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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4. 2022

당장의 안락을 위해 내일의 폭망을 초래할 셈인가?

오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내일은 없다고 여기는 하루살이들에게.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이 장은 짧은 여덟 자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멀리까지 생각하는 사려 깊음을 갖추지 못하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이 가르침은 언뜻 보기에는 역시나(?) 당연한 이야기로 아무런 위화감없이 읽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맞다. 이젠 그런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다.     


이 장에 대한 주석에서 소동파(蘇軾(소식))는 탁월한 문학적 분석력을 통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밟는 것은 발을 용납하는 곳 외에는 모두 無用之地(무용지지, 쓸모없는 땅)가 되지만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 천 리 밖에 있지 않으면 화(禍)가 안석(几席(궤석))의 아래에 있게 된다.”     


주석치고는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이다. 지금 자신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 이외에는 쓸모없는 땅이라는 표현 자체도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비유이다. 서 있기 위한 공간으로도 그렇고 자신이 밟고 다니는 땅 이외에는 당장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나면 여간해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비유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장의 표면적인 의미는, ‘장래를 숙고하지 않으면 발밑에서 憂患(우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권계이다. 그런데 조금 깊이 들어가 들여다보면, 장래의 일만 생각하고 발밑의 작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 역시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은 자명하다. 즉, 어느 하나를 강조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놓치게 된다는 통상 어법상의 문제를 공자는 독특한 자신의 어법으로 보완하였다. 공자도 먼 생각(遠慮)을 중시하라고 강조했을 뿐, 가까운 근심거리(近憂)를 소홀히 하라고 말한 적은 결코 없다는 묘한 방어체계가 이 어법에는 담겨 있다.     


‘수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라는 명제가 영어나 국어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닌 것과 같다. 그것은 다시 돌려 생각하면, 먼 생각을 중시하라는 말 자체에는 먼 생각에 중심을 두는 것만큼 가까운 바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은 오히려 그 반대급부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遠慮만 숭상해서는 안 되며 군자가 힘써야 할 바는 가까운 데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일은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 작은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그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나가야 하되,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한 중요한 부분은 목표가 되는 바를 명확하게 정하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노력들이 쌓여 큰 그림을 이뤄내는 초석이 되기 위해 큰 그림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기적 연관성을 갖게 된다.     


공자나 주자의 주석을 통해 이 장에서 말하는 부족함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등장하지 않았기에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예를 제시하다면, 먼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가까운 근심이 생긴다는 것은,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궁극적인 지향점의 완성을 위함이 아닌 눈앞의 일확천금이나 이익을 위해 권력에 붙어 아부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많은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왔다시피, 영구히 지속되는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얻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현재 살아있는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자들은 권력이 교체되는 순간 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젊다 못해 어린 인재들이 공부를 하던 운동을 하던 지금의 승부에 집착하여 올바르지 못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지금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일탈하는 순간, 그들은 대성(大成)할 수 있는 길목에서 일찌감치 미래의 꿈을 꺾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어린 인재들을 바르게 인도해줘야 하는 스승관 부모의 역할을 한 아이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리고 미숙하여 실수하고 실패할 수는 있다. 어떤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서 훌쩍 최고의 자리에 한 번에 오르는 자는 있을 수도 없거니와 우연이라도 그런 행운(?)을 갖고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은 단 한번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소나무만이 겨울에 그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임을 그 과정을 겪고 이겨낸 이들은 안다. 그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어지간한 풍파에는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오른 이만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바로 이 장의 가르침이다.     


그러한 이유를 근거로, 교육을 흔히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부른다. 많이들 사용하고 들어 봤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하지 않는 바로 그 ‘백년(百年)을 두고 세워야 하는 원대한 계획(大計)’이 교육이어야 함은 그렇게 교육을 받은 이들이 곧 이 나라의 미래이고 그 미래를 제대로 완성하기 위해 현세대의 어른들이 그 계획을 마련하고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다.     

연전에, 엄마 아빠가 없는 손주를 키우던 77세의 할머니가 자신의 고등학생 손주들에게 잔소리를 한다고 이유로 수차례 칼에 찔려 사망했다는 사건을 보고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고3과 고1일이던 형제들은 십여 년 전 자신들을 버리고 연락이 두절되어버린 부모에게서 떨어져 장애를 가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초수급가정에서 지원을 받아가며 자라왔다고 했다. 살인의 이유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심부름 때문이었다고 형제는 밝혔다고 한다.      


자신들을 십여 년 동안 키워왔던 할머니를 수차례 난자하듯 칼로 찌른 형제를 119에 신고한 것은 장애를 가진 할아버지였다. 손주들이 할머니를 수차례 칼로 찌르고 절규하는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다가서지도 못하게 한다는 흐느낌에 가까운 절박한 신고였다고 한다.      


한창 혈기방장한 고1과 고3 남자아이들에게 장애를 가진 77세의 할머니는 힘으로 맞서는 것은 고사하고 저지하는 것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먹이를 주고 키워주던 맹수에게 죽임을 당한 조련사들의 이야기를 외신에서 보게 되더라도 ‘짐승만도 못한 것’이라는 탄식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머리 검은 짐승이 아무리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춘기라 하더라도 부모를 대신해서 어렵게 자기 형제 두 명을 십수 년 키워준 정을 살인으로 마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극이라 할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고 몰려든 취재진의 카메라에 그 집의 옥상에 걸려 있던 손주들의 교복 셔츠가 잡힌 것이 나의 가슴을 내내 아리게 만들었다. 어떤 말 못 할 사연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장애를 가지고 기초수급가정에서 노인 두 명이 다 큰 고교생 손주를 두 명이나 키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과 잔소리나 심부름과는 별개로 성치 않은 몸으로 다음 주 월요일에 손주가 깨끗한 교복을 입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빨래를 널어두었을 할머니의 마음이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평생의 멍에로 손주의 가슴에 얹어질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굳이 이 사건이 대단한 이슈로 부각되지도 못했던 이유는, 부모의 재산을 갈취하고 미리 빼앗기 위해 부모를 감금하고, 사고사를 위장해 죽이려 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말종들이 점점 더 늘어나 이제는 존속 사실이 새삼스럴 것도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몇 주전 우연치 않게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딸아이 때문에 힘겨워하는 아빠들의 하소연을 각기 다른 형태의 상담 요청으로 도와주는 일이 있었다.     


