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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5. 2022

나보다 나은 이를 추천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 있지마라

자기 코드에 맞는 자들만으로 자리를 채우려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子曰: “臧文仲, 其竊位者與! 知柳下惠之賢, 而不與立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臧文仲은 지위를 도둑질한 자일 것이다. 柳下惠의 어짊을 알고서도 더불어 조정에 서지 아니하였구나.”     

이 장에서는 장문중(臧文仲)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하는 형태를 빌어 그 시대의 문제가 되는 위정자들을 꼬집고 있다. 당대 위정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지위와 그 벼슬자리가 훔친 것이라는 파격적인 표현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신랄한 일침으로 꽂힐 수밖에 없다. 장문중(臧文仲)의 경우 그런 평가를 하게 된 근거로 유하혜(柳下惠) 같은 어진 은자를 들어 써서 함께 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신랄한 공자의 비유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竊位(절위)’는 그 지위에 걸맞지 못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있어서 마치 도둑질하여 얻어서 몰래 차지한 것과 같음을 말한다. 柳下惠(유하혜)는 노나라 대부 展獲(전획)이니, 字(자)는 禽(금)이요 食邑(식읍)이 柳下(유하)이고 시호가 惠(혜)이다. ‘與立(여립)’은 그와 더불어 함께 조정에 서는 것을 이른다.     


너무도 간략하게 문맥만을 설명하고 유하혜(柳下惠)가 누구인지 간략한 소개 정도에 그쳤다. 유하혜(柳下惠) 보다 오히려 장문중(臧文仲)이 누구였는지 갸웃해하는 학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장문중(臧文仲)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정리하여 기억을 상기하도록 한다.     

장문중(臧文仲)은 魯(노) 나라 대부로 성은 臧孫(장손)이고, 이름은 辰(진)이다. 仲은 字(자), 文은 그의 시호이다. 三桓(삼환)의 세력이 그렇게 강해지지 않았을 때 활동했는데, 지혜롭다는 세간의 평판이 들었다. <논어(論語)>에서는 이 장을 포함해서 단 두 번 등장하고 언급될 뿐이지만 두 번 모두 공자에게 혹평을 받고 있다.   

   

그는 제후가 지닐 卜龜(복구)인 蔡(채)를 지녔고, 사당의 기둥머리에 山(산) 모양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 마름 문양을 넣었다는 이유로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공자에게 신랄한 비판을 들었던 인물이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안회(顏回)’에 보면, 공자가 안회에게 장문중(臧文仲)을 언급하며 ‘그에게는 어질지 못한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지혜롭지 못한 것도 세 가지나 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부분의 내용을 간략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금(展禽; 유하혜(柳下惠))같이 어진 사람을 자기의 아랫자리에 두어 자기와 함께 조정에 서지 못하게 했으며, 관문(關門)이 없던 곳에 육관(六關)을 설치해서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박았으며, 자기 첩을 시켜서 부들자리를 짜게 해서 이(利)를 탐하였으니 이것은 세 가지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분에도 맞지 않은 거북 기르는 집을 만들었고, 종묘(宗廟)에서 사리(事理)에 어긋나게 제사 지내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며, 바다에서 날아온 새를 제사 지냈으니 이것은 세 가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주자의 너무도(?) 간략한 주석에 초심자들이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까 우려했던지 범씨(范祖禹(범조우))가 다시 상세하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연하였다.     


“臧文仲(장문중)이 노나라에서 정사를 하였으니, 만일 어진 이를 알지 못하였다면 이는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도 들어 쓰지 않았다면 이는 어진 이를 엄폐한 것이다. 지혜가 밝지 못한 죄는 작고 어진 이를 엄폐한 죄는 크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不仁(불인)하다고 하셨고, 또 ‘지위를 도둑질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주석에서 강조하는 바는 몰라서 어진 이를 등용하지 못했어도 잘못이고, 만약 알면서도 그를 중용하여 함께 조정에 서지 않았다면 그것은 더 문제가 크다며 어떤 식으로든 공자의 신랄한 비판을 받을만한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설명한 것이다.   

  

도대체 당시에 어떤 상황이었길래 지혜롭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던 장문중(臧文仲)은 공자에게 이런 혹평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까? 당시 상황을 먼저 조금 상세히 들여다보자.     

