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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6. 2022

언제까지 네 잘못을 남 탓이라 우길 것인가?

군자는 잘못된 결과에 대한 원인을 언제나 자신에게 먼저 찾는다.

子曰: “躬自厚, 而薄責於人, 則遠怨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기를 엄중하게 하고 남에게 책하기를 적게 한다면 원망이 멀어질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하다. 스스로를 더 엄중하게 탓하고 남을 덜 탓한다면 원망함이 멀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 가르침에는 정작 ‘왜’라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그래서 간단명료해 보이지만 어떤 일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것인지를 물으면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마지막에 원망이 멀어진다는 내용이 누가 누구를 원망한다는 것인지도 주어와 목적어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자는 간략하게 그 생략된 부분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스로 책하기를 후하게 하므로 몸이 더욱 닦이고, 남을 책하기를 적게 하므로 사람이 따르기 쉬우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주자는 주석을 통해, 원문에서 원망이 멀어진다는 의미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일이 줄어든다’고 설명한다. 스스로를 탓한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뭔가 잘못된 결과를 마주했을 때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는가 남의 탓을 하는가에 대한 차이가 결국 다른 사람들 탓을 하지 않는 삶의 자세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인정하여 원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남을 탓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가 아니라 ‘적어야 한다’는 완곡한 듯한 표현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을 갖춘 공자의 견해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군자라면 대체로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스스로를 통제하고 수양한 군자라 할지라도 세상살이가 모두 내 뜻 같을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일이 틀어짐에 있어 다른 사람이 방해가 되거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남을 탓하는 것이 적어야 한다고 한 것은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완벽주의에 가까운 수양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뜬금없이 왜 완벽주의가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의아한가? 내가 아무리 나를 통제하고 수양했다고 하더라도 더불어 사는 사회의 구조상 내 의도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일을 망쳐버리거나 방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완벽한’ 군자라면, 그 변수까지도 감안하는 완벽주의를 보여야 함을 이 장에서 역설한다.


즉, 내가 완벽할 것을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코 남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심하게 질책하지 않는 것이 군자로서의 자세라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공자의 기준이 이른바 ‘넘사벽 완벽주의’이니 평범한 인간이 과연 그 경지를 오를 수 있을까 손사래를 치며 말도 안 된다고 시도도 해보기 전에 구시렁거릴 자들이 쇄도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인다. 공자는 분명히 최고 정점의 목표를 강조하였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자 역시 자신을 포함하여 평범한 자들이 그저 노력하는 것만으로 그 완벽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노력만으로 군자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공자가 군자를 목표 지향점으로 설정하지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그토록 역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천주교단에서 ‘내 탓이오!’라는 운동을 벌인 바 있다. 사회 전반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든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고 그런 풍조가 만연하면서 자신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이기심이 팽배한가에 대해 종교적 차원에서 회개하라는 움직임에 다름 아니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터진 말도 안 되는 그 사건이 터진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엊그제 자신의 친구 두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던 고교생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가슴이 아렸다.


그의 부모는 그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했을 것인가. 그 사지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보내고 피의 절규를 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부둥켜안으며 얼마나 안도하고 가슴을 수천수만 번 쓸어내렸을까?


그런데 그런 아들이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가면서 겨우 일상에 회복되어가는 듯했는데 돌연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숙박업소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어떠했을까? 나로서는 그 단장(斷腸)의 아픔을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다.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친구들 두 명을 떠올리며, 자신만 홀로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내 힘겨운 날들을 보내던 그 어린 친구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릴 길이 없다.

정신 나간 경상도 어느 구석 언저리에서 빨간 띠를 두르고 시의원이라는 직분으로 월급을 받아먹던 여자의 SNS 사태를 보면서 세월호 사태 당시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했다면서 길길이 날뛰던 빨간당 전 국회의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망발을 하는 것으로 인해 어떤 이득을 얻고자 했는지 나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그저 단체여행 가는 배 안에서 배가 기울어져가는데, 잘못된 어른이라는 것들이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만 믿고 따르다가 바닷속에 생매장된 어린아이들과 이번 이태원 참사가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르다. 하지만,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죗값을 치르고 사회에 나왔다가 다른 연쇄 살인마나 묻지 마 살인범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고 하여 그 죽음이 당연하다거나 쌤통이라며 천벌이라며 박수를 칠 권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을뿐더러 그런 언행을 보이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이 사회에 가득 차 있을 거라는 끔찍한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다.


세월호 사태 당시 이미 바다에 생매장 아이들을 꺼내겠다며 자진해서 산소통과 장비를 들고 팽목항을 찾은 이들 중에서는 고 김관홍 씨 같은 민간잠수사들이 있었다.

진도에 세워진 의인 김관홍의 동상

자신의 생업을 이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김관홍 씨는 자신의 자녀도 세 명이었다. 사고가 난 직후 팽목항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런 그를 보며 그의 아내는 ‘어차피 당신이 내려가도 지금 전문 잠수부들이 500명이나 내려가 있다고 방송에도 그런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내 알고 지내던 잠수사들에게 계속 연락이 오고, 그들의 현장 상황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면서 계속 신경 쓰여 도저히 일을 손에 잡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아내는 이내 그를 보내주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공중파와 케이블 뉴스로 떠들어대던 전문 잠수부 500명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이었다. 그나마 현장에 있던 백여 명조차 되지 않는 잠수사 중에서도 그 열악한 환경에 실제로 잠수가 가능한 사람은 25명 정도의 민간잠수사로 극소수였기에 그의 도움은 절실한 상황이 맞았다.


