것은 이러한 뜻이다. 공자와 안자가 비록 이것을 당시에 행하지 못하였으나 그 정치하는 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연(顏淵)은 벼슬하는 일‘따위’에는 일말의 사리사욕이라고는 없었던 인물이었고, 실제로 짧았던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몸소 증명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천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던 이유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스승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짐작하게 된다. 

    

잘못을 깨달을만한 수준의 경지에 공부와 수양이 다다른 사람은 질정(質正)이 필요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 그 삐뚤어진 악행을 멈추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질정(質正)하여도 악착같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수천 년 전 공자와 그의 수제자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잡지 못하는 현실이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더 강화되고 더 악랄해진 인간군상들이 용산에, 여의도에 자리 잡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을 목도하며, 한심스러움을 넘어 자괴감마저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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