<좌전(左傳)>의 희공 26년조를 살펴보면, 齊(제) 나라가 노나라의 북쪽 변방을 침략했을 때, 유하혜(柳下惠)가 장문중(臧文仲)에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섬기는 방도라는 설명으로 대부로서 어떻게 정사를 처리해야 하는지를 조언해주었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또 노나라 동문 밖에 ‘爰居(원거)’라는 바닷새가 날아와서 장문중(臧文仲)이 새에게 제사 지내려 하자, 다시 유하혜(柳下惠)가 국가 전례를 명분 없이 더해서는 안된다며 따끔한 조언을 해준 바 있다. 夏父弗忌(하보불기)가 僖公(희공) 신위의 반열을 올리려 했을 때, 유하혜(柳下惠)는 귀신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를 모두 범하게 된다며 그것을 만류했다. 그래서 <맹자(孟子)>에서는 유하혜(柳下惠)에 대해 ‘和(화)를 이룬 성인’이라고까지 칭송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논어(論語)>에서도 몇 차례나 언급되어 유하혜(柳下惠)에 대한 공자의 허여(칭찬)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뒤에 공부하게 될 ‘미자편(微子篇)’의 8장에서도 그는 주나라 당시의 일곱 현인(賢人)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인데, 공자가 직접적으로 그에게 평가한 내용을, 아래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제자행(弟子行)’에서 살펴보면 공자가 그에 대해 왜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다.      


“효도하고 공손하고 자애롭고 어질며, 덕을 믿고 의리를 도모하며, 재물 모으기엔 간략히 하고 가벼이 여겼으나 빈곤하게 지내지 않는 것은 유하혜(柳下惠)의 행실이다.”     

임금이 직접 현장에서 인재들의 면면을 알아보고 파악해서 그들을 등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을 보좌하면서 추천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훌륭한 인재를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은 공자에게 있어, 단순한 현명함을 넘어 반드시 해야 할 책무이자,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책이자 무엇보다 자신의 수양 정도에 따라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과감하게 추천하여 나보다 더 중책에 추천할 수 있는 도량을 갖추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사례는, 앞서 ‘헌문(憲問) 편’의 19장에서도 공부한 바 있다. 공숙문자(公叔文子)가 자신의 가신이던 대부(大夫) 선(僎)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했다면서 ‘文’이라는 시호를 줄만 하다고 극찬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에서 공자에게 죽비를 얻어맞고 있는 장문중(臧文仲) 역시 시호(諡號)가 ‘文’이라는 것은 공자의 평가와 세속적인 평가가 얼마나 간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공자의 시대부터 수천 년이 흐른 최첨단의 21세기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떠한 첨단과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백성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리는 진정한 정치는 최첨단 시스템도, 관련 법령도, 멋진 집무실 건물도 아닌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에서 공자가 왜 장문중(臧文仲)의 부족함을 비판하면서 ‘지금의 자리를 훔친 것이다’라는 독특한 표현을 쓴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훔쳤다’라는 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편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장문중(臧文仲)도 자신이 그 자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임명된 신하의 신분이기에 선택된 입장이다. 자신을 임명해준 사람이 있고, 자신을 추천한 사람이 있으며 자신이 그 지위에 있다고 지지하고 따르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바로 그 부분에 주목한 것이다. 임금에게 임명되고 간택되어 벼슬을 하는 자라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면,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을 갖춘 이를 추천하고 그렇지 못한 자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훔쳤다’라는 신랄한 비판을 직격한 것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내내 내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왜 정말로 학계의 최고수라고 하는 이들은 이 학교에 있지 않을까? 왜 후배 학자가 될 자신들의 제자로 대학원생들을 뽑으면서 그들의 자질이나 능력 대신 교수들의 입맛에 맞는 이들만을 귀여워하고 밀어주며 이상한 리그를 그토록 기를 쓰고 구축하려들까?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는 여의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상 모든 구석구석은 정치가 아닌 곳이 없었고 자신들의 입으로 선량한 국민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 중에서 정치꾼과 다른 이 한 명 없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정치를 지저분 너저분하게 펼쳐가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한 결정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결국 이 장에서 공자에게 묵직한 어퍼컷을 얻어맞는 무려 2세대나 선대(先代)인 장문중(臧文仲), 한 사람만이 들을 잔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사(人事)를 저지른 이들의 변명은 그야말로 다채로웠다. 지방대학에서 명문대를 배제하면서 기어코 자신의 대학 출신 인물들을 선발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그들의 말도 안 되는 궤변처럼 명문대 출신은 지방대보다 인간성이 떨어지고 인간미가 없다는 식의 설명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그들도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방대학에서 하나같이 자신의 학교 출신을 절반으로 채우면서 명문대 출신의 인물들을 절반으로 채우는 것은 나름의 정치적(?) 합의였다. 내가 평생을 직접 목도했던 학계의 사례를 들기는 했지만, 행여 지방대는 무조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냐며 오독하고 항변할 이들을 위해 반대 사례를 명확하게 다시 설명한다.     