목숨을 걸고 물속에서 라인을 연결하고 선내 집기를 정리하여 희생자 유품을 올려주는 등 사고자 수습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를 포함한 민간잠수사 25명이었다. 이들이 해경에게서 전달받은 도면이나 참고자료, 수색 시 유의사항이나 수색 장소 등에 대해 들은 설명 등은 전혀 없었다. 또 해경 측에는 심해잠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없기에,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거나 민간잠수사들이 세월호 안에 들어가 시신을 찾아내 끌어안고 나오면 이를 수습하는 일만 했을 뿐이다.


이후 해경의 이춘재 경비안전국장은 1차 세월호 청문회에서 ‘민간잠수사가 수면까지 올라오면 거기서부터 함께 한 것’이라는 둥, ‘역할을 나눈 것’이라며 회피성 변명을 얼버무리기 일쑤였는데, 간접적으로나마 결국 선체에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하는 데 있어 해경 측의 전문가(?)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도 3개월 여가 지난 시점, 해경은 돌연 민간잠수사들을 철수시킨다. 그리고 9월 중순, 이춘재 당시 경비안전국장은 유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때 있던 잠수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특 A급이고 지금 있는 잠수사들은 C급 정도 된다.”


그러자 어이가 없던 유가족들이 ‘다 쫓아내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하면 어떡하느냐?’고 따지자, 아무렇지도 않게 유가족들에게 ‘다시 데려오면 된다’는 영혼 없는 대답으로 응대했다.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박근혜 정부는 자진해서 달려와 돕겠다고 했던 민간잠수사를 고소하는 만행을 벌였다. 민간잠수사들 중 가장 연장자였고 자연스레 지휘자 역할을 했던 공우영씨를 5월에 일어난 이광욱 잠수사 사망사건과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2014년 8월 26일 고소했던 것이다.


심지어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 문서를 짜깁기한 사실이 이후에 드러났다. 7월 초순 갑작스럽게 잠수사들을 쫓아낸 것도 결국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실제 공판에서 '정치' 검찰은 공우영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하는 만행을 자행한다. 다만 이례적으로 ‘국가, 해경이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잠수 부분도 물적, 인적 능력이 부족했다. 피고인의 법률적, 실질적 책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부분을 참작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하는 웃픈 블랙코미디를 찍는다.


이에 김관홍씨는 선배 공우영씨가 재판을 받게 된 그 상황에 분노를 표했다. 당시 팽목항에서 시신을 292구나 수습한 잠수팀을 지휘했던 공우영씨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1년 4개월간 재판을 받으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감내해야만 했다. 애초부터 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의 리더 역할을 했던 공우영씨에 대한 기소는 모든 민간 잠수사들에 대한 국가의 배신이고 배반 행위였다.

현장에서 유가족들이 미안한 마음에 응원을 전하고자 음식이라도 대접하겠다고 보내면, 실제 민간잠수사들에게 전달되는 양은 턱없이 부족하기 일쑤였다는 증언만으로도 그 많은 음식들을 누가 축냈는지 그 상황이 눈에 선하다. 심지어 해경은 해수부장관이 유가족들한테 잡혀있다면서 도저히 바다의 상황이 좋지 않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무작정 물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라며 등을 떠밀었다.


김관홍씨는 수색 과정에서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긴급하게 병원에 이송되어, 병원에서 한 달간 잠수를 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응급처치만 받은 후 사흘 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2015년 12월 16일, 세월호 참사로부터 만 1년 8개월 만에 이뤄진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고, 화 조절이 안되니까 그러다가 7월달 경에 지금 현재 유가족분들을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고맙다'라고, '고생했고, 고맙다'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정신과 치료제를 끊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정신과 치료제라는 게 치료가 안 돼요. 약이라는 건 화만 눌러놓는 거지…. 그 한 마디가, 그 한 마디가 저에게는….(중략) 저는 잠수사이기 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국가 국민이기 때문이기 간 거지 애국자나 영웅은 아녜요. 저희가 왜 마지막에,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11구가 남아있을 당시에 왜 나와야 했는지, 왜 저희가 그런 식으로 쫓겨나야 했는지, 우리는 포기 못했는데 그들은 왜 저희가 나가야만 했는지 저는 그걸 묻고 싶고요.

가족분들한테 저희는 구조 업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빨리 찾아서 한 구라도 더 찾아드리려고 했을 뿐이고.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 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자리에 계시는데 저희는 일명 노가다예요. 그런 사람보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천불 같은데…… 가족분들하고 저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단순한 거예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 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상황은 정확히 얘기를 해야죠. 욕을 먹더라도 …….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자리에서는 그의 동료였던 전광근 잠수사도 출석했는데, 그는 모든 사람을 다 수습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이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1년여 뒤, 그는 그 누적된 화를 치유받지 못한 채 급성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트라우마로 아이들에게 거칠게 대하게 될 것이 두렵다며 아이들까지 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호 때도 이태원 참사 때에도 정작 그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남 탓을 하고 자기 몸보신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말실수 하나도 인정하면 지는 거라 버티며 방송사를 억누르는 대통령이나 책임은 나중에 알아서 지겠다며 버티는 장관에 여당이 밀리면 안 된다며 그들을 변호하고 옹위하는 자들은 결국 이 나라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나 혼자만의 망상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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