한 아빠는 고1 딸아이와의 충돌로 인해, 딸아이가 아빠를 보기만 하면 욕설을 쏟아붓고 날 선 반응으로 갈등을 겪어 고3이 되는 2년 동안을 아주 기본적인 대화만을 내내 카톡으로만 소통을 해왔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리적인 질풍노도의 시기는 그렇게 시간을 두고 조부모에게 중재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맡기게 되었고 그 2년이 지나 딸아이가 성년을 맞이할 즈음에는 마치 폭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아빠를 마주 대하게 되면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짓는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아빠는 현재 중3인 딸아이가 가출과 자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혼자서 나가 살겠다는 몽니를 부리던 끝에 핸드폰을 압수하고 통제하겠다고 하자, 면전에서 욕설을 내뱉었고 강하게 규제하겠다고 결심하고 따귀를 때렸고 매를 손에 들었더니 바로 경찰에 아동학대를 당했다며 아빠를 신고했다는 사건에 대한 상담이었다.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심리상담은 물론이고 경찰에 입건되어 조사를 받아야 하는 법적인 대응을 위해 관련 법령들도 찾아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2021년 1월부터 시행된 부모 체벌에 대한 금지 이슈였다.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꾸준히 발생하면서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고, 이른바 ‘징계권’이라고 하는 민법 915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용인되던 ‘사랑의 매’라는 것을 법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흐름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징계권’이란 민법 915조를 말하는데, 친권자(부모)가 자녀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음을 규정한 법률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조항이 아예 폐지되어 2021년 1월부터는 부모의 체벌에 대한 형사처벌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집안에서 논란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정인이 사건을 전후로 아동학대의 대부분이 부모에 의해 집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현장에서의 논란은 사춘기의 아이들이 욱하는 마음에 부모와 교사를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에서는 일반 형사건을 처리하듯이 물리적 체벌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조건 송치하거나 최소한 가정법원에 보호처분을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민법 915조의 징계권을 폐지하게 된 가장 큰 사유는, 학대 행위자의 범죄를 면책하는 사유로 작용하고 친권을 억압적인 지배권으로 보고 있다는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사춘기라는 생리적인 이유만으로 벌어지는 부모에 대한 욕설이나 폭력에 대해 부모가 훈육을 위한 체벌조차 ‘법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법조계에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고 그것으로 최소 770만원의 수임료를 부르며 자녀의 고소를 방어해주겠다며 홍보하는 눈쌀찌푸려지는 인터넷 광고가 버젓이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게 도움을 청한 아빠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오죽했으면 엄마가 자신에게 힘으로 대항하는 중1 남자아이에게 맞다가 사랑의 매를 들었다고 하여 검찰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내리고 그것조차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헌법재판소에 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한 엄마의 사례가 작년 봄 상징적인 판례로 검색되었다.     


말도 못 하고 공포에 떨었던 정인이의 양부모 폭행 사실에 대해서는 대강 조사하고 불송치 결정한 경찰과, 그것에 불기소 도장을 찍어줬던 검찰들이 욱하는 마음에 아동학대라며 신고한 사춘기 아이들의 신고와 고소에는 ‘정말로 처벌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며 그 동그라미를 보고 원칙대로 일처리를 한답시고 아이를 훈육한 부모를 검찰에 송치해버리고 검찰은 그나마 양심에 찔린다고 관대한(?) 처분이랍시고 기소유예를 해주는 것으로 쇼부(?)봐주는 행태가 벌어진 것이다.     


https://brunch.co.kr/@ahura/1058


이미 발검 스쿨의 학도라면 지겹도록 들어왔을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으로 나는 돌이 갓 지난 자신의 딸아이를 물건처럼 던지려고 했던 현역 목사를 고발했었다. 경찰은 어떤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았는지 아니면 그냥 게을렀을 뿐이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을 무혐의로 눈감아줬고, 그 진실을 밝히고 일을 바로잡으려 하자, 이젠 경찰의 치부를 인정해버리는 꼴을 자인할 수는 없다면 끝까지 그들은 사건을 은폐 축소하여 심지어 아기를 던지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현장에 안고 있었다며 거짓까지 꾸며가며 형사처벌이 되지 않는 가정법원에 보호처분 의견으로 송치해놓고 검찰에 송치했다며 일사부재리에 해당하니 사건의 증거가 나왔어도 재수사를 할 필요가 없다며 검찰과 짜고 치는 고스톱을 쳐댔다.     


정작 아동학대인지 정당한 훈육이었는지조차 자기 자식이 아니니 할 필요도 없다며 법대로 송치하고 법대로 기소하고 약식기소로 벌금 때리고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백년지대계’는 고사하고 그저 업무를 쳐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춘기가 아니라 오춘기라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부모의 올바른 가르침에 의해 올곧게 자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한 아이가 올곧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 마을 전체가 힘을 쏟아야만 한다고 말이, 사회가 어른으로서 미래의 먼 계획을 생각한다면, 진정해야 할 책무가 크다는 점을 강조한 것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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