지방대 출신이든 경성제대 출신이 아닌 사람임에도 이후에 노력을 통해 훌륭한 성과를 보이거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자질과 성과를 내는 이들도 있지만 경성제대의 사람들은 결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방대의 촌로(村老)들이 그러하든 경성제대의 정치꾼들에게도 사실관계는 평가의 기준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자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장을 통해 그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소리치고 있다. 자신의 자리에 자신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이를 추천하는 군자로서의 풍모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과 함께 국정을 도모할 수 있는 지위까지 추천하여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가 바로 능력을 갖춘 자인가 아닌가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799429

올해 여름, 요즘 가장 핫하다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서 경성제대의 모 연구실의 조직적이면서도 천인공노할 논문 표절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문제의 연구실에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지도교수는 무려 ‘4차 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였고, 버젓이 표절 논문을 냈다가 내부 고발자의 유튜브 고발로 인해 만천하에 드러난 학회는 인공지능(AI) 분야의 최고 학회였다.     


언론에 이 사실이 터져 나오고 개인적인 망신은 고사하고 나라망신으로 일파만파 학계가 술렁이자 지도교수는 멋지게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라고 언론에 당당하게 인터뷰까지 했다. 해당 논문의 공저자로 포함된 대학원생에는 과기부 장관의 아들까지 끼어 있음이 언론을 통해 공공연하게 밝혀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수습(?) 과정에서 학계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지경의 점입가경이 이어져 나왔다. 모든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지도교수라는 자는 해당 논문을 작성한 주저자인 학생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서울대 학부 출신도 아닌 대학원을 서울대로 와서 이제 박사논문을 내고 학위를 받기 몇 개월을 앞두고 있던 그는 이제 학계에서는 매장 아닌 매장을 당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자기 한 사람의 실수라고 떠들어댔다.     

대학원 과정에 지도교수가 있는 것은 학부에서 형식만 갖추고 대강 상담을 빌미 하여 학생들의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담임제와 같은 지도교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공계에서 주저자 외에 공저자를 넣고 그들의 이름으로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것은 그것이 주저자는 물론이고 공저자나 지도교수에게도 연구실적으로서 인정되는 성과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https://blog.naver.com/cooljason92/222790345006

그런데 지도교수라는 자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이 지도한 학생이, 게다가 자신의 이름이 지도교수로 들어간 논문에 대해, 자신은 그 내용에 대해 표절인지도 잘 몰랐고, 모두가 그 학생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비리라고 하질 않나, 공저자로 들어간 장관의 아들은 손절하듯 제대로 논문을 살펴보지도 않았고, 자신이 고쳐준 내용이 반영되지 않고 주저자에 의해 작위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을 했다. 정작 벌어진 사건보다 사건 이후 벌이는 그들의 후안무치한 태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고스란히 한 껍질을 벗겨 그 민낯을 드러내 보였다. 당신은 과연 그들과 다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순서대로 <논어(論語)>를 공부하는데 왜 갑자기 12장이 빠졌지 싶어 의아해할 학도가 혹여라도 있을까 싶어 한 마디 남겨둔다. 12장을 건너뛰고 13장으로 넘어온 이유는, 앞서 ‘자한(子罕) 편’에서 동일한 문구를 이미 공부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다. 물론 감탄사 세 글자가 새로 더해지긴 하였으나 다시 뜻을 새기며 공부하는 것은 중복되기 때문이니 참고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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